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 속 무감각함이라는 무형의 폭력

글 입력 2023.10.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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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몬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기후, 몬순이다.

 

몬순은 단순히 부는 바람이 아닌 1년 주기로 풍향이 바뀌며 일어나는 큰 바람이기에 몬순이 시작되면 대기가 불안정해진다. 세찬 비와 폭풍을 맞으며 자신의 자리를 꿋꿋이 지켜내는 사람들을 타트인. 나에게 몬순은 무엇일까. 어둠이 내리기 전 극장 안에 있는 나에게 몬순이란 세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기후였다. 내가 경험하지 않을 것이기에 궁금하지도 않는 그저 그런 용어였다.

 

연극이 시작하자 초반부 극 진행과 어울리지 않는 야생동물 다큐멘터리가 한편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의미 없는 연출은 세상에 없다는데 그 의미가 다소 궁금했다. 초반부에 연출된 야생동물들의 생태계 영상은 극이 끝난 후에야 나만의 의미를 만들 수 있었다.

 

몬순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 연극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단어는 “전쟁 이야기”다. 전쟁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한 욕망으로 한 국가를 초토화시키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싶다. 욕망으로 움직이는 가해국에 의해 일상생활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피해 국가 국민들이다.

 

그들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 정당한 명분도, 이유도 없다. 이는 마치 사냥과 같다. 배고픔 이라는 욕망을 느낀 사자는 먹이를 찾는다. 물을 마시러 온 가젤은 평소와 같이 물을 마신다. 가젤은 죄가 없지만 사자의 배를 채울 수 있기에 사냥 당한다. 몬순이 막을 내리고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면 넘어갔을 영상이 극 주제 “전쟁”을 가장 직관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사냥 당한 가젤이 나와 다른 타자라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초반부로 돌아가 끊임없이 반복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유없이 가젤이 되었다면, 우리도 이유 없는 가젤이 될지 모른다. 전쟁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 라는 말이 아니다. 가젤을 타자화 시킨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또 다른 사자가 되는 일이다. 여기서의 사자는 “나와 다름에서 기인되는 무감각함”이다. 

 

연극이 끝나고 작가는 나에게 여러 국가를 초월한 연대의 메시지 전달하였다. 문은 버터 스프를 좋아하지 않는 타트인이다. 그가 타트인이기에 리오는 버터스프를 떠올렸고 굴의 담임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아는 타트인은 버터스프를 좋아하는데 그렇지 않은 개인들을 우리는 무엇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코우쉬 코지 또한 타트인이냐는 질문은 수없이 들었으나, 너가 누구냐고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세명의 사람을 보는 외부의 시선은 “전쟁 국가 출신 타트인”이다. 

 

다름은 그 자체로 그들의 존재론적 취약성이다. 문과 코우쉬코지가 인상적인 캐릭터로 다가왔던 건 다름으로 규정되는 시선에 저항하고 있어서다. 타트인이자 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문은 자신이 겪은 폭력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나아가고, 코우쉬 코지는 자신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반평시동”을 만든다. 자신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다. 

 

홀트는 괴로워하는 문에게 “모자는 모자고, 문은 문이야” 라는 말을 전한다. 비가 올 때 모자는 모자라는 이유로 이미 존재의 이유를 다한다. 우리와 다른 그들 또한 그들 자체로 존재의 이유를 다하는데 무감각은 이를 깨닫지 못하게 한다. 내가 몬순을 보며 무감각함을 떠올린 계기는 바로 “비인간화”였다. 나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방인이라 규정한다. 여기서 비인간화는 내가 아는 인간의 개념에는 도달하지 못한 이방인은 인간이 가진 마땅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존재에 대한 무감각함이 그 첫 시작이며 가장 극단적으로는 인간이 아니기에 존중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몬순이 “비인간화”의 극단적인 사례를 매개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몬순은 역사적으로 수없이 발생한 전쟁을 통해 비인간화의 개념을 암시한다. 전쟁은 겉은 인간일지라도 인격적 가치를 느끼지 않는 비인간화가 선행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폭력, 비인간화와 무감각함



각기 다른 인물들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둘러싼 얇은 경계가 아이러니하게도 비인간화다. 비인간화의 가장 정적인 방식은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된 무감각함이다. 전쟁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아래에서 전쟁의 참상을 맞이하는 것은 타자이기에 우리의 출발점은 위다. 이삭은 타트에서 발자국을 따라 군인들의 은신처 사진을 찍었음에 감격한다. 

 

페이스톡으로 본 이삭의 눈빛은 그야말로 짜릿해 보였고 전쟁은 흥미있는 소재였다. 그러나 그와 다른 시공간 속 홀트는 여전히 앉아있었다. 누군가에게 전쟁은 흥미가 채워지면 떠날 수 있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겐 그렇지 못한 것이다. 몬순은 비를 막아주는 우산이자 동시에 누군가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다. 작품 속 전쟁상황이 게임장면처럼 연출된 것이 극적인 효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리얼리즘에 가깝다. 

 

우리가 아닌 타자가 겪는 고통에 무감각함을 느끼는 동시에 전쟁이라는 자극적인 상황에서는 흥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감각하기에 전쟁은 게임처럼 더 짜릿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사회에 몬순이 던지는 내용은 꽤 묵직하다. 몬순은 현대 사회가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것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리오가 바라 보고 있는 것은 문이지만 리오의 대사는 굴에게 전달된다. 리오의 각본 속에서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영상은 새벽과 코우쉬 코지다. 그들은 다른 시공간 속 다른 국가에 살아가지만 그들의 삶을 연대하고 있다. 마지막 대칭적 구조로 모든 이야기 속 캐릭터들이 서로 바라보며 서 있는 장면은 현대 사회의 무감각함에서 벗어난 연대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서 제시한 비인간화가 유형의 폭력으로 분출되어 누군가를 해할 때에 분노하고 격분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사하는 무감각함이라는 무형의 폭력은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 산책하는 유리 괴물의 파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상처를 낸다. 유리 괴물의 얼굴이 자기 자신이었던 것처럼 몬순은 무감각함이 만들어 내는 괴물의 의미를 현대 사회구성원들에게 시사한다.

 

 

[배윤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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