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눈을 감고, 5분

스스로 생각하기 참 어려운 세상
글 입력 2023.10.0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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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곱씹는 사람


 

아트인사이트의 28기 에디터 지원서에서 나는 자신을 ‘쉽게 감탄하고 오래 곱씹는 감상자’로 소개했었다. 반은 솔직하나 반은 거짓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에 쉽게 감탄하고 또 그것을 연거푸 상기하지만, 그 행위가 ‘곱씹기’인지는 스스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쓰다 보면 나도 언젠가 소가 여물을 곱씹듯 연거푸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람이 되겠지, 싶은 마음에 적은 자기소개였다. 모든 자기소개는 절반의 장점과 절반의 지향점을 포함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언제라도 다시 내가 ‘쉽게 감탄하고 오래 곱씹는 감상자’라고 소개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 쓰기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참 쉽다. 누군가에게 내가 원하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 또한 쉽다. 보이고 싶은 것만 골라 보여주고, 또 보여주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내가 평생 해온 일이라 이젠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이 세상에는 눈을 감고도 보이는 빤한 것들이 아주, 아주 많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보여주고 또 쉽게 감탄하는 이유는 사실, 그 뻔뻔함을 지적하는 일이 의외로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시각에 크게 의존하는 동물이고, 우리가 아는 단어들은 ‘지금 네 눈앞에 보이는 게 뭐야?’라는 질문의 대답이다. 나는 눈동자에 비치는 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사람이 잘 쓰는 사람이요, 더욱 세세히 묘사하는 사람이 곧 꼼꼼한 사람이라 배워왔다. 어릴 적부터 배워온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감춰져 있거나 없는 것을 찾아내어 찌르는 법을 배운 적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늘 ‘비판적 사고’를 하라고 교육받지만, 그 ‘비판적 사고’를 실생활에 적용하는 건 왜인지 환영받지 못한다. 하긴, 아무도 허점을 찔리고 싶진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비판은 말랑한 우리의 마음에 너무나 날카롭고, 보통 사회는 ‘싫은 소리,’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싫어하니까.

 

그래서 나는 대체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한다. 내가 쓴 글에는 확대경으로 본 것처럼 세세한 부분도 있고, 내 눈에 비친 모습만을 그대로 묘사해 둔 부분도 있다. 내가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종종 빠지곤 하는데도, 이렇게 쓰면 사람들은 대개 ‘글이 잘 읽힌다’라고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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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속에서도 기분이 언짢을 때, 뭔가 어색함을 느꼈다.

 

 

 

느린 걸음마


 

글쓰기가 싫었다. 내 마음에 드는 글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자꾸 내 글에 무언가 꼭 필요한 알맹이가 없는 것만 같았다. 내가 인정하지 못하니 남의 칭찬도 곧이듣지 못했다. 나는 꽤 오래 ‘글’다운 글을 쓰지 않았고, 기껏해야 본 영화의 감상평을 몇 자 적어서 블로그에 게시하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쓰다 만 글이 많아 임시저장 글의 개수는 늘 두 자릿수를 넘었다.

 

그렇게 2023년 새해가 밝은 어느 날, 컴퓨터 용량이 부족해 이것저것 정리하던 중에 오래된 폴더를 발견했다. 드문드문 썼던 일기와 짧은 이야기들이었다. ‘글을 좀 잘 쓰고 싶다’라고만 한가득 쓰여 있던 메모장을 봤다. 한동안 들어가지 않았던 블로그에 들어가 임시저장 글을 쭉 읽어봤다. 다시 봐도 그때의 내가 느꼈던 흥분과 좌절, 즐거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날 나는 ‘더 많이 기록하기’를 새해 목표로 정했고, 아트인사이트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더 많이 기록하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생각해서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지. 근사한 목표를 세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무언갈 기록하려니 작품에 관한 감상이 가장 쉬운 접근이었다. 난 늘 예술을 좋아했고, 그동안 조금씩 써둔 글들도 대부분 감상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감상을 쓰는 건 대단한 사고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약간의 메모를 쓰는 동안의 나는 자유로웠다. 현실에서 출발해 허상으로 끝나는 ‘예술’을 마주할 때면 아무런 의심 없이 감탄하기만 해도, 엉뚱한 소리로 딴지를 걸거나 빈 곳을 쿡쿡 찔러봐도 괜찮았다. 누가 나에게 강제하는 것이 아니니 중간에 맥없이 그만두어도 괜찮았다. 나에게 감상은, 예술은 마음 편히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서툴게 쓴 첫 글과 함께 지원서가 통과되고, 아트인사이트의 에디터가 된 내 꿈은 꽤 컸다. 순간의 감상뿐만이 아닌 다른 걸 담아내고 싶었다. 내가 느낀 감정, 그 감정의 시발점, 감독의 의도를 추측하거나 다른 감상자의 반응을 예상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감상문을 제대로 쓰기는 어려웠다. 잔뜩 부푼 꿈으로 안고 다시 마주한 ‘예술’이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냥 허구라고 생각했던 작품들은 사실 잠깐 허상 속을 날고선 끝내 현실로 착륙하는 비행기에 가까웠다. 내가 홀로 감상을 쓰더라도 작품들은 나만의 것이 아니고, 따라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글을 쓸 때 타인의 의견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이 작품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읽으면 그 뒤의 배경이 궁금했다. 단순한 의견의 조각을 넘어 타인의 경험과 가치관을 찾아 각양각색의 글들을 읽다 보면 내 글을 시작하기도 쉬워졌고, 글을 쓴다는 행위에 재미를 붙일 수도 있어 즐거웠다. 남의 의견이 그토록 궁금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아마 동료 에디터님들의 글을 그때 가장 많이 읽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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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무언가를 궁금해한다는 것이 정말 대단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헤맴


 

행복한 글쓰기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학교에 돌아와 학업과 에디터 활동을 병행하게 되었다. 수업은 흥미로웠지만 재미있진 않았다.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하기 위한 글들은 주로 내가 즐거웠던 경험과 보고 들었던 문화예술에 관한 글들이었으나, 학생으로서 쓰는 글들은 당연히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었다. 그 사실이 괴로워서일까, 나는 다시 글쓰기에 흥미를 잃었다.

 

과제를 위해 쓰는 글엔 딱히 내 의견이 필요하지 않다. 여러 학자가 이 주제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학자 A와 학자 B가 주장하는 것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이들의 세대를 지나 현대의 우리가 이러한 이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그렇게 중요한 것들을 쓰다 보니 어느새 내 글은 인용 기호로 가득해졌다.

 

다시 돌아와 그간 내가 기고한 글들과, 새 글을 기고하기 위해 쓰던 글들을 바라봤다. 오로지 나만의 생각으로 쓰인 부분이 무엇인가 가만히 살폈다. 몇 줄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서글퍼졌다.

 

남들의 의견에 물드는 것은 흔한 일이다. 유튜브 댓글 창을 볼 때면 더더욱 그렇다. 인터넷 안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한 말을 단어만 바꾸어 그대로 반복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미를 비틀어 빈정대기 일쑤다. 그렇게 만들어진 ‘여론’은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그 여론이 어느새 내 의견이 된다.

 

나는 온갖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는 학생임과 동시에 무신경하고 두루뭉술한 생각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은 글쓴이가 되었다. 나는 정말로 ‘내 사고’를 통해 눈앞을 바라보고 있나? 확신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양쪽의 글을 모두 잘 써낼 수 있을지 몰라 한동안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사실은 지금도 받는 중이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으려 동동거렸다. 윈도 창을 분리해 보기도 했고, 아예 쓰는 날을 달리 해보기도, 한 시간 간격으로 학과 공부와 일기나 기고용 글 작성을 번갈아 해보기도 했다. 잘되지 않았다. 기고가 자주 밀렸고, 수업을 따라잡거나 시간 내에 과제를 제출하기도 조금씩 어려워졌다. 제시된 기한을 지키지 못했다는 압박감에 집중력은 자꾸만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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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고 싶을 때가 있다고 믿는다.

 

 

 

눈을 감고, 5분


 

그렇게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한 날, ‘딱 5분만 쉬자!’라는 마음으로 타이머를 맞췄다. 노트북을 닫고, 핸드폰을 멀리 던져둔 채 딱 5분간 눈을 감아봤다. 바로 잠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감으니, 눈을 벌겋게 뜨고 허덕이던 때보다 정신이 더 또렷했다.

 

무언갈 써내려 반복적으로 노트북-스마트폰을 오가던 것의 바보 같음이 그제야 보였다. 계속해서 무언가 들어오고 있으니, 뇌가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분이 끝난 후, 오랜만에 에디터 지원서를 열어보았다.

   

 

저는 스스로와 토론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때부터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5분간 눈을 감는다. 이를테면 ‘미디어 디톡스’인 셈이다. 화면을 이리저리 오가던 눈이 얌전해지면 온갖 생각에 파묻혀 있는 ‘내’가 조금씩 보인다. 바쁘면 깜빡하고 넘기기도, 시간이 더 필요할 땐 눈을 5분, 10분씩 더 감아보기도 했다. 내 눈은 아직도 정신없이 움직이고 내 사고는 얌전할 틈이 없지만, 눈을 감고 있을 때만큼은 차분하게 생각하려 노력한다.

 

나는 곱씹는 사람이, 줏대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보이고 들리는 것들을 꼭꼭 씹어 삼켜 나만의 생각을 만들고, 더 나아가 나의 ‘시각’을 써내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쏟아지는 정보들을 제대로 소화할 필요가 있다. 에디터 지원서에 적어냈던 목표와 지금의 내 목표는 다르지 않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만의 ‘아트 인사이트’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내가 눈을 감는 5분은 정말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모인다면 언젠가 나도 또렷한 눈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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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타이머가 울리기 전에 눈을 떠버리는 순간이 있다. 점점 나아지겠지?

 

 

만약 당신도 수많은 입력에 혼란스럽다면, 타이머를 맞추고 딱 5분만 눈을 감아보길 바란다. 눈 깜빡할 사이, 한층 안정된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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