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내가 아직 당신의 흥미로운 세계였을 때

글 입력 2023.07.1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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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시작하는 문장




“내가 아직은 당신의 흥미로운 세계였을 때”

 

 

어느 날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소설을 쓴다면 그 중 하나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이렇게 찾아오는 문장들이 종종 있다.


나는 보통 하나의 문장으로부터 출발해 마음속에 담아둔 추상화된 감정을 문장으로 해독하고 해설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간다. 그래서 어느날 문득 찾아오는 이런 문장들은 나의 뮤즈이자 영감이다. 마음속으로 들어와 꽂히는 문장들을 사랑한다.


그 중에서도 나는 언젠가 내가 쓸 그 소설이 이 문장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소설가들 중에는 어떤 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어서, 마지막 문장이나 첫 문장을 발화하고 싶어서 글을 쓰고 그에 맞는 상황을 창조해내고 그 장면을 향해 달려가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까 그리 드문 일은 또 아닐 것이다.


아직은 당신의 흥미로운 세계였던 어느 시절로부터 무언가가 바뀌었고, 그로인해 또 다른 무언가가 시작되었다고 은연중에 믿는 걸까. 나는 자꾸만 그때의 그 자리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곤 한다.


아직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이 문장으로부터 시작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은 나를 거쳐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질문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 문장으로부터 출발해 어디로 가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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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군가 누구에게


중학교 때, 한 친구가 두꺼운 책 한 권을 가져오더니 하루종일 그것만 읽기 시작했다. 좋아하던 축구도 나오지 않고 수업시간에 잠도 자지 않고 교과서 밑에 숨겨 하루종일 읽어댔다. 그러다 선생님한테 걸려 압수당하는 날에는 울면서 교무실로 달려가 한두시간 팔을 들고 벌을 선 후에 다시 받아오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조금 이상했던 거다. 아니 저 책이 대체 뭐길래 책과는 담 쌓고 지내던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하는 건지. 호기심에 우리가 뺏어온 책의 제목은 ‘다크메이지’, 판타지 소설이었다. 그새 그 두꺼운 책을 3권까지 끝낸 친구는 흔쾌히 반 친구들에게 앞 권을 대여해줬고 그렇게 우리 학교에는 판타지 열풍이 불었다.


며칠만에 그 분위기는 옆 반까지도 퍼졌고 우리는 등장인물 중에 누가 더 강하니, 어떤 장면이 더 명장면이니 하는 논쟁들로 시끌시끌했다. 몇 명은 만화방 단골이 되고 또 몇 명은 장기연체와 훼손으로 만화가게 형한테 자주 혼나는 신세가 됐다.


너나할 거 없이 집에서도 새벽까지 판타지 소설을 탐닉하던 시절이었다. 판타지 세계는 농구를 좋아했음에도 성장기에 우리 키가 더 크지 못하게 만들었던 주범이었다.


그 즈음에 유행했던 기타도 마찬가지다. 누구 하나가 가져와 사물함 뒤에 올려둔 기타가 선생님 눈에 띄었고, 그 녀석은 수업시간마다 작은 순회공연(?)을 마친 후에 20명이 넘는 친구들이 기타를 사게 만들었다.


흥미롭다는 건 그렇다. 이상하게도 사람을 건너 퍼져나가고 무언가를 변하게 만들곤 한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려 또 다른 것으로 분화시키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꾸만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눈을 못 떼게 만드는 사람, 그리고 불쑥 찾아와서 마음을 뺏어가고 타인에게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놓는 사람. 지겨운 내 안에는 없는 흥미로움을 품고 자기 안에 발을 들여놓게 하는 사람이 있다.


흥미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건, 그리고 누군가에게 흥미로운 존재가 된다는 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일이다. 그건 정말 불가피한 사건에 가깝다. 우연히 불어오는 어떤 바람에 맞춰 우리는 누군가가 소중해지고, 누군가에게 소중해지면서 하루를 쌓아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각자에게 잊을 수 없는 마음들을 새기고 흩어진다. 나는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흥미로운 세계가 되는 일을, 누군가 누구에게 특별해지고 불가피한 존재가 되는 일을 자주 상상하고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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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흥미로운 세계가 된다는 건



흥미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것도 아주 즐거운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흥미로운 세계가 되는 경험은 또 다른 의미에서 특별하다. 별빛이 박힌 눈으로 바라보는 표정들을 보다보면 자꾸만 더 좋은 세상을 선물해주고 싶어진다. 그 사람의 시선을 빌려 내 안에 스스로를 긍정하고 그 사람의 기대에 기대어 자꾸만 더 나은 사람이 되고싶어진다.


내가 되고싶었던, 그러나 그런줄도 몰랐던 어떤 나의 모습을 그 사람과 있을 때 찾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낌없이 표현하고 마음을 쏟는 자신을 보면서, 무한도전에서 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 나 이거 좋아하네?’하고 말하던 장면처럼 어 이거 내가 되고싶었던 모습이네 하고 외치게 되는 날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분명 ‘내가 당신의 흥미로운 세계였을 때’가 있었다. 나는 그런 시간을 생각한다. 각자가 떠올릴 장면은 전부 다르고 고유한 것이겠지만 그건 정말 신나는 경험이다. 나를 흥미롭게 바라봐주는 그 시선에 기대어 또 다른 나를 찾을수도 있으니까.


흥미롭다는 건 내 안에 없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거다.

 

하지만 흥미의 그런 본질적인 속성은 결국 그 끝과도 연결되어 있는게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완벽해보였던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순간 그 완벽함에는 결점이 생기고(완벽한 사람이 나를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그 사람은 더 이상 내가 좋아할만한 사람이 아니게 돼버리는 것이다.


보통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일일텐데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잘 모르기에 사랑에 빠지기도 하니까. 사랑의 상대든 연예인이든 화려한 무대 뒤의 뒷모습과 생활은 어느 정도의 매력이 되기도 하겠으나 여전히 어느 정도의 환상이 유지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대상을 낭만화 할 수 없다.

 

어쨌든 흥미로움에는 내가 상상하고 나의 이상으로 채워넣을 수 있는 여백이 없으면 성사되기 어려운 속성이란게 존재하나보다. 사람뿐 아니라 취미도 일이 되는 순간 잃어버리게 되는 즐거움이 있고, 멀리선 좋아보이는 관계나 생활에도 깊이 관여하게되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현실이 있으니까.


그러니 반대로 사람들을 떠나가게 만든 것은 서두르게 너무 많은 민낯을 드러낸 나의 잘못도 있을 것이다. 너무 쉽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많은 것을 보여준 나머지 예측하기 쉬운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흥미로움이란게 길게 유지될 수 없고 쉽게 휘발되는 감정이라고 해도 자꾸만 그 시간들을 떠올린다. 그래도 그 시간들로 인해 스스로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곤 하니까. 내가 지나간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고 힐끔거리고 미화하며 추억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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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흥미로웠던 세계 



최근에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자기는 외로움을 느껴본적이 없다고 했다. 얼마 전 제주도 한달살이를 하러 가서 혼자 지내보고 나서야 외로움이 뭔지 조금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긴 (너는 예쁘니까)주변 사람들이 너를 가만 뒀을리가 없지 하는 시시한 농담을 던져두곤 눈앞에 놓인 바닐라 라떼를 들이켰다. 입이 조금 썼다.


대학교때 아는 형이랑 같이 ‘몰랐다면’이라는 제목의 자작곡을 쓴 적이 있다. 따사로운 아침햇살을 맞으며 여유롭게 커피를 내리고, 그늘 밑에서 기타치고 노래부르면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저녁에는 좋아하는 책과 콘텐츠에 몰두하고 글을 적어내는 밤. 물론 내가 사랑하는 순간들이지만, 몰랐다면 어땠을까. 이런 시시한 내용을 가사를 가진 곡이었다.


그냥 술 마시고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리고 싶은 날들이 있었다. 미리 철들지 않고 친구들 사이에서 뛰어놀고 거친말을 내뱉으며 싸우면서 크고싶던 어린시절이 있었다. 너무 미리 철들어버린 누군가의 삶을 왠지 영상과 노래로 아름답고 처연하게 담아내 위로하고싶었던 어느 날에 만들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며 그 노래가 생각이 났다.


결국 나와 끝까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고 누군가의 목적으로 대상화된 삶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면 해롭다는걸 모르지 않지만 나는 보편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싶다.  누군가 욕망할만한 존재가 되고싶다. 어딜가든 예쁨받고 사랑받고 싶고, 그 마음이 자기확신 없이 타인에 의지하는 불안이나 집착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그럴만한 근거로써 객관적으로도 스스로 납득하기에도 꽤 괜찮은 생활양식과 인격과 취향을 가지고 싶다.


다시 말해 나는 당신들에게 언제나 ‘흥미로운 세계’이고 싶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싸우고 싶었다. 인생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흘려보내지만, 내 안에 들어온 사람들 때문에는 쉽게 전전긍긍하는 나는 좋아하는 그 사람에게 아웅다웅대며 서로를 할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서고 싶었다. 싸울만큼 소중한 존재가 되고싶었다.


그렇지만 마음같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언제나 좀 더 보고싶은 마음이었는데 어려웠다. 일상과 자신을 한 달씩이나 구태여 분리시키는 경험이 아니면 외로움을 느껴볼 일도 없는 그런 삶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삶의 결을 매만지며 살아가야 하는 삶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가지각색의 이유로 서로를 떠나고 싸우고 화해하고 멀어지고 또 서로를 그리워하고, 사람한테 상처받고 또 사람에게 기대고 서로를 흥미로워 하고 또 누군가로부터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흥미로운 삶.

 

어느날 서로가 흥미로웠던 누군가와의 이별 이후에 메모장에 ‘들어간 적 없는 세계에서 추방당한 기분’이라고 썼는데, 우리가 서로를 떠올리는 일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당신들을 추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때가 오면 나는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저 첫문장의 뒷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내가 아직 당신의 흥미로운 세계였을 때’를 지나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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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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