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재판의 역설 - 팜 파탈; 가려져 버린

글 입력 2023.09.0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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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른다. 그러나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이 역사는 변화하는 현재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오늘의 초석,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기반, 혹은 현재를 반추해보는 거울이나 반성과 성찰의 대상으로. 2013년부터 매년 꾸준히 진행되어 온 '산울림 고전극장'은 과거에 멈춘 이야기를 현재로 끌어올려 재해석하고 사유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 있어 무척 특별하다. 올해의 주제는 '고전문학, 이야기의 기원을 찾아서'로, 태초부터 존재해왔던 원형적 스토리텔링을 찾아 고전문학에 반영되는 양상을 살펴본다.


2023 산울림 고전극장의 마지막 여정은 연극 '팜 파탈: 가려져 버린'을 향한다. 극은 질문한다. 수메르 신화의 인안나, 유대 신화의 릴리트,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와 펜테실레이아, 왜 이 여성들은 역사에서 가려져 있었을까. 그러나 가려져 있었다기에는 이들의 이름이 너무도 익숙하다. 죽음, 파멸, 유혹의 대명사가 아닌지. 우리는 이들을 숱하게 불러 왔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가려져 있다는 것일까?

 

 

 

'부정적 선입견' 감옥에서의 탈출, 히든 죄수


 

극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 <히든 죄수>로부터 시작된다. <히든 죄수>는 사람들의 '부정적 선입견'이라는 감옥에 갇힌 신화 속 죄수를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후, 오늘날의 기준으로 판결을 내리는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극의 구조 자체가 원형적 스토리텔링을 들여다보는 이번 고전극장의 주제를 위트 있게 품고 있었다. 심판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상태로, 이번 회의 죄수는 모두 살해죄를 가진 여성 4명으로 진행된다. ‘남편과 시누이 살해죄’라는 죄목을 가진 인안나, ‘도의적 살인죄’, 다른 말로 ‘우리 인간의 원죄 유발죄’라는 죄목이 붙은 릴리트, ‘무수한 살인죄’가 붙어있는 메두사, 그리고 ‘대량 학살죄’의 펜테실레이아.


심판대 위에 올라선 이들은 각자의 삶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수메르의 신 인안나는 자신의 남편과 시누이를 살해한 사건은 그의 불륜으로 인한 것이었으며 합당한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전한다. 자신은 상대의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린 것뿐이라고. 이어 유대 신화의 릴리트 역시 자신에게 씌워진 '도의적 살인죄'는 부당한 처사이며, 자신을 더 낮은 계급으로서 대하려고 한 아담의 태도와 행동 때문에 그를 떠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주 당당한 태도로. 재판에 참여한 다른 인물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공감과 지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메두사와 펜타실레이아의 삶.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앞서 자신을 변론한 인안나와 릴리트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큰 상처를 품고 있으며, 어딘가 감정이 억압되어 있다. 메두사는 자신이 대량 학살을 저지르는 괴물로 변한 계기가 포세이돈의 강간 때문이었음을 토로한다. 아테네의 신전에서 일하던 사제였을 당시 포세이돈이 자신을 찾아왔었다고. 그러나 자신을 지켜주리라 예상한 아테네는 오히려 순결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벌하고 괴물로 만들었다고 했다.

 

오랫동안 감추어온 진실을 꺼내며 고통스러워하는 메두사의 연기가 굉장히 격정적이라 기억에 남는다. 아마조네스의 왕 펜테실레이아는 남자를 자신의 섬에 납치해와 강간하고 살인한 이력에 대해 오히려 당당하게 말한다. 그 시절에든 부족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그렇게 행동하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에서 자신의 죽음이 아킬레우스의 시간으로 인해 더럽혀졌다는 점에 모욕감을 표출하며 아픔을 드러낸다.

 

이들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재판대 위에서 다른 이들의 응원을 받음으로 인해 도리어 마음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죄인이라고 묶여 올라온 다른 여성들을 지지하고, 또 지지받으며. 재판의 결과와는 상관 없이, "나는 죄가 없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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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고함


 

재판은 끝으로 치달을수록 흥분과 열기로 휩싸인다. 이들은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결백을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투쟁적이다. 단순히 소리를 치는게 아니라 의자를 내리치고 사방으로 주먹질을 하며 격정적인 행동을 이어가는데 이를 지켜보는 MC가 안절부절하며 그만해달라고 빌 정도다.


재판을 지켜보고 있던 배심원이자 관객들은 점차 고조되던 내면의 갈등이 외부로 표출되며 한 목소리를 내는 이 시점에 오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언젠가 외치고 싶었던 무언가를 저들의 입을 통해 대신 듣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사회의 시선이 두려워서, 그 편견의 억압을 이겨내지 못하여, 정죄의식으로 인해 자신이 부끄러워 드러낼 수 없어서, 우리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었던 감정과 사연이 덩달아 터져나오는 듯하다. 용기를 준다. 당신들도 그렇게 외치라고.


또한 이는 애초에 재판이라는 레이아웃이 무척 역설적이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저들은 누군가의 판결을 기다려야만 하는 '심판대'에 올랐어야만 하는 이들이 맞는가. 물론 간과할 수 없는 죄목도 분명 있었다. 시대가 지남에도 결코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는 죄. 특히 부족의 성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납치와 살인을 일삼았던 펜테실레이아는 충격과 공포에 질린 MC의 반응처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하지만 이 극에서 말하고자 하는 점은 '당시에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든 부족 사회가 그렇게 살아왔으니 당연한 것' '저 사람도 잘못하고 살았으니 내 잘못도 지적하면 안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음, 파멸, 유혹의 상징을 안은 채 심판대에 올라야만 했던 이 상황의 모순을 짚는다. 편향된 권력 구조에서 왜곡되어 가려져 있던 서사와 여성 캐릭터에 대한 편견을 재해석하려는 방향성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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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 아닌 죄인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사위가 혼란한 상황에서 마침내 나타난 재판장. 끝내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던 재판장은 바로 수메르 신화에 등장하는 태초의 여신 '남무'였다. 모두 일순 당황한다. 조화롭기가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고 플라밍고 튜브를 낀 채 우아하게 등장한 남무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착장과 품위 있는 말투의 괴리감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어쩌면 '판정'을 내려야 하는 이의 모습에서 위압감이나 품위를 다소 덜어냄으로써,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관계성을 피하려고 의도한 것 같았다. 판정을 내리는 재판장이지만 친근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사실 극이 재판의 플롯을 하고 있는 만큼 결말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이 극에서 '죄인으로 지목된 여성들이 자신의 무죄를 세상에 외친 모습'과 '외부의 재판장이 이들의 죄를 평가하고 판단한다'는 것이 굉장히 모순되고 불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은 남무의 등장으로 오히려 완전히 종식됐다. 남무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은 죄가 없어요."라 말하며 이어 '오히려 나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남무는 수메르 태초의 여신이었으나 세상을 만든 후 오래도록 잠에 들어 있었다며, 기울어진 권력 구조로 고통받았던 이들은 결국 자신 때문이라는 설명을 이어갔다. 태초의 신은 남무 자신처럼 여성이기도 했으나 그간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그러나 자신은 이 상황을 깨닫고 인지하고 있으므로 점차 세상은 변화해갈 것이라고. 


완벽한 결말이었다. 재판장은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판결을 내리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판결을 내리는 재판장의 입장에서 함께 연대하고 움직이는 참여자의 입장으로 스스로를 전환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배심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관객 역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위치에서 이들의 외침에 참여하고 움직이는 자로 전환되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남무의 말은 간결하지만 힘이 있었다. '이 상황을 인지했으므로 세상은 변화할 것'이라는 말. 남무는 신이기도 했지만 우리이기도 했다. 오래된 서사를 끌어올려 왜곡을 덜어낸 후 죄인들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해석해 숨 쉬게 해준 극의 내용과 이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 나아가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인지하고 있는 여성들과 이에 공감하는 수많은 사람들. '인지'만으로도 세상은 변화할 수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이들의 작은 움직임으로 인해 세상 역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희망 섞인 메세지였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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