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견고한 두 세계의 장벽을 허물고

차가운 세상 속에서 우리가 되는 방법
글 입력 2023.10.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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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시반의 세 번째 정규 앨범 ‘Something to Give Each Other’가 발매되기 며칠 전, 친한 대학 후배를 만나 밥을 같이 먹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트로이 시반의 컴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는 갑자기 뭔가 기억났다는 듯이 웃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우리 처음에 트로이 시반 때문에 친해진 거 기억나?”

 

맞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작년 봄 사진 동아리에서 여의도 한강공원으로 출사를 나갔던 날, 우리는 처음 만났다. 어색함을 무릅쓰고 한 마디 두 마디 나누다 보니 둘 다 트로이 시반의 팬인 걸 알게 되었고, 그렇게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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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여름에 처음으로 단둘이 만나 영화를 본 뒤로 우리는 비공식 영화메이트가 되었다. 그와 함께 영화를 보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동안 일 년에 두세 번 갈까 말까 했던 한 독립영화관의 단골손님이 되었고, 주머니 속에 파묻혀 있던 영화관 쿠폰의 빈칸은 빠르게 채워져 갔다. 계획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그와 당일치기 바다 여행을 떠나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발을 적시기도 하고, 겨울방학에는 새해를 맞이하여 강원도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고작 여섯 달 만에 일어났다. 평소 시간을 두고 서서히 스며드는 식으로 사람과 관계를 맺는 편인데, 우리의 관계에는 대단한 진전이 있었다. 전공부터 시작해서 나이, 학번, 시간표, 관심 분야, 진로, 성격, 사는 지역, 살아온 환경까지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너무도 달랐지만, 음악과 영화 두 가지면 그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금세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화상으로 수업을 하다가 갑자기 내 뒤로 보이는 라디오헤드의 음반을 가리키며 “I’m a big fan of it.”이라고 말씀하시던 외국인 교수님과 잡지 인터뷰에서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소개한 배우,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속상했던 인디 밴드에 대해 아주 긴 글을 적어놓은 블로거를 몇 년이 지나도록 기억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심지어는 얼굴과 이름조차 알지 못해도 그 작디작은 연결고리 하나만으로 나는 상대방과 소중한 어떤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기쁨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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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모든 관계가 그랬다. 아흔아홉 가지의 다른 점이 있어도 단 하나의 공통점으로 우리는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었고, 굳게 봉인된 마음의 자물쇠를 풀 열쇠는 대개 정치적 견해, 종교적 신념, 철학적 가치관처럼 삶을 구성하는 무겁고 진중한 요소보다는 영화나 드라마, 연극, 문학 같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사소한 것들에 있었다. 짧은 시 한 편, 구십 분짜리 영화 한 편이 도대체 무슨 힘이 있길래 시간이 지나면 이름조차 잊게 될 수도 있었던 누군가를 소중한 인연으로 붙잡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위력에 나는 항상 놀라곤 했다.

 

처음엔 ‘좋아하는 것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사이’ 정도에 불과했던 관계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깊어지는 모습을 볼 때, 어쩌면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던 누군가가 내 안에서 쑥쑥 자라나 ‘더 알고 싶은 소중한 친구’가 되어 갈 때, 우리의 취향이 같다는 사실보다 내 곁에 있는 그의 존재가 더욱 중요해지는 날이 올 때, 나는 거대한 장벽을 허물고 인간과 인간이라는 두 견고한 세계를 연결하는 문화예술의 힘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님을 느낀다.

 

누군가는 이를 순진한 환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라서 이렇게 단순한 이유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 위에서 밀씨를, 또 딱 하나 떨어트리는 거야.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니들이 지금 이곳, 지구상에 그 하고많은 나라 중에서도 대한민국, 중에서도 서울, 서울 안에서도 세연고등학교, 그중에서도 2학년, 그걸로도 모자라서 5반에서 만난 거다. 지금 니들 앞에, 옆에 있는 친구들도 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또 나하고도 그렇게 만난 거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인연이라는 게 좀 징글징글하지?”

 

 

이 징글징글한 인연을, 우연이 아닌 운명의 신화를 믿기에 나는 오늘도 여기에 이렇게 글을 쓴다. 무의미한 갈등과 불필요한 싸움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이 지구별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하기 위해, 한 번이라도 더 손을 맞잡기 위해 책을 읽고,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고, 이곳에 나의 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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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아픈 말들로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문화예술이 힘을 잃지 않고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서로를 연결하며 수많은 ‘우리’를 만들어 나갈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계속되는 한 나도 펜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내가 쓰는 글들이 대단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행여나 티끌만큼의 변화라도 일으킬지 모르니 오늘도 나는 이 글을 투명한 유리병 속에 담아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띄워 보낸다. 어디론가 흘러가 운명처럼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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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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