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둠과 빛을 잇는 발자취 - 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

글 입력 2023.07.1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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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허용하는 특유의 비일상적인 쾌락은 여행을 ‘여행’으로 만드는 필수적 조건처럼 느껴진다.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일상의 잡념을 씻어내고 마치 새로운 존재처럼 행동할 수 있는 망각의 일종.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삶의 누적적인 시리즈라기보다 스핀오프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것이 무 자르듯 나뉠 수 있는 것이겠냐만은.


말하고 싶은 건 여행이라는 몇 안 되는 소중한, 굳이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떠나는 순간은 우리의 행위를 자연히 ‘밝은 곳’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여행이란 세계관 속에서 일상의 ‘무겁고 어두운’ 감각은 쉽게 유보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비건 지향인으로서 내 의지가 반영될 수 있을 때는 육식을 지양하고 있다. 여행할 때 이 기준은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여행지에서 육식이 아닌 음식을 찾는 것은 특히 더 어렵거니와 그 수고스러움이 여행의 평온을 생각보다 크게 방해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행인이 늘어난다면 일종의 죄책감 역시 분산되어 각종 일회용품 소비, 극단적인 냉난방은 기본이고 무엇이든 나의 편안함을 위한 선택을 먼저 하게 된다. 그것들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행하는 스스로를 보고 이따금 놀라기도 한다. 만약 여행에서 이런 죄책감과 책임감을 떠올리는 자가 있다면 그이는 의심 없이 별난 여행가라고 불릴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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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의 저자 양재화는 ‘별난 여행가’의 기준에 부합한다. 이름마저 어두운 다크투어를 저자는 “죽음과 비극에 관련된 역사적 장소를 여행”하는 것으로 “학살 현장 또는 대규모 재난이 일어났던 장소”를 보다 진지한 관심을 갖고 탐방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어두움에 관한 이야기라면 접근할 시도조차 없이 달아나 버리는 경우가 많은 듯한데, 하물며 인간사의 추악한 면모와 여행의 결합이라니. 가능한 한 밝고 긍정적으로 사고하라는 말이 당연한 위로와 조언으로 인식되는 시대에서 기어코 환희와 편안함의 자리에 ‘어두움’을 끼워 넣는 이의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 너무도 다른, 아니 너무나 달라서 그이의 ‘여행’에 호기심과 상상을 더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 


공감도 학습이 필요하다는 그이의 말처럼 양재화의 다크투어는 결국 ‘어두움’이 또 다른 모양의 ‘빛’으로, 빛이 또 다른 모양의 어두움으로 이어진다는 역동성을 알려주는 듯했다. 


빛만을 좇을 때 어두움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어두움과 빛은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정반대의 상태이자 가장 맞닿아 있는 조건이 아닌가. 어두움을 이해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빛의 형상을 더 폭넓게 만들 수 있는가. 무엇보다 어두움 역시 입체적인 존재인가. 


양재화는 쉽게 떠올리지 못하나 고민할 필요가 다분한 질문을 여행의 형식을 통해 자연스레 제시한다. 그이가 소개하는 장소는 아르메니아, 아우슈비츠, 보스니아, 캄보디아, 칠레와 아르헨티나, 제주다. 지리학적으로도 시대적으로도 너무나 다른 지역과 사건이 ‘인간’과 ‘제노사이드’라는 키워드로 교집합을 이룬다는 사실은 꽤 께름직하다. 


이 학살의 교집합이야말로 다크투어라는 존재의 이유가 아닐까. “도대체 지금 와서 누가 아르메니아인 절멸을 이야기하는가?”라는 히틀러의 말이 홀로코스트의 발단이 됐듯 해결되지 않은 제노사이드는 또 다른 제노사이드의 합리적 증언이 된다. 역사를 잊은 자에게 미래는 없다는 클리셰는 여전히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힘의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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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화는 장소와 그것이 풍기는 분위기까지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인 묘사, 풍부하고 깊은 자료를 기반으로 한 친절한 서술로써 독자를 낯선 땅으로 초대한다. 예측할 수 있듯이 그의 언어는 배제가 아닌 포용에 가깝다. 잔혹사를 몰랐다는 무지함을 책망하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앎을 어떻게 내 삶에 위치시켜야 하는지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함께 고민하기에 그렇다. 


많은 제노사이드 현장을 방문한 그이조차 자기 여행의 이유와 의의에 막연한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대체 무엇을 상상하고, 바라고 그 장소들을 찾았는지, 자기 발자취가 어떤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이 역시 완벽히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여행을 계속할 뿐이다. 


다만 흔들리는 그이의 언어가 확고해지는 순간이 있다. 제노사이드가 “어느 날 우주에서 떨어진 미치광이 몇 명이 저지른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어떤 환경과 조건이 맞아떨어졌을 때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다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할 때다. ‘희생자들’이라는 타자가 사실 자신과 같은 인간이자 저마다의 세계를 가진 보통의 개인이었음을 깨달았을 때다. 


여행의 선구자로서 단 한 순간 자기 경험을 으스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이는 단연코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 안에 내재한 어두움과 빛의 공존을, 그것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모순을, 이런 보편성을 지닌 인간의 연결과 책임을 밝히는 데 쓸 것이다.


막연한 숫자, 유리된 언어로 표현된 이들의 구체적인 이름과 삶을 되찾는 일은 결국 우리가 우리로서 엮이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서로를 향한 폭력에 얼마나 중독되어있는지, 그러면서도 서로를 치료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는지를. 왜 이 책에는 시작과 끝이 있을 수 없는지 말이다. 


양재화는 결국 제노사이드를 이미 끝나버린 사실이 아닌 끊임없이 변하고 살아있는 맥락으로서의 이야기로 전환한다. 이는 단편의 스핀오프로 치부되어온 인간사의 어두움을 누적된 시리즈로 편입시키려는 각고의 노력과도 같다. 그를 통해 어두움이 빛과 유리될 때 빛은 결코 그 임무를 다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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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재편찬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낀다. 이 작업이, 이런 글이 대체 어떤 것을 이룰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수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책이 덮일 때까지도 끝내 하지 못했다. 그 질문조차 시간 속에 희미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흔적이 분명 남으리라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는 어느 순간 무심한 걸음을 멈칫하게 하는 거슬리는 무늬가 될 것이다. 그 거슬림이 바로 어떤 시작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아주 옅고도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명백한 증언이자 가냘픈 믿음.


왜 그렇게 예민하냐고, 왜 굳이 세상을 아름답지 않게 보냐는 말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건 어쩌면 누구보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싶어 하는 자의 칠흑같이 빛나는 몸부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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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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