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운 너머의 사람이 하는 말 - 3분 진료 공장의 세계

글 입력 2023.10.0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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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대학병원에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다. 안 그래도 무거운 마음으로 가는 곳에서 무뚝뚝한 의사나 복잡한 진료 과정과 마주치면 나에게만 그런 게 아님을 알면서도 병원이 내게 악의를 품었다는 느낌에 휩싸이곤 한다. 환자와 의사 간에 정보량의 격차가 큰 상태에서 때론 목숨까지 오가는 큰 사안을 다루니, 환자는 병원에서 절대적인 약자가 될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의사와 병원은 표정이 없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사실 의사가 쓴 책, 그것도 의료시스템에 관해 쓴 책이라고 했을 때 나도 모르게 색안경을 꼈던 것 같다. 하지만 의사를 ‘의사 집단’으로만 여길 때, 환자가 좀처럼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의사도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이상 진료 방식이나 처방되는 약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한다. 하루에도 각양각색의 환자 수십 명을 상대하며, 무엇보다 가운을 벗으면 한 명의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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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진료 공장의 세계』는 의사가 가운을 벗고 차분히 써 내려간 의료현장과 의사로서의 자기 자신의 이야기다. 제목처럼 하나의 ‘세계’를 다루는 책이지만, 나처럼 색안경을 낀 독자를 위해 저자는 머리말에서 원두커피와 믹스커피를 예로 들며 이 책이 개인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원두 대부분은 믹스커피에 사용되는데, 원두커피가 익숙하고 당연한 사람들은 이 사실에 놀란다는 내용이다. 즉 ‘원두커피의 세계’의 사람들은 모르는, ‘믹스커피의 세계’가 있다는 것.


누구나 자기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 이 책 역시 의사가 의료시스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의사 전체나 의료 시스템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믹스커피의 세계'를 모른 채 쓴 '원두커피의 세계'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의사는 흔히 ‘의사 집단’으로 여겨지는 존재임을 고려하면 꼭 필요한 도입부였다. 덕분에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책을 읽어갈 수 있었다.


1부는 대학병원 의사의 입장에서 들려주는 이른바 ‘공장식 3분 진료’에 관한 이야기다. 지인 중에 의사가 있다고 해도 묻지 않으면 듣기 어려울 의사의 일상이 상세하게 펼쳐진다.


대학병원에서 평균적으로 의사 한 명이 한 세션(3시간 가량)에 보는 환자 수가 50명에 육박한다는 것, 진료 시간은 3분뿐이지만 실제 그 진료를 하기 위해 ‘예습’하는 시간이 따로 있다는 것은 책을 보며 처음 알았다. 특히 의사도 10분 이상 환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하는 진료를 원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현재 많은 사람이 불평하는 ‘고비용 검사 남발’은 밀도 있는 진료가 어려운 상황에서 혹시 모를 위험 요소에 대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일 뿐, 의사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병원에서 환자들은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진 물건처럼 느껴진다고들 한다. 책을 읽다 보면 의사가 이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는 사람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벨트 위에 올라가 있는 존재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불만이 터져 나오는 ‘3분 진료’는 의사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고질적인 시스템의 문제인 셈이다.


이 시스템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시스템이라는 것이 의사 한두 명의 결심으로 바꿀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단점을 상쇄하는 장점이 뚜렷하다. 바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의료비와 효율적인 처방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시스템은 나름대로 여러 단점을 보완해가며 오랫동안 정립해온 결과물이다. 단점만 보는 게 더 익숙한 우리로서는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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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시스템은 수많은 요소가 서로 맞물리고 상호작용하며 돌아간다. 그러므로 의사와 환자 모두가 3분 진료에 문제점을 느끼고 있다 하더라도 관련해 더 깊게 들어가자면 의료수가, 의사 정원, 의료보험비 등 정책적, 제도적인 부분에서 첨예한 대립이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런 부분에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지는 않는다. 대신, 지금의 시스템을 당장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없다면, 그 안에서 환자와 의사의 최선이 무엇인지 살핀다. 이어지는 2부의 내용이다.


병원 옮기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 것, 그럼에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병원을 옮기게 된다면 무엇을 준비하면 좋은지 소견서와 조직검사서 등에 관해 알려준다. 종양표지자 수치보다 매일매일 자신의 상태를 기록하는 게 몸의 변화를 보기에 더 적절하다는 것, 대학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부작용에 관한 처치까지 모두 대학병원에서 받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저자는 종양외과 의사로서 그동안 쌓은 경험을 아낌없이 나눈다.


그 일화 속에서 환자에게만 의사가 유일한 존재가 아님을, 수많은 환자 중 어떤 환자는 오랫동안 의사의 기억에 남아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걸 확인한다. 죽음과 삶의 교차로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배우는 것은 환자만이 아니다. 의사도 그 과정에 함께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조금 더 나은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해보기도 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내가 지금껏 만나 온 여러 의사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좋은 기억부터 떠오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사람도 있다. 의사도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저마다의 얼굴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이 책을 읽고 나만의 뚜렷한 생각이나 입장이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 관련된 소식을 뉴스에서 접하거나 병원에서 소통이 어려울 때면 이 책을 떠올릴 것 같다. 무언가를 알게 될수록 회색지대가 넓어지고, 내 생각을 믿기가 어려워진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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