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깊은 수렁에 드리운 한 줄기 햇살처럼 [영화]

영화 <말 없는 소녀>
글 입력 2023.06.13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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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영화 ‘말 없는 소녀’의

내용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 코오트는 ‘말 없는 소녀’다. 남들에 비해 눈에 띄게 말수가 적다. 아버지인 댄의 입을 빌리자면 어디서나 이방인처럼 겉도는 존재다. 집은 아이가 편안함을 느껴야 마땅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코오트는 집에서도 침묵을 유지하며 다소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코오트는 혼자 집을 뛰쳐나가서 넓은 숲속으로 숨는 것이 익숙한 듯하다. 시간이 지난 후, 가족이 찾자 몰래 집으로 들어와서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그러고는 다시 숨는다. 아이에게 불친절한 어머니 메리와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 댄으로 인해 매번 위축된 탓이다.


코오트네의 살림은 가난하고 건사해야 할 식솔들은 많다. 메리는 막내 동생을 돌보기 바쁘고 댄은 경마 중독에 몰래 외도까지 한다. 코오트는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지만, 비밀로 해야 한다며 다그치는 댄 때문에 항상 주눅 든 모습을 보인다. 학교에서도 도시락을 제대로 챙겨가지 못해 옆자리 학생의 우유를 몰래 훔쳐 마시며 눈치 보기 바쁘다.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코오트는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짐짝 같은 취급을 받는 존재다.


많은 형제자매를 감당하지 못했던 댄과 메리는 방학 동안 코오트를 먼 친척의 집에 맡기기로 한다. 물론 당사자의 의사는 전혀 묻지 않은 채다. 그렇게 코오트는 메리의 친척인 아일린과 숀 부부의 집에 보내진다. 어린 나이에 낯선 친척의 집에 맡겨지는 게 좋을 리 만무하지만, 어차피 자신에게 발언권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소녀는 이번에도 무표정으로 침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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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오트의 침묵이 단지 부모의 억압에 의한 심리적 위축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강압적인 환경 아래서 자랐던 코오트는 아무도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과,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혼란스러운 집안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알아차렸을 것이다. 말 없는 소녀가 되는 것이 코오트가 택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선택지다.


그런 소녀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말과 마음을 경청해 주는 사람이 생긴다. 아일린은 낯선 환경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지내야 하는 코오트가 불편하지 않도록, 그녀의 상태를 세심히 살피고 성심성의껏 신경을 기울인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코오트를 씻기고 머리를 빗는 방법을 알려주며, 식사를 대접한 후에는 이부자리를 직접 깔아주기까지 하면서 따스히 환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코오트가 아일린의 집에서 보다 빨리 안정을 찾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집에서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해야 했던 반면, ‘여기는 비밀이라는 게 없다’며 말하고 싶을 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코오트를 안정시켜준 아일린 덕분이다. 아일린의 다정함과 솔직함은 그렇게 코오트의 상처를 보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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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색했기 때문인지 혹은 죽은 누군가의 흔적이 아른거렸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코오트에게 잘 다가가지 못하고 무뚝뚝하게 굴며 서툰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서로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둘 사이에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숀은 코오트를 곁에 두고 보살피며 함께 목장을 청소하거나 넓은 숲길을 달리는 등 작은 추억들을 쌓아갔다.


사실 아일린과 숀에게는 수렁에 빠진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어린 아들이 있었다. 코오트와 비슷한 나이대였다. 부부가 처음 코오트를 마주했을 때는, 그녀를 죽은 아들 대신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코오트에게 아들의 옷을 입히는 아일린의 행위가 그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이내, 아일린과 숀은 코오트의 존재를 통해 마음 깊이 묻어뒀던 아들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제대로 직면하면서 코오트를 오롯이 코오트로서 바라보게 된다. 솔직하고, 따뜻하고, 다정한 코오트의 성정이 외로웠던 부부의 마음을 다독이며 치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코오트가 아일린과 숀의 집으로 오던 날. 차의 뒷좌석에 가만히 앉아 복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소녀에게, 우거진 숲을 뚫고 한 줄기 햇살이 살며시 스며들었다. 아무도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어둡고 침울한 세상 속에 잠겨있던 작은 소녀한테 부부의 존재는 따스한 햇살이었을지도. 그리고 소녀 역시 부부에게 그런 존재였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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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오트 그리고 아일린, 숀 사이에 싹튼 우정과 사랑은 말보다는 마음의 교감을 통한 것이었다. 상대의 표정을 세심히 살피고, 상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이고, 상대의 곁에 머물러 주는 것.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다정한 시선과 경청이 위로가 될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유를 억압당하고 존재를 부정당했던 소녀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렇게 위로와 사랑을 느꼈다. 자신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닿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애써 말을 아꼈던 소녀는 타인에게 다정한 말과 웃음을 건넬 줄 알게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코오트는 자신의 의지로 집에서 뛰쳐나와 아일린과 숀이 탄 차를 향해 힘차게 달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코오트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 마디에는 미처 말로 전하지 못했던 진심이 가득 담겨 있다. 코오트는 드디어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홀로 달려갈 준비가 되었다. 그 모든 것은 아일린과 숀의 사랑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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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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