[Opinion] 미안해요, 우리가 당신을 놓쳤어요 [문화 전반]

영화 <미안해요, 리키>로 보는 위태로운 노동문제에 대해
글 입력 2024.02.13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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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극단적으로 증폭되고 하나가 극단적으로 감소한다. 돈은 새로운 균형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많은 이들의 삶을 휩쓸었고 리키와 애비는 이 물결에 휩쓸려버린, 서로를 사랑하는 평범한 부부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리키와 애비는 이 집에서 저 집, 이 직업에서 저 직업을 전전하며 살아왔는데 리키는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고자 조금 더 많은 투자를 하기로 한다. 이 투자라 함은 방문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아내 애비의 차를 팔아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는 밴을 사는 것, 그리고 하루 14시간 택배 “자영업자”로 일해 가난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

 

 

 

당신은 근로자가 아니라는 기만


 

영화는 취업을 위해 택배사의 사장인 마로니와 면담을 가지는 리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마로니는 한가지를 분명히 한다. 바로 리키는 마로니에 의해 고용되는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라는 것. “…서명만 하면 개인 사업주 가맹주가 되는 겁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죠. 강한 전사만 살아 남아요.”(마로니) 실제로 성공하는 “개인 사업자”가 되는 길은 고단하고 험난했다. 정해진 시간에 택배를 배달해야 하는 택배사의 서비스로 인해 리키의 시계는 엄격하게 택배박스들의 사정을 따를 수 밖에 없다. 곧 리키는 자신의 밴에 플라스틱 병을 던져준 동료를 이해하게 된다. 그나마의 자존심은 초를 다투는 배송, 말하자면 초에 좌우되는 그의 밥줄 앞에 졸졸 배뇨될 수밖에 없다.

 

리키가 택배사에 고용된 근로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라는 말은 고무줄과 같이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늘어난다. 리키, 자동차 보험은 당신이 별도로 들어야 한대, 당신이 개인사업자라서. 일할 수 없는 날이 있다면 대체운전사를 구하거나 당신의 일급에 맞먹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대, 당신은 개인사업자이지만. 그리고 폭력배들이 부셔 먹은 백만원이 넘는 스캐너는 당신의 빚으로 달아놓는대. 미안해요 리키.

 

‘근로자’는 누군가에 의해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을 일컫으며 휴게시간과 주휴일 등 법적으로 보호되는 권리들을 가진다. 말하자면 근로자는 개인사업자와 달리 두터운 법적 보호를 누린다. 지금까지 법원은 근로자와 고용자 사이의 ‘종속적인 관계’의 존재여부를 근로자의 기준으로 삼아 왔는데 종속적인 관계가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고용자가 근로자에게 업무 중 ‘상당한 지휘, 감독’을 하는지 등의 여부를 판별한다. 리키와 마로니의 경우를 이 수식에 대입해본다면 리키는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의 외양을 띈다고 볼수도 있다. 따져보면 마로니는 리키의 업무 중에 그에게 전화를 해서 일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잔소리를 하지도 그를 항시 지켜보고 있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기업들은 교묘한 방식으로 개인사업자를 근로자처럼 부릴 수 있다. 택배를 스캔하기 위해 리키가 들고 다니는 스캐너는 그가 운전석을 2분이상 비울 때 마다 알람을 울린다. 그 알람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리키는 운전석으로 얼른 움직일 것이다. 마로니는 업무규칙을 어기는 운전사에게 벌점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운전사를 감독하며 리키는 대체운전자를 구하는 어려움과 지불해야 하는 비용으로 쉽게 휴가를 가질 수도 없다. '개인사업자'의 논리는 처음부터 위태롭다.

 

물론 리키에게는 여전히 한가지 종류의 자유가 있다. 그것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 그라고 ‘누가 칼들고 협박했어? 싫으면 나가’의 논리는 바로 이 하차하는 자유가 자유의 모든 내용인양 대한다. 한 사람의 자유는 부조리한 환경을 견디는 것과 아예 이탈하는 것 사이의 하나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좁혀진다. 미성년자인 두 자녀를 기르는 리키에게는 이나마의 자유 또한 없다. 폭력배에게 얻어맞아 갈비뼈가 얼얼해도 일을 하러 갈 수 밖에 없는 리키에겐 지독한 굴레 안에 있는 인간의 냄새가 풍길 뿐.

 

 

 

굴레에서


 

기업들은 가혹한 생활고에 놓인 수많은 리키들의 상황을 이용해서 그들이 거부할 수 없는 요구를 하고, 누군가의 과대한 희생으로 (실제로 필요한지 의문스러운) 과대한 편리함을 보장하는 극단적 시스템을 구축한다. 과대한 편리함을 보장한다는 것은 더 많은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균형은 오가는 돈에서 맞춰진다. 이 사람의 희생으로 누가 이익을 보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문제를 파악하기가 쉬워진다.

 

그러나 위에서 기업들이 “교묘한 방식으로 개인사업자를 근로자처럼 부릴 수 있다”라고 쓴것과 달리 이런 법적 보호를 우회하는 것이 애초부터 계획적인 것은 아닐수도 있다. 고용자들은 한쪽을 쥐어짜서 수익을 극대화시키려는 관성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근로자에 대한 보호는 신자유주의가 괴이한 형상으로 변모하는 것을 막는 방어막 중 하나이지만 시장은 다시금 이를 비껴가는 시스템을 만들고 순진하게나마 존재했던 균형을 붕괴한다. 대중은 흘깃 눈길을 주기는 하지만 여전히 편리함을 소비한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앞서는 이상 연대나 변화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택배를 받을 사람이 없을 때 리키는 'Sorry, We missed you'(죄송해요, 우리가 당신을 놓쳤네요)라고 적힌 쪽지를 문 앞에 붙이고 온다. 빚을 갚기 위해 성치 않은 몸을 끌고 일터로 나가려는 리키의 차를 가족이 온몸으로 가로 막는다. 처음에는 아들, 그 뒤에는 애비와 딸까지. 리키는 잡힐듯 말듯 하지만 결국 잡히지 않고 살짝의 위악을 곁들여 가족의 품을 벗어나버린다. 성긴 그물 사이로 리키들이 저만치 멀리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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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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