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들의 불필요한 영웅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11.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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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비롯한 웹툰과 드라마 등의 콘텐츠에서 권선징악과 사이다(주인공의 통쾌한 복수를 일컫는 말) 전개에 대한 대중의 집착은 유구하다. 학교폭력의 복수를 주제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2022)가 흥행하고 < D.P. >(2021)의 메인 빌런 ‘황장수’가 납치당할 때 시청자들이 환호를 터뜨린 것처럼 말이다.

 

그 이전에 막장 드라마가 존재했다. 시청자들의 모든 비난과 분노는 극을 진행하는 내내 한 사람에게 향한다. 희대의 악인 ‘연민정’ 역 배우가 촬영 도중 지나가는 행인에게 욕설을 들은 일화는 이를 증명한다. 선한 주인공이 악인을 벌하고 끝내 행복해지는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언제 들어도 달콤하다.

 

작품이 대량 생산되고 서사적 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캐릭터들은 입체성을 띠게 되었다. 이제 완벽히 착한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의를 위해 희생하고 약한 타인을 구하려 온몸을 던지는 히어로의 인기는 사그라들었다.

 

입체적인 인물은 사회적 정의와 개인적 욕심 사이에서 내면의 고뇌를 겪는다. 힘들게 내린 선택이 사회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일부는 당당하게 악한 행동을 저지른다. 그럼에도 이 주인공이 사랑받는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순진하고 어리숙한 선인(善人)을 모범의 표본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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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네이버 웹툰 <집이 없어>(와난, 2018)

 

 

그러나 일부 대중(이하 ‘독자’)은 주인공에게 완벽하고 절대적인 ‘선’을 요구한다. 네이버 웹툰 <집이 없어>는 소년 가장과 가정폭력 피해자처럼 사회적으로 위험에 처한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 그중 ‘백은영’은 거듭된 가정폭력으로 가출과 탈선을 일삼는 청소년이다. 그는 주인공 ‘고해준’과의 첫 만남부터 돈을 훔치고 싸움을 걸어 해준의 옆구리에 유리 조각이 박히는 사고를 일으켰다.

 

플롯이 진행되며 은영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험한 입버릇과 피해망상 증상, 해준을 향한 적개심을 보이며 독자들의 비난을 야기했다. 이들에게 은영은 아무리 반성한다 한들 절도 범죄자에 불과했다. 은영의 비도덕적 행보가 두드러지는 연재 초반부에는 그를 향한 무자비한 비난이 댓글 창을 뒤덮었다. 이후 그가 해준의 돈을 갚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일부 독자는 은영의 정신적 성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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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네이버 웹툰 <내가 키운 S급들>(비완・세리, 2021)

 

 

한편 웹소설 ⟪내가 키운 S급들⟫ 주인공 ‘한유진’은 헌터와 몬스터를 양육하는 특성을 지녔다. 그 특성으로 유진은 붕괴하는 세상을 구할 수 있지만, 그는 고뇌에 빠진다. 그가 살아가는 세상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다수의 평화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어야 한다면 선택권을 지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유진은 스스로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동생과 동료 등 주변인들을 챙기는 이타적인 성격이다. 그 본성을 따라 거대한 세상 대신 주변인의 안위를 택한 유진 또한 일부 독자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유진에게 기대한 바는 절대적 선이었다. 동생을 살뜰히 챙기고 비즈니스 파트너의 안전을 걱정하는 소시민이 아닌, 쫄쫄이 유니폼을 입고 재앙 속으로 뛰어드는 다소 올드한 히어로의 모습이다.

 

은영은 아무리 반성해도 무결한 선인이 될 수 없다. 유진은 어떤 이에게 착한 인물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이기주의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이 절대적 선의 표본이 될 필요는 없다. 주인공의 도덕적 흠결은 독자가 작품과 등장인물에 몰입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비도덕적인 인물이 플롯의 전개에 기능하는 바 역시 중요하다.

 

은영의 범죄 행위와 비윤리적 언행은 가정폭력 피해자의 상흔을 상징한다. 가출 후 해준을 만나 변화하고 성장하는 그의 모습과 대비되는 과거이기도 하다. 유진의 이기적인 선택은 역설적으로 세상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이다. ‘한유진’이라는 사람을 구성하고 살게 하는 세상은 거창하지 않다. 동생 ‘유현’과 유진의 주위를 둘러싼 헌터, 그리고 몬스터가 전부다. 그들을 구하고 그들과 함께 남은 생을 살아가기 위해 유진은 스스로에게 정당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이를 두고 어찌 이기적이라 비난할 수 있겠는가.

 

문학에서 권선징악의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세기 영국 시인 토마스 라이머의 『The Tragedies of the Last Age Consider’d』(1678)이다.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행복한 결말을 맞는 이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는 현대에 들어 조금 다른 요구에 직면했다. 악인에게 무조건적인 복수와 통쾌한 한 방을 기대하는 ‘사이다 물’의 등장이 그러하다.

 

그러니 웹툰이나 웹소설에도 조금이나마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물에게는 단결의 잣대가 내려진다. 그들의 죄가 중한지 경한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복수의 수단이 사적인지 공적인지, 그 정도가 적절한지 법의 한계를 넘어서는지 역시 고려되지 않는다. <더 글로리>에서 복수를 완성한 ‘동은’의 앞날보다 “연진아, 나 지금 되게 신나.” 대사가 더 많은 주목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이 약간이라도 개인적인 의지와 욕심을 드러내는 순간 독자들은 훈장님으로 돌변해 피드백이라는 이름의 회초리를 든다. 완전무결한 선의 화신인 주인공이 그와 반대편에 선 악인(대비되게도 여기서 순수하고 완전한 악은 불필요하다)을 처단하는 사이다 전개만이 독자의 ‘타는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영웅은 불필요하다. 우선적으로 요구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구하는 일은 힘과 정의감을 가진 한 사람에게 강제할 것이 아니다. 때론 뒤틀린 도덕심을 갖거나 옳지 않은 행동을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더 나은 내일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언젠가는 세상을 구한다. 또 그들이 구축하고 견고히 해 나가는 작품 속 세계에, 나는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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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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