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콘크리트 잔해가 스크린 밖까지 날아온다 [영화]

이병헌, 박보영, 박서준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글 입력 2023.08.1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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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뒤집혔다. 대지진이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 자주 가던 편의점의 간판이 두 동강 나서 굴러다니고, 출근하던 지하철의 입구엔 돌덩이가 가득 들어차 있다. 밤이 되면 동사할 정도의 추위가 찾아온다. 폐허 속에서 우뚝 남아있는 것은 당신이 대출을 받아 겨우 마련한 황궁 아파트 103동의 어느 집이다.


하지만 어떤 입주민들은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지진이 나는 순간 밖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빈방에는 황궁 아파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기존에 거주하던 이들은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가장 큰 문제는 자원이 한정적이라는 사실이다. 몰려온 사람들을 모두 수용한다면 식량이 금방 동날 것이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허름한 황궁 아파트의 사람들을 무시했던 '드림팰리스' 주민들이 괜히 고깝기도 하다.

 

결국 입주민들은 모여서 회의한다. 서로의 언성이 커지기 전에 바둑돌이 등장한다. 「외부인을 황궁 아파트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찬성은 흰 바둑돌, 반대는 검은 바둑돌이다. 당신은 어느 돌을 선택할 것인가?

 

 

 

재난 상황에서의 다양한 인간 군상


 

김영탁.jpg


 

902호 김영탁은 손에 흰 바둑돌을 쥐었다. 불이 난 집으로 뛰어들어 화재를 진압한 것으로 부녀회장인 금애에게 주목받은 그는 귤을 까먹다 말고 주민 대표가 된다.

 

목소리가 큰 금애의 뒤에서 어리숙하게 굴던 영탁은 어느 순간부터 진심으로 집을 지키기 시작한다. 피를 흘리면서도 외부인은 다 나가라며 소리를 지르고, 군필자 위주의 방범대를 꾸려 식량이나 물품을 찾으러 나간다. 미성년자인 지혁(방범대)을 인질로 잡고 있던 마트 주인(외부인)을 여러 차례 가격한 뒤 살해하기도 한다.

 

아빠를 부르는 아이와 울고 있는 아내를 뒤로하고 방범대는 식량을 챙긴다. 돌아온 아파트에서 영탁은 영웅이 되어 있었다. 황궁 아파트 앞마당에 왁자지껄한 잔치가 열렸다. '마이크 든 김에 노래해라'는 주민들의 성원에 김영탁은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른다.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주민들의 일렁이는 그림자들을 배경으로 마이크를 잡은 그는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진짜 집주인의 입에 바둑알을 쑤셔 넣어 살해하던 기억을.

 

그는 사실 택시 기사인 '모세범'이다. 황궁 아파트를 매수하기 위해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 입금부터 했던 모세범은 사기를 당한 것을 알고 집주인인 김영탁을 찾아와 따지기 시작했다. 뻔뻔한 태도로 나오는 김영탁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한 모세범은 결국 몸싸움을 벌이고, 힘없는 노모가 보는 앞에서 아들을 살해한다.

 

하지만 모세범이 902호 주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903호에 살던 혜원뿐이다. 사기꾼에게 분노하던 모세범은 어느 순간부터 사기꾼이 되어 있었다. 서명란에 습관적으로 'ㅁ'을 쓰다가 지우는 주제에 마이크를 들고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그가 꾸린 방범대는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약탈을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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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세범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지진이 나기 전에 간호사로 일했던 그녀는 검은 돌을 잡는다. 다 같이 살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하며 아파트에 몰래 숨어들어 있는 외부인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준다. 아들을 키우며 학군으로 차별을 받곤 했던 부녀회장 금애와는 달리 타워팰리스 사람들에게 우호적이다.

 

재난물에 흔히 등장하는 선한 역의 캐릭터라고 보이기 쉽지만, 사실 명화는 그 누구보다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외부인들을 숨겨주었던 도균과 비교하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809호에 사는 가구 디자이너 도균은 방범대 편성 때도 지병을 핑계로 자리를 피하고, 쫓겨난 외부인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준다.

 

남편인 민성에게 방범대에 나가지 말라며 설득하기도 한다. 방범대가 찾아오는 식량을 배급받으면서, 민성에게는 수색을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명화가 모세범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는 이유도 남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민성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명화는 사람을 해하는 과정에서 점점 망가져 가는 배우자를 걱정한다.

 

하지만 명화는 섣부르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주민 대표에게 무작정 대항하는 대신 물밑에서 기회를 엿본다. 모세범의 정체를 밝혀낼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고 나서야 사람들의 앞에 나서서 흐름을 바꾸어 버린다. 

 

그 과정에서 영탁의 치매 노모를 붙잡고 다그치기도 한다. 이타적이지만 적당히 이기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이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사탄이나 성모마리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기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할 뿐이다.

 

 

김민성.jpg

  

 

그리고 아마 많은 사람이 '민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지진 당일 약수역 사거리에서 트럭에 깔린 여성을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력했다. 능력과 여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많은 이들은 기꺼이 타인을 돕고자 한다.

 

하지만 지진이 코앞까지 덮쳐오자 낙하물을 피해서 주변의 차 안으로 도망친다. 자신이 구하려던 여성과 눈이 마주친 민성은 안전벨트를 잡고 끝까지 고민한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지진이 그들을 휩쓸어버렸지만.

 

구사일생으로 황궁 아파트에 돌아온 민성은 방범대 반장을 맡게 된다. 갈등의 시작이었다. '가장'의 책임감을 강조하며 아파트를 지키자고 주장하는 모세범과 '인간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우리 여기서 쫓겨나면 끝이야'라며 아내의 주장을 어물쩍 넘기고 모세범을 의지하는 경향을 보이던 그는 결국 명화를 따라간다. 외부인들이 황궁 아파트로 쳐들어오며 전쟁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된 상황에서 집을 지키기 위해 남는 대신 명화의 손을 잡고 밖으로 도망쳐 나온다.

 

멀어져가는 그들의 뒤에서 유토피아라고 믿었던 작은 성이 몰락한다.

 

 

 

콘크리트 속은 아는 만큼 보인다


 

모세범은 사기를 당한 인물이다. 아내와 딸에게도 버림받았던 그는 세상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아파트 밖으로 나가서 마주하는 외부인들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손에는 총과 지팡이를 들고 살생에도 거리낌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 우스운 사실은, 정작 본인도 영탁과 다를 것 없이 사기꾼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억울한 사정이 있을지라도.

 

반면 명화는 사람을 살리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자식이 없으므로 드림팰리스 사람들의 학군 차별로 인해 서러움을 겪을 일도 없었다. 명화의 모든 생각과 선택은 타고난 성격에 상황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본인이 남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으니 외부인을 대할 때도 경계 태세부터 보이지 않는다. 혼자 남은 그녀는 외부인 무리를 따라가서 진정한 유토피아를 발견한다.

 

"정말 그냥 살아도 되나요."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살아 있으면 사는 거죠."

 

수직으로 세워져 있는 황궁 아파트와는 달리 수평적으로 쓰러진 아파트였다. 천장과 벽면에 텔레비전과 부엌이 붙어있었다.

 

만약 방범대가 이들을 마주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원만한 합의는 예상하기 힘들다. 아마 유혈사태도 망설이지 않는 약탈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그렇게 지도상의 엑스표로 사라져 버렸을지 모른다. 반면 명화는 그들이 배가 고프겠다며 전해주는 주먹밥을 받아먹는다.

 

여담으로, 노숙자1 역할의 엄태구는 아파트 사람들이 식인을 한다고 믿는다. 아파트가 천국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홀려서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노숙자 무리는 이동하고 있는 황궁아파트 방범대를 보자 놀라서 도망친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는 서로의 처지가 역전된다. 노숙자1은 황궁 아파트에서 도망친 명화와 민성을 빤히 올려다본다. 그의 손에는 살점이 붙은 커다란 뼈가 들려 있다. 함께 있던 노숙자 친구들은 보이지 않는다. 황궁 아파트의 사람들이 식인을 한다고 믿는 순간, 주변의 동료 역시 '음식'으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영화관 밖의 세상도 마찬가지


 

우리는 세상을 아는 만큼 본다. 모세범도, 김민성도, 명화도, 부녀회장 김금애도, 노숙자도, 심지어는 영화를 감상한 관객들마저 그렇다.

 

누군가는 모세범의 선택은 재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최선이었으며 명화가 공동체에 민폐를 끼쳤다고 평가한다.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체계에 균열을 일으킨 명화와 도균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누군가는 명화의 선택을 두둔한다. 허술하고 강압적인 아파트의 체계가 몰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며, 명화는 단지 추진력을 더했을 뿐이라고 여긴다. 애당초 공생을 선택했다면 결말이 긍정적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다.

 

이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같은 내용을 감상한 뒤에 감상평이 판이하게 갈리는 영화다. 각자가 살아온 삶과 축적된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엄태화 감독 역시 절대 악이나 절대 선을 단정 짓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대신 어떤 캐릭터에 몰입하느냐에 따라서 영화관을 나갈 때 드는 생각이 다르도록 의도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감상하고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세련된 연출도, 소름 끼치게 적절한 음악도, 사회 고발적인 내용도 아니었다. 바로 시야의 한계를 인식하게 됐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가까운 주변 사람과도 보고 있는 세상이 다를 수 있다. 같은 지평좌표계에 있지만 서로 다른 차원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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