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Leçon 4: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는 상상 [여행]

글 입력 2023.09.13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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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Minolta x 300, 2017

 

 

평일 저녁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영화 <어느 멋진 아침>(원제 Un beau matin)을 보았다. J와 프랑스 영화를 영화관에서 함께 보는 건 처음이다. J의 한국어 실력이 자막 없는 한국 영화를 이해할 만큼은 아니어서 이제까지 영어로 된 영화만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영화 <다가오는 것들>(원제 L'avenir)의 감독인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의 신작을 영화관에 볼 수 있는 것도 행복한데, J와 함께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두 배로 행복했다.

 

나: 레아 세두 알지? 그 배우가 주인공이야.

J: 레아 세두가 누구지?

나: 아니 레아 세두를 모른단 말이야? 너 프랑스 사람 맞아?

J: (내가 보여준 사진을 보며) 아 얼굴 보니 알겠다.

 

가끔은 내가 J보다 더 프렌치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휴일 아침은 마리아쥬 프레흐 French Breakfast Tea 홍차를 마시며 프랑스어 공부로 시작한다. 책장 제일 위 칸에는 카뮈, 그르니에, 미셸 투르니에, 뒤라스, 김화영 번역가의 에세이가 단정하게 꽂혀있다. 얼마 전에는 앙리 마티스의 전시에 다녀왔고,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읽고 프랑스 영화를 보고 글을 썼으며 요즘에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와 라울 뒤피의 작품에 빠져있다. 내가 즐기고 소비하는 것들은 온통 프렌치 소울이 가득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영화 정말 좋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J는 별 감흥 없이 "정말 프랑스 영화 같은 영화였어."라는 짧은 감상평만 남겼다. 프랑스어 몇 단어들을 알아듣고 괜히 뿌듯해하는 나에게 J는 오히려 자기는 모든 영상에 항상 자막을 틀고 봐서 프랑스어인데도 못 알아들은 대사가 있었다면서 나를 어이없이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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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Minolta x 300, 2017

 

 

영화를 보고 나와 햄버거를 먹으면서 얼마 전 프랑스로 돌아간 J의 친구 T의 안부를 물었다.

 

T는 J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J와 T는 대학에서 만나 1년 동안 함께 한국에서 교환학생 시절을 보냈고 둘 다 프랑스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T는 최근 프랑스 회사로 이직해 프랑스로 돌아갔고 한국에서 만난 T의 여자친구 P도 곧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로 떠난다고 한다. P는 작년부터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 T가 아니라 P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놀랐다. T야 원래 프랑스 사람이니까 그렇다 해도, P는 왜 살아본 적도 없는 프랑스에 살고 싶은 걸까?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전혀 다르고 친구도 없고 당장 경제활동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 갔다가 별로면 다시 돌아올 생각인가? J도 P가 왜 프랑스로 가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프랑스에서 사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그 곳에서 철저한 이방인이다. "에밀리 인 파리"같은 일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은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이니까.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다른 마음이었을까? P는 왜 낯선 나라에서 살고 싶은 걸까? 한국이 싫어서? 프랑스가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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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Minolta x 300, 2017

 

 

새로운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그 곳에 사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올해 초 휴가를 다녀온 퍼스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여행 중 회사의 호주 지점에 들려서 나와 같은 직무로 일하는 호주 팀원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같은 직무를 맡고 있지만 호주에서의 삶은 훨씬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우주 어딘가 다른 메타버스에서는 호주에 살면서 이 거리를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는 내가 살고 있겠지. 

 

햇빛이 눈부시게 반짝이던 날. 횡단보도에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맞은편에 호주에 살고 있는 나의 환영이 보였다. 신호가 바뀌고 길을 건너자 나의 환영은 나를 경쾌하게 스쳐 지나갔다. 가벼운 원피스 차림으로 출근하는 길이다. 에코백 안에는 수영복과 책이 들어있다. 햇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그녀의 발걸음을 비춘다. 나는 잠시 멍해져서 횡단보도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호주에서 목격한 삶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국의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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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Minolta x 300, 2017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낯선 도시에 태어나 그곳에 살고 있는 나를 상상한다. 

 

퇴근 후 퍼스의 해변에서 해수욕을 하는 나, 파리의 극장에서 심야 영화를 보는 나, 발리에서 선셋을 배경으로 요가를 하는 나, 뉴욕 공공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나. 낯선 도시에 사는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걷고, 다르게 웃는다. 모두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근사하고 멋있어 보인다.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이 삶도 누군가의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낯선 도시에 사는 상상 속 수많은 자아 중 누군가는 "서울에 살면서 프랑스어를 배우는 나"를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에디터 명함 최은지.jpg

 

 

[최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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