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세랑과 함께, 어떤 기계도 없이 떠나는 시간 여행 [도서/문학]

글 입력 2023.12.05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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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얻은 걸까, 빼앗긴 걸까”

 

정세랑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죽은 오빠를 대신해 남장하고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설자은이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돌아와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어째서인지 자꾸 휘말리는 기이한 사건들을 그간 쌓아 온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영민하게 해결해 나가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의 넷플릭스 드라마화로 대중들에게도 꽤 알려진 정세랑은 참신하고 어떨 땐 어리둥절하기도 한 소재를 따뜻하고 유쾌하게 풀어내는 작품들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나의 첫 정세랑 책은 19년 여름에 읽은 <피프티 피플>이다. 대형 병원을 배경으로, 그곳의 의사, 간호사, 경비원, 환자 등의 짧은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태로 보여준다. 각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 석 자를 소제목으로 한 꼭지들을 읽으며 정말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은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눈물짓는 경험을 했다.

 

이때 처음으로 필독서라서 억지로 읽는 것이 아닌 내 손으로 직접 구매해 내 시간을 할애해 읽을 것을 선택하는 자기 주도적 독서의 의미와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소설부터 시작해 다양한 장르의 꾸준히 책을 읽고 있으니, 나에게 그 책과 정세랑 작가는 큰 의미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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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갑시다, 금성으로 - 설자은이 나라 정세로 인해 예상보다 길어져 더욱 고단했던 당나라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금성으로 가는 배에서 일어난 사건을 담고 있다. 긴 항해가 시작되고 며칠 지난 어느 아침, 승객 중 한 남성이 목이 졸려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고, 그의 아내와 딸은 행방불명되었다. 자은은 외부와 통할 길 없는 망망대해 위 배 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또한 잘 숨겨왔던 정체를 백제 출신 장인 목인곤에게 한눈에 들키고는 그와의 동행이 시작된다.

 

손바닥의 붉은 글씨 - 자은은 죽은 오빠인 ‘진짜 자은’과 애정 관계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체 높고 아름다운 여성 산아를 만난다. 산아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발생한 의문의 사건을 해결할 것을 부탁한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의 손에 붉은색 글씨가 새겨지더니 의식을 잃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았으나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은 산아의 아버지와 가문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보름의 노래 - 자은의 동생 도은은 마을 여성들이 참여하는 연례행사인 베 짜기 대회에 출전한다. 그러나 누군가 모종의 이유로 도은의 팀의 베를 망쳐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이유와 범인을 찾아내는 이야기이다.

 

월지에 엎드린 죽음 - 왕은 자은을 비롯해 총명한 자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연회를 연다. 거기서 고귀한 흰 매를 부리는 매잡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자은은 특유의 예리함과 상상력으로 범인을 잡아낸다. 사실 연회는 왕이 자신의 곁에 둘 인재를 찾고자 했던 자리였고, 사건을 해결한 자은은 왕의 신임을 얻는다.

 

 

 

새 소설을 통해 본 정세랑의 작품세계


 

과거를 배경으로 한 남장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만 보면 상당히 클리셰적이다. 하지만 그 설정은 그 어떤 장치보다도 주인공 자은의 세상을 넓혀준다. 어떠한 제약도 없이 금성을 훨훨 날아다니며 지혜를 펼치는 자은을 보며, 그 사정을 아는 여동생 도은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우리까지도 자유로움과 쾌감을 느낀다.

 

이 책 속 이야기들은 모두 금성에서 펼쳐지지만, 곳곳에 현대의 우리가 하는 질문이 담겨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정폭력, 성공에 대한 열망, 동료와의 신의, 일에 대한 고민 등은 모두 시대가 흘러도 누구나 한 번쯤은 만나게 되는 어려움이다. 비록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내가 하는 고민이 아주 먼 과거에도 누군가의 고민이었을 것을 생각하면 위로가 되기도 한다.

 

정세랑 소설은 작은 등장인물들 한 명 한 명까지도 모두 매력적이다. 이 책에서도 지혜롭고 결단력 있는 산아, 꼼꼼하고 영특한 도은, 때로는 얄밉지만 곁에서 도움이 되는 인곤 등 다채로운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누구 하나, 심지어는 악인까지도 사정을 듣고 나면 그저 미워할 수만은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정세랑의 소설을 읽을 때면 마음이 편하다.

 

무엇보다 정세랑은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세상이 늘 아름다워서만은 아니다. 정세랑이 이 세상을 사랑스럽게 그려내는 방식은 나쁜 면들을 모른 척 덮어두는 방식이 아니다. 곰팡이처럼 눅눅하고 지저분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면서도, 우리가 화해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가는 이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따뜻하게 품어낸다. 이것이 정세랑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최아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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