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일기를 쓰는 이유 [사람]

공존하는 불안을 떨쳐내는 방법
글 입력 2023.06.0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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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방송에서 일기를 오래전부터 꾸준히 써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내 기억 속 마지막 일기는 빳빳한 파란색 종이의 충효 일기가 전부였는데. 매일 선생님의 도장이 필요했던 일기장은 언젠가부터 내 방에서 흔적을 감췄고, 더는 내 삶 속에 일기라는 존재는 들어오지 않았다.

 

2021년 1월, 내가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한 날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다거나 어릴 때처럼 매일 꾸준히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 해도 ‘새해 첫날이니까’ 정도를 외치는 게 전부일 만큼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날그날의 내 감정과 기분을 기록하고 싶었고, 마침 그 시절의 나는 글쓰기에 한창 꽂혀 있었기에 생각을 자유롭게 정리할 방법을 실행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기는 6개월가량 하루도 빠짐없이 지속되었고, 이후에는 못해도 2-3일에 한 번씩은 글자를 끄적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루는 과거의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궁금해 앞에서부터 넘겨봤다. 그때 알게 된 두 가지 사실이 있었는데, 하나는 일기를 쓰는 유형이었다. 인터넷을 보다 보면 일기를 쓰는 유형이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사건을 위주로 작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을 위주로 작성하는 방법이었다. (요즘 말로 치면 MBTI 상의 S와 N의 차이라고도 한다) 나는 완벽한 후자에 가까웠으며, 그날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우울했던 걸까 싶을 만큼 철저히 감정과 기분과 생각 정리에 초점을 맞추어 작성했었다.

 

두 번째는 내 일기장이 암흑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일기장 속 내 모든 기분은 우울함과 불안함투성이였고, 대부분의 결말은 ‘이젠 안 그래야지’, ‘난 왜 이럴까’, ‘내일은 달랐으면 좋겠다’ 등의 불안함을 직시한 데서 온 마음뿐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괜스레 입술이 삐죽 나왔던 이유는 아마도 나는 나 자신에게 흑백 세상만 허용했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사실을 인식한 이후부터는 나름대로 밝은 내용을 담으려 노력했다.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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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현실 생활이 바빠지면서 잠시 일기를 잊고 지냈던 몇 개월이 있었다. 그사이에 난 친구들과 우연히 들른 소품샵에서 냅다 일기장을 새로 구매해 버렸다. 새해와 같은 기념일은 아니었지만, 전시된 일기장을 보니 암흑 같은 일기장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기쁨과 슬픔이, 희망과 절망이, 시작과 끝이, 도전과 포기가 모두 들어간 다채로운 일기를 쓰고 싶었다. 그날 밤 서랍 안 깊숙이 자리한 절반도 채 쓰지 않은 초록색의 양장본은 쓰레기통으로 향했고, 노란색의 화사한 양장본만이 나를 반겼다.

 

그러나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서운 탓일까, 내 일기는 여전히 그때와 같았다. 매일 꾸준히는 쓰지 못했어도 가끔 꼭 기록해야만 했던 나날들이 있었다. 하루의 끝에 글로 정리해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던, 당장이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우울함에 잠식될 것 같았던, 머릿속을 헤집는 생각들을 활자로 풀어내지 않으면 펑 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던, 그런 때가 되면 난 마치 일기장이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듯 허겁지겁 찾곤 했다. 내 일기가 줄곧 불안과 우울로 가득했던 이유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글자로 써내려 가며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한 노력 때문이었음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저마다 각자가 지닌 불안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나는 늘 불안과 공존했다. 너무 행복할 때는 지속되지 않을 행복에 불안했고, 너무 슬플 때는 감당하지 못할 우울에 불안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일기에 써내려 가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해소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나의 노란 일기장에는 흑백 세상과도 같은 불안과 우울이 덕지덕지 묻어 있지만,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내 일상의 색이 다채로워지려면 너무 많은 회색은 필요 없으니, 적당량을 일기에 덜어내는 셈이라 치자.

 

그래서 오늘 내 일상에 회색빛은 얼마나 있을까. 아, 다행히 별로 없는 듯하다. 이 정도는 오늘의 내가 안고 가도 되겠다.

 

 

[지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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