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명화 파헤치기, 티치아노의 '여인(달마티아의 여인)' [미술/전시]

젊은 화가 티치아노의 자신감이 돋보이는 초상화
글 입력 2023.08.0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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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자화상>, 1550, 베를린 국립 회화관

 

 

나이가 지긋한 한 남자가 손을 탁자 위에 올린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남자의 위엄있는 표정에선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고, 여러 개의 금색 체인을 목에 건 모습으로 보아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그는 부유한 상인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과연 이 그림의 등장인물은 누구일까?


앞선 필자의 글 “초상화를 통해 보는 화가와 후원자”에도 등장한 바 있는 이 작품은 티치아노(Titian, c.1488-1576)의 자화상이다. 티치아노는 전성기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였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티치아노의 명성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그는 베네치아를 넘어 스페인, 독일 등 다양한 지역 후원자들의 커미션을 받았고, 타고난 사회성으로 후원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540년대 후반부터 티치아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를 위해 여러 그림을 그린다. 위의 초상화도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티치아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국왕이었던 카를 5세에게 기사 작위까지 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1546-7년경에 그려진 이 그림은 화가의 사회적 지위를 위엄있는 표정과 자세, 그리고 카를 5세로부터 하사받은 금색 체인을 통해 과시하고 있다. 

 

 

 

<여인(달마티아의 여인) La Schiav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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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여인(달마티아의 여인)>, c.1510-12, 영국 내셔널 갤러리

 

 

후원자와의 관계는 티치아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지만, 이번 편에서는 티치아노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사회적 명성을 얻은 중년의 화가와 후원자의 관계가 아닌, 젊은 화가가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일종의 포트폴리오로서 그린 <여인(달마티아의 여인) La Schiavona>(c.1510-12) 을 함께 감상해 보자. 이 작품은 영국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지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내셔널 갤러리 특별전을 통해 10월 9일까지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티치아노가 20대 초반에 그린 초기작이다. 제목 “La Schiavona”는 “달마티아의 여인”을 뜻한다. 티치아노가 직접 작품에 제목을 붙이진 않았지만, 베네치아의 식민지였던 아드리아해 동쪽 지역의 이름을 따와 17세기부터 지금처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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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티치아노, <여인(달마티아의 여인)>, c.1510-12, 영국 내셔널 갤러리

 

 

초상화의 모델은 풍채가 좋은 한 여성이다. 그녀는 자줏빛 옷을 입고 살며시 미소를 띤 채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풍성한 옷의 양감과 천의 질감이 능숙하게 표현되었으며, 특히 위 그림의 세부를 보면 여인의 오른쪽 어깨 위에 둘린 반투명의 옷감은 실제 같이 착각하게 할 정도로 기술적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차분한 여인의 시선에서 자신감과 위엄을 느낄 수 있으며, 자신의 옆모습이 새겨진 부조에 한 손을 올리고 있는 자세도 인상적이다. 부조에 새겨진 옆모습은 턱선과 코의 모양으로 미루어 보아 그림 속 여성과 같은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 초상화의 모델은 과연 누구일까?


아쉽게도 티치아노는 아래 난간에 "TV"라는 서명 외에는 그림에 대한 아무런 힌트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초상화 속 여성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사실은 없다. 게다가 16세기 베네치아에서 여성 초상화를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때 이 여성이 추방당한 키프로스의 왕비 카타리나 코르나로라는 설이 있었지만, 왕비의 다른 초상화와 닮은 점이 별로 없어 초상화 속 여인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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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갓난아기의 기적>, 1511, 스쿠올라 델 산토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티치아노의 다른 그림 <갓난아기의 기적 The Miracle of the Newborn Child>(1511) 을 보면 오른쪽에 서 있는 여인의 옆모습이 초상화 속 모델과 닮아있다. 이를 통해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두 작품 속 여인이 당시 티치아노가 알던 실제 인물을 참고해 그렸음을 추측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각각 다른 그림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후원자의 요청을 받아 그린 작품이 아닌,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후원을 유도하기 위한 일종의 포트폴리오로 그려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여러 번 수정을 거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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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달마티아의 여인)> 엑스레이 촬영본(출처: 영국 내셔널 갤러리)


 

당당한 여인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완벽해 보이지만 사실 여러 번 수정을 거친 그림이다. 1960년에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 그림을 청소하면서 정밀 엑스레이 촬영을 했는데, 그 결과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 두 가지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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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달마티아의 여인)> 청소 과정 중 촬영된 사진(출처: 영국 내셔널 갤러리)

 

 

첫 번째는 그림 오른쪽 모서리에 원래 원형 창문 또는 구멍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복원 중에 촬영한 위 사진을 보면 오른쪽 모서리에서 반원형 모양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안에는 마치 배에서 바라본 것처럼 구름 낀 하늘과 수평선 같은 형체가 보인다. 처음에는 이 부분이 처음부터 그려진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와서 덧칠되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티치아노가 작업 과정에서 완성하지 못하고 덮어버린 것으로 판단했고, 화가의 결정에 따라 현재 반원 모양은 사라졌다.

 

더불어 여인의 옆모습이 조각된 부조가 그려진 부분에 원래는 여인이 단축법으로 표현된 타원형 물체를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현재 타원형 물체는 화가가 접시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위 엑스레이 촬영본을 통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 그렸던 접시와 나중에 수정한 사람의 옆모습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티치아노는 어떠한 이유에서 접시를 그리다 말고 사람의 옆모습을 조각한 부조를 그리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파라고네 논쟁


 

화가의 속마음에 대한 해답은 “파라고네(paragone)” 논쟁에 있다. 이탈리아어로 “파라고네(paragone)”는 “비교”를 의미하며, 따라서 어떠한 두 대상의 우위를 비교하는 논쟁을 파라고네라 부른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디세뇨와 콜로레, 회화와 문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파라고네가 존재했지만, 특히 가장 유명하고 자주 언급되는 논쟁이 바로 회화와 조각간의 파라고네이다. 

 

그러면 이제 티치아노가 양각 부조를 캔버스 안에 그려 넣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는 그림 안에 조각을 그려 넣어 조각이 가지는 3차원 모양, 입체감, 생동감을 그림도 담아낼 수 있고, 여기에 더해 그림은 색과 질감까지 표현할 수 있다는 우월함을 여인의 초상화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결국 화가는 회화와 조각의 파라고네에 대해 회화가 승리했다는 의견을 자신의 그림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여인의 초상은 정면, 부조에 조각된 모습은 측면인 것 또한 의도적인 화가의 선택이었다. 파라고네에서 조각의 우위를 주장하는 사람은 회화는 오직 인물을 한 방향에서 바라본 모습 밖에 재현할 수 없다며 비판했는데, 티치아노는 인물의 정면과 측면, 즉 두 방향에서 바라본 모습을 모두 그림 안에 재현해 이러한 당대 비판에 대해 반박했다. 또한 그림 안에 조각을 그려넣은 선택 자체가 회화는 조각을 모사할 수 있지만, 조각은 회화를 모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젊은 화가의 눈부신 재능과 자신감


 

티치아노의 <여인(달마티아의 여인) La Schiavona>은 자세, 표정, 옷감의 표현에서 비록 20대 초반이었지만 이미 완숙한 화가의 기교가 돋보인다. 여인의 살아있는 모습과 조각된 모습을 한 장면에 그려 넣으며 둘의 차이를 얼굴 방향으로 구분하여 표현한 것에서도 화가의 재치를 엿볼 수 있다. 이제 위로 올라가 그림을 다시 보면 침착하고 자신감 있어 보이는 여인의 모습에서 조각에 대한 회화의 우위를 주장하는 젊은 화가의 눈부신 재능과 돋보이는 자신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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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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