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리뷰할 <은하백년의 전쟁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코로나바이러스를 연상케 하는 '시리우스 80'을 소재로 삼았다. 시리우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몇 시간 주사를 놔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끔찍한 환상과 두통에 시달리게 된다. 국가와 국민은 점점 더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윽고 '코틀러'가 지지를 받아 당선하고, 전국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하는 감염자 축출에 나서게 된다. 이제 시민은 자신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주저 없이 당국에 신고하고, 감염자들은 총에 맞아 죽거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잃어버린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는 '너'와 보건부의 홍보원으로 일했던 '당신'이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감염자들에 대한 탄압이 덜한 적도의 남국으로 밀항하려고 한다. 그곳에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최소한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분 지어질 배신-그가 정말 배신했는지 명확하게 묘사되진 않는다-으로 이들은 오래된 극장 속에서 갇히게 된다. 그들을 위한 식량과 약이 약간 비축되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남국으로 돌아갈 일은 없었다.
작품은 주로 '당신'과 '너'가 함께 환상을 공유하거나 배우들이 무대 앞에서 나오면서 전개된다. 지면상 구분 지어질 각 캐릭터의 환상을 중심으로 기술해보려 한다. '너'는 주로 '당신'과 공유할 수 있는 환상을 공유하고, '당신'는 개인적인 일화를 소개하는 환상을 공유한다. 이러한 환상은 각 캐릭터의 특성을 드러내는 장치기도 한다. 남성배우인 '너'는 좀 더 넓은 의미의 소통을 지향한다. 그래서 그는 캐릭터가 끝없이 자신과 '당신'와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그 이야기를 다른 세대에 보내고 싶어한다. 국가의 강압적인 방역수칙에 적극적인 반감을 품은 그는 좀 더 시대적인 역사와 공동체를 지향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을 존중의 의미를 담아 '당신'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너'의 환상은 주로 시리우스를 인격체로 만드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의 환상이 그렇지만, 시리우스는 개중에서 특히 만화적 과장이 들어간 캐릭터다. 시리우스는 눈을 가리고 붉은 망토를 두른 반나체의 남성이다. 모든 인간의 아버지를 지칭하는 시리우스는 인격신 그리스도를 닮았다. 죽음과 고통에 밀접한 시리우스의 힘 '아들, 딸'들이 자신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고백할 만큼 막강하다. 그의 머리에는 돌기가 달려있는데, 시리우스에 대한 전반적인 묘사를 보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이미지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시리우스는 등장하는 내내 자신을 꼭 빼닮은 어린 아기 인형을 들고 회전목마를 돈다.
시리우스는 인간을 피, 뼈, 단백질과 같은 물질적 존재로 만들면서 비웃는다. 그는 바이러스의 등장을 통해 인간의 모든 관심이 그 자신의 몸 보존에 머무른 것을 비웃는다. 시리우스가 그런 이미지처럼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아기인형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아니라, 비극의 탄생에 가깝게 묘사된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아득한 작품의 이름이나 작품의 배경이 되는 회전목마처럼, 아기 인형은 영원한 연쇄를 상징한다. 그래서 실제로 아기 인형은 물질적 존재 이상이 되고 싶은 '당신'과 '너'에 의해 공격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너'는 환상 속에서 붉은 아기에게 자기 자신이 되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러한 환상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너'가 자기 자신을 시리우스와 같은 바이러스로 정체 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붉은 아기'가 아니라 '인간'인 자기 자신이 되길 원하는 약간의 희망이나 기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무엇이 되었건 시리우스의 연쇄로서의 붉은 아기는 죽음을 맞이하길 바란다. 그래서 작품 밖에서 그는 자신의 노트를 관객석에 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와 반대로 여성 배우인 '당신'은 '너'와 달리 개인적인 일화를 소개하는 인물이다. 그녀가 보건부의 홍보위원으로 일할 수 있는 것도 그녀의 소시민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날 어머니가 마스크를 벗고 자신에게 키스를 해주었을 때 혐오감과 사랑을 동시에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그녀에게-아마 가장 갈구해왔을- 사랑이란 죽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죽기 직전 '너'에게 키스를 부탁한다. 그녀는 좀 더 개인을 지향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근거리에 있는 것의 가치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사람과 좀 더 가까운 거리에 닿고 싶은 마음을 섞어 '너'라고 부른다.
그녀의 환상은 직관적이고, 작품의 지향점과 맞닿는다. 그래서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 풀리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전개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세계관을 드러낸다. 소시민에 가까운 캐릭터는 '당신'은 사람들을 닮았기 때문에 호소력 있다. 작품은 그래서 그녀가 그에게 키스하는 것으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이처럼 이 작품이 겨냥하는 것은 단순한 '파시즘' 문제가 아니다. 작품이 구체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인간을 단순한 자기보존의 물질로 추락시키는 국가권력에 대한 우려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작품의 틀을 넘어 이것이 연극이라는 점을 지속해서 상기시킨다는 점에 있다. 이 작품은 현실과 환상, 연극과 현실무대를 계속해서 구분한다. 이러한 확실한 구분을 통해 관객들은 연극을 좀 더 연극으로 바라본 동시에, 그 연극이 존재하게 된 현실의 맥락을 되짚어 보게 된다. 작품의 주인공들이 환상과 현실을 헤매는 것처럼, 반대로 그러한 연출을 통해 관객들도 무대와 현실이 얼마나 링크되었는지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겨냥하는 묘사가 아주 재미있었다. 시리우스는 인간의 정신을 단순한 물질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원초적인 불안을 상징한다. 홀로코스트를 일으키는 코틀러도,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걸을 수 있을 만큼 늙은 서로 시리우스의 강력한 힘에 무릎 꿇은 사람들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은 정말 다양각색한 형태로 어느 시대건 존재해왔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도 많은 사람이 서로 자기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두지 않거나 집단으로 죽인다. 회전목마나 꺼지지 않는 시리우스의 비디오처럼 끝없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 반복되어왔고, 현실을 닮은 연극 속에서 그것은 '백만 년' 너머의 '은하 전쟁사'가 된 것이다.
글쎄, 그 연쇄를 끊을 고리는 영 보이지 않지만 '너'처럼 '당신'과 적도의 남국으로 탈출하는 상상은 해볼 수 있겠다. 공허해 보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낡은 극장에서 비로소 너와 당신이 서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술이라는 달콤한 환상 속에서는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밥도 못 먹여주는 예술이 가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으로 극단은 이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강조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