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장 불안정한 도형, 슬픔의 삼각형 [영화]

미간을 펴고 보기 어려운 코미디
글 입력 2023.05.2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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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평등. 21세기 최우선시되는 인류의 가치. <슬픔의 삼각형>은 그 평등의 아이러니함을 비꼬는 블랙코미디다.

 

저가 브랜드로 대표되는 H&M과 고가 브랜드 중 하나인 발렌시아가에 대한 모델들의 재빠른 표정 변화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임과 동시에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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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은 여러 평등의 문제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경제와 성의 위계에 주목했다.

 

특히 패션산업에서 모델 직군은 다른 직업에 비해 이례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은 경제적 지위를 누리는 곳이다. 임금은 배로 차이가 나고, 인지도가 큰 모델 역시 여성인 경우가 훨씬 많다.

 

그렇기 때문에 남주인공 칼은 잘 나가는 모델인 여자친구 야야에게 불만을 표한다. 자신이 모든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데에 불공평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일면 타당한 문제 제기로 보인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과거에 비해 크게 증가했으며 경제불황과 신자유주의에 따른 시장은 더 이상 고용 안정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시대의 이른바 '경제적 기둥으로서의 남성'은 크게 흐릿해졌다.

 

말하자면, 모두가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세상인데 예전처럼 남자가 여성을 '먹여 살리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시대가 변화했다. 과거 남성에게 요구되던 남성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당연히, 생각해 볼 만한 주제다. 페미니즘은 개뿔, 이라고 중얼거리던 칼의 한 마디는 그렇기에 일정 부분 수긍이 가는 대사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점이 하나 있다. 21세기에 성평등은 이미 이루어졌는가? 대개의 사람이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일부 직군을 제외한 다양한 직업에서 여전히 남성의 수입이 여성의 것보다 높은 경우가 많고, 경제뿐 아닌 사회, 교육 부분에서도 여전히 답습되는 문제들이 있다. 반대로,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생기는 불합리한 상황도 있다.

 

야야는 잘 나가는 모델이다. 칼은 그 정도는 아니다. 칼은 야야가 SNS에 올릴 사진들을 끝없이 찍어주고, 야야가 받는 혜택을 함께 누린다.

 

여성 모델은 왜 남성 모델보다 경제적으로 더 높은 처우를 받는가? 바로 이 질문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여성의 신체에 대한 수요가 남성의 것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은, 여전히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며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능력이 아닌 외모라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남녀 모델의 경제적 지위가 이례적으로 역전이 된 이유가 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오래된 차별에 근거했음을 깨닫고 나면, 칼과 야야의 다툼은 더 모순적이고 우습게 느껴진다. 페미니즘이라는 성평등의 흐름을 비웃는 칼은, 자신이 여전한 성차별적 관행에 의해 피해 보고 있는 것임은 모르고 있다.


특히나 야야와의 다툼에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엘리베이터를 막고 난폭하게 굴던 모습이 데이트폭력을 연상케 한다. 칼은 야야와의 관계에서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자신이 을이라고 인지하고 있지만, 야야가 보기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육체적인 관계에 있어선 그녀가 철저한 을이기 때문이다. 연애에서의 우위 선점이란 단 한 가지만을 고려할 수 없다.

 

'남성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해체되고 있다. 이는 진정한 평등으로 가기 위한 긍정적인 신호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렇게 흐릿해지는 남성성을 그리워하며 아직도 '마초', '강력한' 남성인 나를 어필하고자 하는 모습이 영화에서 발견된다.

 

엘리베이터 장면의 칼뿐이 아니다.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자 굳이 '암컷' 당나귀를 강조해 그것을 때려잡고 포효하던 남자들(이 대목에서 함께 자리에 있던 여성 캐릭터들은 환호하지 않았다.), 혹은 해명하는 것이라며 여성 리더에게 격렬히 항의하던 칼, 자신들의 여자친구로부터 관심 끌기를 성공한 별 볼 일 없는 부자에게 떨떠름해하던 칼과 디미트리의 장면이 그것이다.


모든 인간이 빈부와 성에 상관없이 평등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과시하며 남을 내려다보고 싶어 하고, 다른 한쪽의 우위에 서고 싶은 모순된 욕망. 자칫 무겁고, 첨예한 대립이 생길 수 있는 주제를 잘 조합해 <슬픔의 삼각형>은 우리를 실소하게 만든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미간은 찌푸려지는 것이다. 가상 스토리의 가상 인물들을 보고 있는 것임에도 현실이 느껴지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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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에 마땅한 금액을 지불하고 탑승한 부자 승객들은, 돈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들을 자기 발밑에 둔 듯 마음껏 부릴 수 있다. 그들이 미쳤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돈이 그것을 허용한 것이다. 한 술 취한 부자의 요청으로 모든 승무원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뛰어들어 즐기는 척을 하는 장면은 비록 극단적 사례지만 일상 속 곤란했던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특히나 자본주의 국가 태생의 말뿐인 공산주의자 선장과 구공산주의 국가 태생의 자본주의 사업가의 만담은 인상적이다. 이들은 스피커를 크게 켜놓고 여과없이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떠들며 시끄럽게 웃는다. 이때 선내 스피커 소유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갖고 저 삼각형의 꼭대기에 서 있는 이들은 그 어떤 말도 허용이 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게 비록 기상악화로 난장판이 된 크루즈의 탑승객을 불안에 떨게 하고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 내더라도, 돈으로 해결하면 그만이 아닌가? 자본은 모든 것을 합법적이고 정당한 거래로 둔갑시킬 수 있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것까지도 돈이 되어버린다.

 

하다못해 스피커도 필요가 없다. 그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고 들어줄 누군가가 있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가령 직원 중 하나가 날이 더워 상의를 탈의한 채 일을 한다는 작은 불만을 표해도 즉시 그 직원을 배에서 쫓아내 버릴 수 있다. 돛이 없는 데도 있다고 우기면 그 배는 돛이 달린 크루즈가 된다.

 

그렇다면 돈이 있지 않은, 삼각형을 떠받치는 가장 밑바닥의 두 꼭짓점 근처에 위치한 이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겐 말을 들어줄 사람도 없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잘려 나갈 뿐이다. 난장판이 된 객실에 무릎을 꿇고 청소나 해야 한다. 그뿐인가. 흔들리는 배의 식당 바깥에는, 높은 파도로 더러워진 만찬실의 창문을 대걸레로 닦아내는 누군가 있었음을 어떤 이들은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상류층의 삶이 고상한 클래식으로 가득하다면, 우리의 삶은 강렬하고 무자비한 메탈 음악으로 채워진다. 그마저도 클래식은 스피커로 모두에게 들리지만, 메탈은 오로지 내 귀에서만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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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 악화로 난장판이 된 크루즈 장면은 대단히 직설적이다. 기울어진 배에선 철저하게 신분이 드러나고, 더럽다 못해 역겨운 토사물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들 자본가는 '똥'을 판다. 말 그대로 진짜 똥이기도 하고, 전쟁을 사업 수단으로 여기는 똥 같은 짓을 하는 걸 수도 있다. 그리고 똥은 전통적으로 비료로 활용되어 우리가 먹는 음식의 밑거름이 되었다. 비료 속 영양을 식물이 흡수하면 우리는 그 식물들을 재배하고, 뱃속에서 소화되어 다시 거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료에서 식탁까지의 순환을 생각해 본다면, 이 자본가들은 자신이 만들어 낸 똥을 본인의 입으로 먹어버린 것이 되겠다. 돈이 많아 전 승무원들을 수영 놀이를 하게 시킨 바람에 음식이 상하고, 게으른 선장 때문에 엉망의 날씨에서 만찬을 즐기게 되고, 전쟁으로 장사를 했기 때문에 본인이 탄 배에 본인이 만든 수류탄이 떨어지고, 또 그 똥 때문에 본인들 절반은 죽어버리지 않았는가. 요즘 말로 표현하면 스스로 불러온 재앙, 스불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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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될 듯 말듯 유지되던 배가 허무한 끝을 맞이하고 살아남은 이들이 도착한 무인도에선 권력구조가 뒤집힌다. 이 땅의 정당한 리더는 메탈을 들으며 청소하던 밑바닥 출신이요, 도움 안 되는 이들은 똥으로 장사를 하던 자본가다. 더해 성별의 위계 역시 전복된다. 부계가 아닌 모계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것을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다층적 권력의 전복은, 결국 권력이란 사회의 구성 방식에 따라 뒤집어질 수도 있는 불안정한 것임을 의미한다. 영원한 것은 없고, 당연한 것도 없다. 그렇게나 부르짖던 평등은 원시사회로 돌아가야만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마저도 진짜 원시사회가 아니므로, 평등은 꿈과 같은 환상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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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상은 원이 아니다. 삼각형이다. 어떻게 뒤집어도 누군가는 위에, 어떤 이들은 밑바닥에 있다.

 

영화의 초반으로 돌아가 보자. 칼은 패션쇼에 참가한다. 평등에 대한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다는 이 패션쇼는 VIP를 모시기 위해 칼의 자리를 없애버렸다.

 

또한 쇼는 '낙관론을 가장한 냉소주의'라는 컨셉으로 진행이 되었다. 사실상 영화를 관통하는 표현이다. 우리는 정말 만인의 평등에 다가가고 있을까, 아니면 우리도 모를 만큼 아주 좁을 만치 뾰족하고 아래로 넓게 퍼지는 삼각형이 만들어지고 있는 걸까? 하는 물음이 서늘하게 목덜미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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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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