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원한 전쟁 속에서 피어난 씁쓸한 환상의 미학 - 연극 '은하백만년의전쟁사'

글 입력 2023.10.2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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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의 제1의 자연법에 관련된 부분을 재밌게 읽었던 적 있다. 정확한 논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권력의 감시가 부재한 자연상태에서는 인간은 타인의 생명을 포함해 자기 자신을 보호할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범죄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강력한 공통 권력이 없다면, 사람들은 마음 편하게 집을 나설 수 없을 것이다. 당장 이웃의 음식을 빼앗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약탈은 이미 그 자신의 개체를 보호하기 위한 행위에 가깝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개개인들이 보장받는 제1의 자연법은 어떤 윤리나 도덕의 차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타인의 경계가 희미해지므로 재산도 윤리도 구분 지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희미하다는 것은 나와 타인의 존재를 인지할 수 없게 된 상태에 가깝다. 최소한의 생존마저 보장받지 못한 사회에서 신뢰는 결코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서로 약탈자로 상대하지 않을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믿기 위해 국가를 만들었다.

이처럼 '제1의 자연법'은 고통과 죽음 앞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인간 개개인은 고통과 죽음 앞에서 그만큼 무력하다는 의미가 된다. 이후 프로이트를 통해 구체화하였던 것처럼, 그 앞에서 우리는 악마적이라고밖에 말할 수밖에 없는 충동에 휩쓸려 '나'와 '너'의 경계를 잊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그러한 충동을 떠올리기 위해 먼 기억을 뒤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 그 일면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일종의 사회적 계약 체결의 중요성을 강조한 리바이어던이 떠오른 것은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왜냐면 코로나바이러스를 대처하기 위한 국가 수준의 봉쇄와 분리는 분명히 우리가 신뢰하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국가적 조치와 언론 보도, 대중들 사이에는 일종의 전쟁상태에 가까운 편집적인 불안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리바이어던에서 강조한 신뢰를 위한 기반이 되어야 할 국가권력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나는 당시 국가권력이 언제든 분리와 보호를 이유로 신뢰가 아닌 불신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느꼈다.

당시 감염자들을 보도하고 수용하는 사회 전체의 분위기는 편집적이라는 표현 외에는 묘사할 길이 없었다. 대부분 병이 그렇지만, '방역수칙'이라는 사회적 약속 아래에 감염자는 사람이 아니라 감염의 매개체가 되어야 했다. 이런 현상은 세계적이었다. 그것이 중국인이 되건, 종교집단이 되건, 알량한 한 개인이건, 그들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바이러스로 취급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적인 방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방역수칙이라는 상식적인 대처를 꼬집는 것도 아니다. 자연상태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약속으로서 존재해야 할 공통권력으로서의 국가권력이 분립과 불신의 근원지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방역수칙'이라는 국민의 의무를 경계로 시민과 바이러스가 구분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려스러운 것이다.

사실 당연한 현상이다. 모든 국가의 권한은 결국 개인의 합의에서 나온다. 만약 공통 권력으로 쉽게 규제할 수 없는 사건(재앙, 질병, 전쟁, 경제공황 등)이 터진다면, 기존과 같이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앞서 나열한 이유로 발생한 비이성적 학살과 전쟁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더욱 두려운 것은 언제든 개개인을 덮쳐올 수 있는 비극을 다른 곳에 덮어둠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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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할 <은하백년의 전쟁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코로나바이러스를 연상케 하는 '시리우스 80'을 소재로 삼았다. 시리우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몇 시간 주사를 놔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끔찍한 환상과 두통에 시달리게 된다. 국가와 국민은 점점 더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윽고 '코틀러'가 지지를 받아 당선하고, 전국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하는 감염자 축출에 나서게 된다. 이제 시민은 자신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주저 없이 당국에 신고하고, 감염자들은 총에 맞아 죽거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잃어버린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는 '너'와 보건부의 홍보원으로 일했던 '당신'이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감염자들에 대한 탄압이 덜한 적도의 남국으로 밀항하려고 한다. 그곳에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최소한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분 지어질 배신-그가 정말 배신했는지 명확하게 묘사되진 않는다-으로 이들은 오래된 극장 속에서 갇히게 된다. 그들을 위한 식량과 약이 약간 비축되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남국으로 돌아갈 일은 없었다.


작품은 주로 '당신'과 '너'가 함께 환상을 공유하거나 배우들이 무대 앞에서 나오면서 전개된다. 지면상 구분 지어질 각 캐릭터의 환상을 중심으로 기술해보려 한다. '너'는 주로 '당신'과 공유할 수 있는 환상을 공유하고, '당신'는 개인적인 일화를 소개하는 환상을 공유한다. 이러한 환상은 각 캐릭터의 특성을 드러내는 장치기도 한다. 남성배우인 '너'는 좀 더 넓은 의미의 소통을 지향한다. 그래서 그는 캐릭터가 끝없이 자신과 '당신'와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그 이야기를 다른 세대에 보내고 싶어한다. 국가의 강압적인 방역수칙에 적극적인 반감을 품은 그는 좀 더 시대적인 역사와 공동체를 지향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을 존중의 의미를 담아 '당신'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너'의 환상은 주로 시리우스를 인격체로 만드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의 환상이 그렇지만, 시리우스는 개중에서 특히 만화적 과장이 들어간 캐릭터다. 시리우스는 눈을 가리고 붉은 망토를 두른 반나체의 남성이다. 모든 인간의 아버지를 지칭하는 시리우스는 인격신 그리스도를 닮았다. 죽음과 고통에 밀접한 시리우스의 힘 '아들, 딸'들이 자신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고백할 만큼 막강하다. 그의 머리에는 돌기가 달려있는데, 시리우스에 대한 전반적인 묘사를 보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이미지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시리우스는 등장하는 내내 자신을 꼭 빼닮은 어린 아기 인형을 들고 회전목마를 돈다.


시리우스는 인간을 피, 뼈, 단백질과 같은 물질적 존재로 만들면서 비웃는다. 그는 바이러스의 등장을 통해 인간의 모든 관심이 그 자신의 몸 보존에 머무른 것을 비웃는다. 시리우스가 그런 이미지처럼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아기인형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아니라, 비극의 탄생에 가깝게 묘사된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아득한 작품의 이름이나 작품의 배경이 되는 회전목마처럼, 아기 인형은 영원한 연쇄를 상징한다. 그래서 실제로 아기 인형은 물질적 존재 이상이 되고 싶은 '당신'과 '너'에 의해 공격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너'는 환상 속에서 붉은 아기에게 자기 자신이 되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러한 환상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너'가 자기 자신을 시리우스와 같은 바이러스로 정체 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붉은 아기'가 아니라 '인간'인 자기 자신이 되길 원하는 약간의 희망이나 기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무엇이 되었건 시리우스의 연쇄로서의 붉은 아기는 죽음을 맞이하길 바란다. 그래서 작품 밖에서 그는 자신의 노트를 관객석에 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와 반대로 여성 배우인 '당신'은 '너'와 달리 개인적인 일화를 소개하는 인물이다. 그녀가 보건부의 홍보위원으로 일할 수 있는 것도 그녀의 소시민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날 어머니가 마스크를 벗고 자신에게 키스를 해주었을 때 혐오감과 사랑을 동시에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그녀에게-아마 가장 갈구해왔을- 사랑이란 죽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죽기 직전 '너'에게 키스를 부탁한다. 그녀는 좀 더 개인을 지향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근거리에 있는 것의 가치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사람과 좀 더 가까운 거리에 닿고 싶은 마음을 섞어 '너'라고 부른다.


그녀의 환상은 직관적이고, 작품의 지향점과 맞닿는다. 그래서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 풀리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전개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세계관을 드러낸다. 소시민에 가까운 캐릭터는 '당신'은 사람들을 닮았기 때문에 호소력 있다. 작품은 그래서 그녀가 그에게 키스하는 것으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이처럼 이 작품이 겨냥하는 것은 단순한 '파시즘' 문제가 아니다. 작품이 구체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인간을 단순한 자기보존의 물질로 추락시키는 국가권력에 대한 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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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작품의 틀을 넘어 이것이 연극이라는 점을 지속해서 상기시킨다는 점에 있다. 이 작품은 현실과 환상, 연극과 현실무대를 계속해서 구분한다. 이러한 확실한 구분을 통해 관객들은 연극을 좀 더 연극으로 바라본 동시에, 그 연극이 존재하게 된 현실의 맥락을 되짚어 보게 된다. 작품의 주인공들이 환상과 현실을 헤매는 것처럼, 반대로 그러한 연출을 통해 관객들도 무대와 현실이 얼마나 링크되었는지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겨냥하는 묘사가 아주 재미있었다. 시리우스는 인간의 정신을 단순한 물질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원초적인 불안을 상징한다. 홀로코스트를 일으키는 코틀러도,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걸을 수 있을 만큼 늙은 서로 시리우스의 강력한 힘에 무릎 꿇은 사람들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은 정말 다양각색한 형태로 어느 시대건 존재해왔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도 많은 사람이 서로 자기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두지 않거나 집단으로 죽인다. 회전목마나 꺼지지 않는 시리우스의 비디오처럼 끝없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 반복되어왔고, 현실을 닮은 연극 속에서 그것은 '백만 년' 너머의 '은하 전쟁사'가 된 것이다.

 

글쎄, 그 연쇄를 끊을 고리는 영 보이지 않지만 '너'처럼 '당신'과 적도의 남국으로 탈출하는 상상은 해볼 수 있겠다. 공허해 보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낡은 극장에서 비로소 너와 당신이 서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술이라는 달콤한 환상 속에서는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밥도 못 먹여주는 예술이 가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으로 극단은 이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강조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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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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