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잠들지 못하는 자는 누구인가 [영화]

일상의 파괴로부터 오는 모든 것
글 입력 2023.09.1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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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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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간결하고 강렬한 제목에 이끌려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 <잠>은 영화 <옥자>의 연출팀에 참여하여 봉준호 감독과 함께 작업한 유재선 감독의 첫 장편영화이자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다. 보기 전부터 기대했지만, 나의 흥미를 더욱 유발한 건 <잠>이라는 제목이었다. 그 일상적이고 단순한 것이 어떤 방식으로 공포를 유발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거나 자주 보는 편이 아니라 해석이 매우 주관적이고 미숙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 발견한 여러 특징을 나름대로 풀어내보고자 한다.


 

 

일상의 파괴와 관계의 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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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잠>은 신혼부부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이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중 현수가 렘수면 행동 장애로 인해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평화가 깨지고 그들 사이에 공포와 불안, 불신이 극치로 치솟는 내용이다.


일상의 파괴를 제일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평소 의식 한 번 하지 않았던 아주 흔하고도 평범한 무언가를 깨부수는 일일 터다. 감독은 그것으로 ‘잠’을 택한다.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수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잠이다. 누구나 잠들고 잠든 이는 자는 동안의 일을 알 수 없다. 이 일상적이고 당연한 논리가 깨지면 불안과 공포가 발생하고, 일상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 공포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현수는 어느 날부터 이상한 증세를 보인다.

 

 

"누가 들어왔어."

 

영화 <잠> 중

 


자다가 누군가 들어왔다고 말한 날을 시작으로 현수는 수면 도중 얼굴을 미친 듯이 긁어서 피투성이가 되고 냉장고를 열어 날음식을 마구 섭취하다가 뛰어내리려고 한다.

 

여기서 가장 공포가 느껴지는 부분은 말 그대로 몽유‘병’이므로 현수는 이러한 사실을 의도하거나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깨어나서야 비로소 수진의 입으로 전해 듣는 게 현수가 본인도 모르는 본인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전부이다. 현수의 몽유병은 잠들어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잠과는 확연히 다른, 어쩌면 잠들지 않은 모습과 더욱 유사한 모습이다. 현수는 수면 클리닉을 다니며 약을 복용하고 치료를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반려견 ‘후추’를 냉동실에 넣어 죽이는 사고가 발생한다.


현수로 인해 반려견을 잃고 공포가 점차 거세질 즈음 수진은 딸을 출산한다. 수진은 현수 탓에 잠들 수 없다. 괜찮은 척하지만 후추와 닮은 반려견을 보면 여전히 가슴 아파한다. 그리고 현수가 자는 동안 딸을 해칠까 봐 불안에 떨며 화장실에서 잠을 청한다. 수진은 현수의 몽유병으로 인해 미쳐가고 결국 펄펄 끓는 솥에서 아기 손이 떠 있는 끔찍한 환각까지 보게 된다. 뜨거운 솥을 바닥에 쏟아부은 후 정신 나간 얼굴로 사골 틈에서 아기 시체를 찾는 수진에게 이제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감독은 누가 위험인물인지 혼란스럽게 함으로써 영화의 긴장감을 더한다. 몽유병으로 인해 반려견을 죽인 현수인지, 현수로 인해 미쳐가는 수진인지 말이다. 나는 수진이 솥을 엎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1장까지만 해도 현수가 위험인물로 간주되었는데 2장의 미쳐버린 수진으로 인해 그 역할이 역전된 것이다. 이제는 수진이 현수보다 더욱 위험한 인물이 된다. 




영화 <잠>에서 나는 익숙한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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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선 감독이 봉준호 감독과 함께 작업한 만큼 영화 <잠>은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과 유사한 지점들이 있다.


<잠>은 보통의 장편영화와 다르게 제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를 자막으로 명시한다. 제1장에서는 신혼부부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의 행복한 일상이 현수의 몽유병으로 인해 깨지기 시작하고, 제2장에서는 현수의 이상한 증상이 단순 몽유병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수진이 알게 되며, 제3장에서는 이로 인해 파멸로 치닫는 수진과 현수를 보여준다. 이는 여러 단편영화가 이어지다가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그것들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합쳐지는 봉준호 감독의 <지리멸렬>을 떠오르게 한다. <잠>을 보면서 제1장, 2장, 3장이 마치 각각의 단편영화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 개의 장은 분명 이어져 있지만, 굳이 앞뒤 장이 없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이다. 


<잠>에서 시도한 장의 구분은 영화를 하나의 호흡으로 몰입하여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색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각 장의 사이가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자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를 단계별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세이브포인트 같은 지점으로 느껴져서 나는 개인적으로 호였다. 이건 사담이지만 문예창작학과 수업 중에는 영화 수업도 있는데 영화를 세 개의 장으로 나누는 연습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디까지가 1장이고 어디부터 2장인지 늘 헷갈려 어려움을 겪곤 했는데, 이렇게 장을 나누고 그 시작을 명시해 주니 속이 시원했다. 


봉준호 감독은 배경과 선, 면을 이용하여 철저하게 계산된 화면 구도를 만들고 이에 상징을 넣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잠>에서도 비슷한 지점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우선 앞서 말했던 역할 반전이 있다. 1장에서는 무표정으로 날음식을 입에 욱여넣는 현수를 보는 수진이 있고, 2장에선 뜨거운 사골을 맨손으로 미친 듯이 뒤지는 수진을 보는 현수가 있다. 둘 다 부엌을 비추는 구도이지만 같은 장소에 다른 사람이 유사한 모습으로 있음으로써 두 장면이 확연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잠> 속 음악과 배경 소리는 장면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부분에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떠오른다. ‘박 사장’(이선균) 집에서 ‘기택’(송강호) 가족과 문광(이정은) 부부가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잔니 모란디(Gianni Morand)의 In Ginocchio Da Te(그대 앞에 무릎 꿇고)가, 다송이의 생일 파티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장면에서는 오페라 로델린다(Rodelinda)의 Mio caro bene(나의 사랑하는 이여)가 쓰였다. 둘 다 혼란스러운 장면과는 반대되는 분위기의 노래이지만 그렇기에 혼란과 난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잠> 또한 장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음악을 사용한다. 현수가 이상 증세를 보이는 장면이나 수진이 미친 듯이 아이의 안전에 집착하는 장면 등 공포를 유발할 필요가 있는 지점에 점차 고조되고 찢어지는 듯한 현악기 소리를 활용한다. 그래서 공포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연출 기법인 점프 스퀘어, 소위 말해 갑툭튀가 거의 없음에도 <잠>은 음악으로 무서움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린다. 영화를 보면서 배경 음악에 대한 공포도 상당했던 기억이 난다. 




열린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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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은 무당으로부터 현수에게 남자 귀신이 붙었다는 말을 듣고, 그 귀신이 얼마 전까지 아랫집에 살았던 사람이자 아랫집에 이사 온 ‘민정’(김국희)의 아버지인 한 할아버지라고 추측한다. 현수는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믿지 않지만 수진은 잠시 빙의 된 무당이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개 짖는 소리 없이, 아기 우는 소리 없이 단둘이 살고 싶다, 너랑만.”

 

영화 <잠> 중

 


자신의 딸이 해를 당할까 봐 극심한 불안과 기묘한 확신에 휩싸인 수진은 현수의 몸에서 할아버지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3장에서 렘수면 행동 장애 완치 판정을 받고 돌아온 현수를 기다리는 것은 납치된 민정과 그녀의 머리에 전동드라이버를 겨누는 수진이다. 수진은 현수를 더 이상 남편으로 보지 않는다. 후추를 죽이고 딸을 죽일지도 모르는 할아버지로 보일 뿐이다. 


현수의 몸에서 나가지 않으면 당신의 딸을 죽여버리겠다는 수진에 현수 또한 황당하고 무섭기는 마찬가지이다. 수진을 말리던 현수는 갑자기 돌변한다.


 

“알았다고 미친년아.”

 

영화 <잠> 중

 


순간 노인 같은 걸음걸이와 말투, 표정을 보이는 현수는 자정이 되기 직전 풀썩 쓰러지더니 말한다. 귀신이 갔다고. 수진은 현수의 옆에 누워 비로소 편히 잠든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결말은 무당의 말과 수진의 믿음이 사실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수의 직업이 무명 배우라는 점을 짚어낼 수 있다. 영화 초반에 현수가 무명 배우로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즉, 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천도한 것이 전부 현수의 연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감독은 열린 결말로 영화를 마무리하면서 영화 이후까지 불안과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마지막 장면인 수진이 편안한 잠에 빠져든 것이 진정 앞으로도 지속될 ‘편안’일지, 귀신이 아니라 현수의 연기였다면 그 편안함이 지속될 수 있을지. 정말 귀신이었다고 해도 살인 미수라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수진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말이다. 


잠들지 못할 자는 누구인가.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언제 다시 끔찍한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현수일까, 그런 현수로 인해 뜬눈으로 밤새야 하는 수진일까. 관객들이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독의 의도가 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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