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슴 신은 꽃을 피우는 신이다 [영화]

<모노노케 히메>에서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다
글 입력 2023.09.2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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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브리의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악의 없는 세상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때문이다.

 

그 중 <모노노케 히메>는 의미가 남다르다. 보통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지브리의 작품이 동화적인 서사로 주목받은 것에 비해, <모노노케 히메>는 캐릭터 각자의 신념과 욕망이 뚜렷하게 부딪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잔혹하고 추악한 인간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도 독보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모노노케 히메>는 한마을에 사는 청년 '아시타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우연히 죽음 신의 저주를 받게 된 그는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산을 지키는 신과 산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싸움에 끼어들게 되고, ‘원령공주’라는 늑대의 딸을 만나게 된다.

 

오늘은 이 매력적인 모험담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서사적 특징을 소개해볼까 한다. 아래로는 <모노노케 히메>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영화를 한 번도 감상해 보지 않았다면 영화를 본 후에 글을 읽어주길 바란다.

   

 


자연과 인간의 중재자, 아시타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다른 작품에서도 꾸준히 생태주의적 면모를 비춰온 지브리는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같은 태도를 취한다. 자연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자들에게 그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그 방식은 폭력이 아닌 화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제작자의 의도를 투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로 작품에 자리한다. 그는 원령공주와 사슴 신으로 대변되는 자연과, 에보시와 마을 사람들로 대변되는 인간의 중간 단계의 존재다.

 

그는 이익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지 않으며, 사슴 신이 그를 보호하지만, 결국은 인간이다. 무엇보다 어느 한 쪽의 욕망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의 옳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관객에게 어느 한 쪽의 가치에 쏠리지 않는 관람 방식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그는 에보시를 죽이기 위해 마을에 침입한 원령공주를 무력으로 막지만 이는 에보시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원령공주를 죽일 작정이던 에보시와 마을 사람들을 가로막는다. 에보시의 마을이 동물을 학살하는 것은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친 마을 사람은 치료해서 마을까지 데려다준다. 서로를 적이 아니면 아군으로만 분류하던 이들에게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새로운 영역의 가능성으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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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タジオジブリ

 

 

 

선과 악, 흑백 논리는 통하지 않는 지브리의 세계


 

지브리의 세계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각자의 등장인물이 가지고 있는 욕망에 있다. 지브리는 선과 악,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누는 손쉬운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각 캐릭터는 서로 상충하는 욕망으로 움직이는 것뿐이지 무조건 나쁜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지브리의 세계, 이러한 특징은 영화 속 인물에게 깊은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영화 초반, 아시타카는 철을 만들며 자연과 신을 몰아내고 있는 에보시의 마을에 도착한다. 영화가 묘사하는 에보시는 신을 몰아내고 나무와 땅을 차지하려고 하며,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강력한 욕망의 캐릭터다.

 

영화 시작부터 아시타카와 함께하며 자연과의 상생이 최고 가치라고 굳건히 생각하기 쉬운 관람객의 입장에서 에보시는 ‘나쁜’ 캐릭터다. 동물을 죽이고 산을 차지하니 말이다.

 

하지만 모순적되게도 에보시는 ‘좋은’ 군주다. 그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마을의 여자들에게 일거리를 주었고, 나병 환자를 거둬 함께 생활한다. 다른 지방의 군대로부터 제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더 좋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

 

실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어떤가? 일상에서 만나는 타인들은, 에보시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하나의 가치로 평가내릴 수 없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이유가 있는 욕망을 지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브리는 캐릭터에게 상충하는 욕망을 쥐여주며 흥미로운 갈등 구조를 만들지만, 그들의 욕망은 각자의 타당성과 이상을 가진 것이기에 단순하지 않고 탁월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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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タジオジブリ

 

 

 

사슴신은 꽃을 피우는 신이다


 

욕심이 앞선 인간들은 사슴 신의 목을 자른다. 분노한 신의 몸은 땅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고, 자신에게 닿는 모든 것의 생명을 앗아간다.

 

아시타카와 산(원령공주)은 잘린 목을 돌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필자는 사슴 신의 목이 잘린 순간, 이 영화 속에서 자연이 다시 힘을 되찾을 수 없음을 확신하고 포기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생명의 신이 죽은 것을 목격하고도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 둘의 모습은 놀라울 뿐이었다.

 

보통 우리는 오랜 시간 힘겹게 쌓아둔 것이 무너지는 순간, 그 이후의 것을 상상할 수 없게 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사슴 신의 몸이 마을을 덮치며 그 오랜 시간 손수 지어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볼 때, 한 마을 주민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철소가 무너지면 모든 게 끝장이야.”

 

하지만 곧이어 또 다른 마을의 주민이 다그치듯 답한다.

 

“살아 있으면 뭐든지 될거야!” 라고 말이다.

 

*

 

나병 환자를 업은, 평범한 마을 여자인 화자에게서 무언가 중요한 결단력이 느껴진다. 그녀의 말은 자칫 무책임해 보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감정을 품고 있다. 바로 희망이다.

 

이것은 모든 게 무너지는 세상에서 끝까지 사슴 신의 머리를 되돌려주고자 목숨을 거는 아시타카와 산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신념이다.

 

결국 마을 여자의 말과, 아시타카와 산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주민들은 삶의 터였던 마을이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서로라는 존재를 잃지 않았고, 사슴 신이 죽여버린 모든 생명은 순환의 이치를 따르듯 다시 꽃을 피우며 살아났다.

 

그제야 우리는 알 수 있다. 사슴 신은 생명을 앗아가는 걸로 보였지만 결국은 꽃을 피우는 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또 많은 것을 잃어도 가장 중요한 희망과 생명이 남아있다면 자연은 언제든 새로운 기회를 준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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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タジオジブリ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의 측면에서, 입체적인 캐릭터를 감상하는 측면에서 <모노노케 히메>는 정말로 훌륭한 작품이다. 비록 작품이 개봉한 지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영화가 내보이는 교훈과 가르침은 생생하게 마음속으로 전해진다.

 

오히려, 무엇보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 지금의 현대 사회에서 다시금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영화가 아닐까.

 

이 영화가 더욱 많은 사람에게 영감과 감동의 원천이 되길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박소은 태그.jpg

 

 

[박소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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