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설보다 여름, 여름보다 어차피 멸망할 세상 [도서/문학]

어차피 멸망할 세상, 그까짓 것.
글 입력 2023.07.26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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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다. 정수리가 따가울 만큼 뜨겁다가도 금세 모든 바닥이 축축해지는, 여름.

 

내가 여름에 하는 일 중 하나는 『소설 보다: 여름』 시리즈를 읽는 것이다. 『소설 보다: 여름(2023)』에 실린 단편소설 중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를 읽고 얼른 오피니언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주인공 희주와 주호가 살아가는 모습이 나 같으면서도 누군가가 이리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 그리고 또 다른 희주와 주호에게 나의 언어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마구 솟아났다.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글을 써보고자 한다.


 

 

이런 희주와 저런 주호, 그런 그들



희주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충동적으로 수영 센터에 들어가 성인 기초 수영반을 등록한다. 첫 수업 날, 희주는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맨 뒷줄에 선다. 


 

희주는 첫 수업부터 자신의 자리를 알았다. 실력자가 아니고서는, 감히 튀어서는 안 된다. 그것도 그룹 운동 수업의 아주 기본적인 규칙이었다. (……) 이제 막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초보들은 우르르 뒤쪽으로 몰렸고 희주는 뒷자리를 내주지 않고 사수했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희주가 여러 운동을 섭렵하면서 그곳에는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잘하는 사람들은 앞줄에, 못하는 사람들은 뒷줄에 서는 것.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무언의 규칙이지만 필라테스, 에어로빅, 요가, 방송 댄스 등 어떤 운동을 배워도 이 규칙만은 동일하다. 그리고 희주는 수영 강습반에서도 규칙을 지킨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잘 아는 규칙이었으므로 초보자들끼리 치열한 뒷줄 싸움을 벌인다. 


혼란스러운 뒷줄을 뒤로한 채 맨 앞줄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주호다. 주호는 직장을 그만두고 성인 기초 수영반에서 수영을 배운다. ‘왕 기초반’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전단지를 보고 등록했는데 그 작은 강습반 안에서도 꼴찌가 있었고, 그중 한 명이 주호가 된다.


 

선수도 아니고 수영을 배우기 위한 강습반에 꼴찌라는 게 있을 수 있다고 곽주호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가 그 반에서 꼴찌로 여겨진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애초에 못한다는 게 뭔지 몰랐다. 못하는 것이 꼴찌로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 곽주호는 첫 수업 시간에도, 그 다음 시간에도 앞에 섰다. 이어지는 수업 시간마다 앞에 섰다. 누구도 곽주호를 밀치고 앞으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곽주호는 그냥 서 있던 자리에 서 있었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주호는 그룹 운동 수업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라기보다는 ‘모름’에 더 가깝다. 운동 자체의 규칙 외에 이런 규칙이 있으리라고는, 못해서 배우러 온 곳에서 못해서 꼴찌가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주호는 처참한 수영 실력에도 오기나 악의가 아니라 그냥 서 있던 자리라는 이유로 꼿꼿이 맨 앞줄에 선다. 


어떠한 형태의 사회에서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주처럼 ‘규칙’을 중심으로 자기 위치와 능력치를 파악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주호가 굉장히 독특한 동시에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사회의 규칙이 정말 우리를, 사람을 위한 것일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선생님도 거울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역시 뒷줄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뒷줄로서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기행과 같은 동작이 나오면 뒷줄은 선생님과 첫 줄 경력자들의 움직임을 보며 감탄하면 됐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희주는 요가 수업을 들었을 적 또한 맨 뒷줄에 섰다. 요가는 거울로 본인의 자세를 확인하며 선생님을 따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모든 수강생에게 해당되어야 하지만 실상은 앞줄의 특권이다. 뒷줄은 선생님도 거울도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앞줄 사람들로 빼곡한 풍경을 보며 감탄하는 게 전부이다. 그것이 희주의 위치일지라도 이 규칙이 희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진 않다.


주호는 규칙을 모르지만 그 모름이 주호를 맨 앞에 서게 한다. 규칙으로 인한 주호의 실질적 위치와 상관없이, 앞줄 사람들로 빼곡한 풍경이 아니라 탁 트인 수영장의 물과 매끈한 타일 벽을 보게 한다. 


 

남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앞으로 갔다. 잠깐 떠올랐다가 멈춰 서고, 떠올랐다가 멈춰 서고. 지구를 느리게 떠다니는 빙하 같다고, 희주는 생각했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다만 매우 느리다. 주호의 느릿한 속도로 인해 다음 줄 사람들이 출발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주호 때문에 제대로 수영을 연습할 수 없는 피해자가 생기는 것이다. 강사는 그런 주호를 차마 콕 짚어 지적할 수 없어서 돌려 말하고, 주호는 여전히 상황을 모른 채 계속해서 맨 앞줄에 선다. 


두 사람 중 누가 옳을까. 공공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희주, 개인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주호겠지만, 애초에 ‘잘하는 사람은 앞줄, 못하는 사람은 뒷줄’이라는 규칙으로 두 사람을 판단해도 되는지 의문스럽다.

 

여러 사회에는 ‘기준’이 있다. 위와 같은 사소한 규칙부터 법처럼 당연시 여겨지는 규칙까지. 이것은 사회구성원인 우리를 나누는 기준이 되고, 이를 충족하기 위해 너무 과하거나 튀지 않아야 하고 그렇다고 너무 물렁하거나 불성실해서도 안 된다. ‘적정선’이 있다는 뜻이다.


 

주호는 동작이 너무 컸고, 희주는 동작이 너무 작았다.

“저게 바로 물장구죠.”

강사가 주호를 두고 말하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주호는 사방으로 물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주호의 발등 아래로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어디 감전됐어요?”

강사는 희주에겐 이렇게 말했다. 희주는 옆으로 누가 지나가기만 해도 고꾸라졌다. 두 사람은 잘못된 동작의 예시로 늘 뽑혔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두 사람은 수영을 못 한다. 항상 잘못된 동작의 예시로 뽑히는 그들은 적정선과 한참 떨어진 위치처럼 보이고, 강사로부터 그런 위치의 취급을 받는다. 사소한 규칙으로 그들을 판단할 수 없지만, 수영 강습이라는 사회는 ‘잘하는 사람은 앞줄, 못하는 사람은 뒷줄’이라는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배경에는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라는 기준이 있고 적정선을 충족하지 못하면 희주와 주호처럼 꼴찌, 뒷줄 중에서도 맨 뒷줄 멤버가 되고 만다. 

 

 


그런 그들이 되기까지


 

희주와 주호가 수영 강습에서만 적정선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희주는 십 년간 하던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여러 운동과 채식, 환경에 대한 관심에 일상을 쏟아붓는다. 환경 파괴 기사를 스크랩하고 재료를 하나하나 손질해 채식 요리를 해 먹는다. 이런 행동은 환경 오염과 기후 위기가 희주의 윤리 의식을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희주의 생존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모든 게 사라질 건데.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평범해서 다행이야.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희주는 고등학생 때 성적 상위권의 학생이었다. 적정선보다 한참 위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수능이 끝나고 일어난 어느 사건으로 인해 무너진다. 


 

아이들이 울었다. 희주는 칠판을 노려보았다. 맨 위 ‘부고’라는 글자 옆에 적힌 이름을 노려봤다.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그 이름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곧 알아챘다. 무서웠다. 나는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희주는 자신이 무서웠다. 그 사실을 누군가 알아챌까 봐 무서웠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같은 학교 학생이 자살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우는 아이들 틈에서 그 학생이 누구인지 모르는 희주는 울지 못한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이 큰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희주는 그런 자신이 무서워진다. 같은 학교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그로 인해 크게 슬프지 않다는 사실이 희주를 무서운 사람으로 만든다. 성적으로 나누어진 기준과 적정선은 금세 사라지고 희주 안에서 슬픔과 추모에 대한 책임이 곧 적정선이 된다. 울지 않는 희주는 적정선에서 한참 떨어진 사람이 되어버린다.


이후 희주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며 다른 적정선, 즉 환경에 집착한다. 환경 문제를 매일 들여다보고 동물 보호를 위해 채식을 한다. 그러나 사회는 희주를 자꾸만 적정선에서 떨어트려 놓는다. 희주의 뚱뚱한 외형은 교사 시절 학부모들로부터 지속적인 불만을 받았고, 머리 서기 동작을 하다가 요가 강사를 발로 쳤던 날 강사가 희주에게 실수로 “뚱땡이한테 맞아 죽을 뻔”이라는 문자를 보내기도 한다.

 

사회에는 환경 및 동물 보호라는 기준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채식을 한다고 해서 타인에게 무조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희주에게 참으로 비통하고 억울했을 터다.


 

희주는 화내야 하는 일과 화낼 필요가 없는 일을 정했다. 고래와 펭귄이 죽고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지구가 죽어가는 일에 화를 내자. 어차피 인간은 죽는 건데. 다 같이. 희주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빨리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다. 잘하면 30년 뒤에. 다 같이 죽는 거지. 희주가 그 말을 한 건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주가 근무하던 사립 학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그래서 희주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도대체 적정선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부조리한 기준과 규칙을 겪어나갈, 혹은 이미 겪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말한다. “같이 떠내려가는 것. 같이 잠기고 같이 사라지는 것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희주의 사랑은 올바르지 않다. 그렇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정세랑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인물 ‘화수’가 등장한다. 화수가 다니는 회사에 의해 파산한 상대 회사의 직원이 염산 테러를 한다. 파산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상사들인데 화수와 다른 여직원이 염산을 뒤집어쓴다. 세상은 얼마나 억울했으면 염산을 던졌겠냐며 가해자를 옹호한다.


 

“공기가 따가워서 낳지 못하는 거야. 자기기 당했던 일을 자기 자식이 당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서는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한국은 공기가 따가워요.”


『시선으로부터,』 중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화수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 두 작품의 메시지는 다르지만, 희주와 화수가 사랑하는 방식은 유사하다. 모두 함께 죽어서라도,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불합리로 인한 따가운 공기를 마시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사랑이다. 


주호는 플라스틱 화분 받침대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어느 날 기계에 카샤라는 직원이 끼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주호는 카샤와 친하지 않았고 그날 휴무였으며 사고가 발생한 구역의 담당자도 아니었다. 공장은 벌금형을 받았다. 기계들은 멈추지 않았고 공장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주호는 “이건 아니죠,”라며 기계 전원을 껐다. 처음에는 다들 침묵했지만 점차 한마디씩 했다. “이건 아니지 않냐.”라고.


 

네가 왜 난리냐, 라는 말을 듣고 주호는 그러게, 내가 왜 난리일까, 싶었다. 곽주호는 스스로 정의로운 사람도, 가슴이 뜨거운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삶을 살았다. 나는 정말 책임이 없는 걸까. 그 생각에 사로잡혔고, 무슨 일을 대하든 습관처럼 이 질문을 마주했다. 점점 주호는 자신과 상관없는 뉴스들을 보면서도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 인터넷 기사 댓글을 보면 사람들은 책임을 회피한다고, 화내고 분노했다. 하지만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주호는 그 문제에 대해 더 마음을 기울였다. 기울어진 마음은 점점 가라앉고 가라앉아서 주호의 세계를 무너뜨렸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주호는 카샤가 죽은 후 ‘책임’에 대해 골몰한다. 같은 공장에서 직원이 죽었는데 정말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것인지 묻는다. 주호와 카샤는 한 번 대화를 나눈 적 있다. 카샤와의 대화에서 주호는 카샤가 어리고, 돈을 벌어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아이가 죽었는데 부장과 직원들은 평소처럼 행동한다. 오히려 전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주호를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공장에서는 기계의 원만한 작동과 기계와 원만하게 작업하는 직원이 적정선에 해당한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적정선에서 벗어난, 난리 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인간은 물속에서 살기 적합한 동물이 아니다. 수영을 배우면서 주호는 그 점이 새삼 신기했다. (……) 인간은 물속에서도 공중에서도, 그러니까 너무 깊은 곳에서도 너무 높은 곳에서도 살 수 없다. 숨을 쉴 수 없다. 그러니 너무 깊은 곳으로도 너무 높은 곳으로도 가서는 안 된다. 주호는 그렇게 살아왔다. 왜 그래야 하지? 주호는 그 점이 억울했고 슬펐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인간은 너무 높아서도 낮아서도 안 된다. 적당히 살아야 하고 주호 또한 적당히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주호는 그 ‘적당함’, ‘적정선’에 의문을 품는다. 도대체 어떻게 얼마만큼 행동해야 적당한 것일까. 여기서는 사람이 죽었는데 책임을 묻지 않고, 저기서는 사람이 죽었으니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회가 주호에게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적정선을 요구받고 혹은 강요받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성실하게 수업을 듣고 과제를 제출하고 동아리 활동을 하며 인간관계를 이어나가는 것, 회사에서는 맡은 일을 해내고 상사의 선택을 따르고 어떨 때는 정시보다 늦게 퇴근하는 것.

 

이로부터 이탈하는 사람들은 적정선을 지켜나가는 이들과는 다른 평가를 받게 된다. ‘불성실하다. 자기주장이 강하다. 양심이 없다. 사회성이 부족하다.’ 사회의 기준에 의해 개인의 서사와 사정이 무시당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동아리 부원이 아니라고 해서, 정시에 퇴근한다고 해서 잘못한 게 아닌데 이런 평을 받으면 죄책감을 느끼고 주호처럼 억울하고 슬퍼진다. 


 

 

그런 그들이 된 그들과 우리는



 

“눈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죠?”

수업이 3주 차쯤 접어들었을 때였다. 강사는 어김없이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곽주호에게 농담하듯 말했다. 그 말에도 주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실제로 자주 들었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생겼나 보다. 티가 나나. 곱씹었을 뿐. 그때, 문희주는 팔을 뻗어 곽주호를 뒤로 잡아끌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 자리 있어요.”

뒤쪽에서 불쑥 나타난 손에 채여 주호는 뒤까지 끌려갔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강사에게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맨 앞줄에 멀뚱하게 서 있던 주호는 희주로 인해 뒷줄로 가게 된다. 주호가 적정선에서 벗어나 있는 이유가 눈치 없음이라는 것을 모든 수강생이 알고 있지만, 아무도 주호에게 뒤로 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강사부터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친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굳이 나설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희주는 다르다. 그곳이 ‘맨 뒷줄’이라는 위치일지라도 함께 고꾸라지고 함께 가라앉기 위해 주호를 데리고 온다. 망설임 없이 주호에게 손을 뻗는다.

 

두 사람은 우연히 같은 시간에 수영 연습을 하며 말을 튼다. 희주가 매번 수영장으로 들고 오는 장바구니에 무엇이 들었는지 주호는 묻고, 수영 센터 앞 노점 분식집에서 야채 튀김을 먹고 중요하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그들은 가까워진다. 


사건은 늘 갑작스레 일어난다. 성실한 연습에도 희주와 주호의 수영 실력은 늘지 않는다. 강사는 “방해는 하지 마셔야죠. 진행이 안 되잖아요!”라며 두 사람에게 제발 나가라고 소리친다. 뭘 얼마나 더 가르쳐야 하냐며 화를 쏟아내는 강사에게 주호가 다가간다.


 

그때 주호가 뒤돌아서 강사에게 다가갔다. 아주 느린 속도로. 물이 갈라졌다. 

“뭐가요. 씨발. 왜 어쩌라고?”

(……)

주호는 강사의 빨간 얼굴을 보며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당황한 강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

강사가 분노한 건 우리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주호는 희주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주호는 욕설까지 내뱉는 강사를 향해 괜찮냐고 묻는다. 이제까지의 주호로 보아 강사를 당황시키기 위한 전략 같은 게 아니다. ‘모름’, ‘눈치 없음’이 만들어낸 정말 진심 어린 걱정이다. 어떻게 이런 사고와 발언이 가능하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주호는 이런 사람이다. 언제나 이런 사람이었다.

 

주호의 한마디로 다른 수강생은 두 사람이 도대체 무얼 잘못했냐며 강사에게 따지고 든다. 곧이어 데스크로 달려가 이제껏 수영장 시스템에 대해 불만이었던 것들을 쏟아낸다. 


강사는 그날부로 잘린다. 이후 희주가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강사를 마주친다. 앞머리를 내리고 있는 그는 학생처럼 앳된 모습이다. 강사는 수영 센터 정직원이 아니라 계약직이었다. 주호를 딱 짚어 지적할 수 없었던 것과 매 강습마다 과할 정도로 열성을 다해 수영을 가르쳤던 것도 계약직이라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주호의 걱정보다는 선을 넘은 강사의 행동이 사람들을 일어서게 했을 것이다. 다만 주호는 항상 모르는 와중에 그때만큼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강사가 분노한 게 희주와 주호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가 계약직이라는 위치에서 받았을 취급과 쌓인 분노를, 열심히 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강습이 그도 주호처럼 억울하고 슬펐을지도 모른다. 

 

수강생들에게 화를 내고 욕설을 뱉은 강사의 윤리 의식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희주나 주호 이외에도 기준과 규칙, 적정선을 요구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작가는 강사라는 캐릭터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서도 희주, 주호, 강사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터다. 내 의도는 그게 아닌데 사회의 기준에 끼워 맞춰지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거나 애초에 아무 의도도 없었는데 사회의 기준은 이런저런 의도를 만들어내고, 그래도 파괴되고 오염되는 사회가 안타까워 아껴준다고 해서 사회가 나를 아껴주진 않는다. 


 

물속과 물 밖. 시끄러움과 고요함. 오늘은 끝까지 가볼래요? 아니요, 저는 안 갈래요. 왜 안 가요. 희주와 주호는 실랑이를 한다. 희주가 먼저 간다. 주호가 뒤따른다. 물이 흔들리고 물이 휜다. 딱 그만큼 몸이 흔들리고 몸이 휜다. 떠오르는 몸. 가라앉는 몸. 물을 밀어내는 만큼 밀려가는 몸. 밀어내는 만큼의 무게. 딱 그만큼 두 사람은 손안에 들어오는 물을 만진다. 움켜쥔다. 갈 수 있는 만큼 간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중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이들이, 나를 포함한 우리가 이상하고 잘못한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갈 수 있는 만큼 가고, 밀어내는 만큼만 밀려가도 괜찮다고 전하고 싶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희주와 주호가 처참한 수영 실력에도 낙담하지 않고 열심히 연습했듯이. 뒤틀린 사랑이었으므로 그것을 전하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사랑을 말했던 희주처럼. 공장 사람들이 나설 때까지 몇 번이고 기계 전원을 껐던 주호처럼. 우리는 갈 수 있는 만큼 가도 괜찮다. 그것이 사회의 기준으로는 한 발짝이라 할지라도 손안에 들어오는 만큼의 물만 움켜쥐어도 괜찮다.

 

어차피 멸망할 세상, 그까짓 것.

 

 

[변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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