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피부가 더 이상 신체의 경계가 아닌 시대의 글 쓰는 사이보그 선언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05.1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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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피부가 우리 몸의 경계가 되어야 하며 다른 것들은 피부 속에 넣어야 몸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79쪽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 20세기 후반의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 앤 매카프리Anne McCaffery의 《노래하는 배The Ship Who Sang》(1969)의 주인공 헬바Helva가 두뇌에 중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기계 장치를 다는 수술을 받아 사이보그가 되는 과정을 보며 물었다.

 

왜 피부가 우리 몸에 경계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신체라고 부를 수 있는 물질은 도대체 무엇인가? 신체와 기계의 경계는 어디인가? 약 30년 전 해러웨이의 물음을 끌어와, 현대 사회의 사이보그로서 확장된 신체의 경계에 질문한다.


이제는 상투적 어구로 굳어진 ‘방구석에서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와 연결되는’ 초연결시대이다. 휴대용 스마트 기기가 개개인에게 보급되어 방구석을 벗어나서도, 걸어가면서도 하다못해 화장실을 갈 때도 우리는 세상과 소통할 창구가 존재한다. 과도하게 연결된 투명사회 속에서 우리의 손은 얼굴을 대신하고, 우리의 공간은 사적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양상을 띤다. 그렇게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는 경험은 과거의 신체 개념과 신체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을 지나고 있다. 신체를 규정하는 정의가 피부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머리카락도 모근이 피부 안에 박혀 있다), 사람이 한 번 머리카락을 빗을 때 머리카락 안에는 나의 신체와 나의 신체였던 것이 함께 섞여 있다. 모근이 두피에서 떨어진 머리카락은 신체와 단절되는 그 순간 버려야 할 것, 신체가 아닌 것이 된다.

 

초연결시대의 개인은 언제나 인터넷과 접속되어 있다. 우리는 노트북이나 PC를 이용하여 일하고, 글을 쓰고, 스마트폰을 든 채로 끊임없이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한다. 떨어지지 않는 연결 속에서 우리의 머리카락이 신체였던 것이라면, 스마트폰도 신체였던 것이 되는 것이 맞지 않은가. 스마트폰과 우리의 피부가 접촉할 때, 우리는 사이보그가 된다. 우리는 인간의 신체와 첨단 과학기술의 집약체인 기계가 결합한 사이보그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 신체의 경계는 손쉽게 피부를 넘어선다. 사이보그는 자신이 사용하는 과학 기술에 따라 서로 다른 신체를 얻으며, 그들의 신체 경험은 그들은 물리적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원거리 이동이 자유롭다. 그렇게 사이보그는 단수의 ‘하나의 사이보그’가 된다. 더 이상 하나의 인간종으로 인간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인스타그램을 이용하는 사이보그와, 트위터를 이용하는 사이보그는 각각 다른 경험을 하며 다른 몸을 형성하고 다른 세계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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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설화가 존재하지 않는 사이보그



사이보그에게는 계보가 없다. 사이보그는 유기체의 신체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그러므로 계통이 없다.


“사이보그는 포스트젠더postgender 세계의 피조물이다.”(20쪽) 사이보그는 ‘여성 됨female being’의 근거를 해체한다. “여성 ‘됨being’과 같은 상태가 없으며, 그 자체가 성과 관련된 과학 담론 및 사회적 관습을 통해 구성된 매우 복합적인 범주”(30쪽)이다. 가부장제와 식민주의, 자본주의의 사생아인 사이보그는 정치 신화 속의 집단에 속하게 되어 지배받고 제지받는다. 사이보그 여성이 과학기술로 신체를 확장하여 사이버 공간에 접속할 때, 과밀한 남성중심적 세상은 개인화된 사이보그들에게 각기 다른 과학기술 매체를 통해 다른 경험을 남긴다. 사이버 공간은 개인의 가치가 투영된 장소가 된다. 

 

이때 사이보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이종언어heteroglossia다. 사이보그들은 언제나 토착어로 글을 쓴다. 에덴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이보그의 신체는 순수하지 않으며, 이들은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 기원 설화에서 코드화된 이미지의 여성 신체를 재코드화decoding한다. 이때 여성 신체는 ‘이미지’다. 실재가 아닌 파편이며 재구성된 이미지이자 원본 없는 복사본이다. 

 

어디까지가 유기체이며 어디까지가 기계인가라는 질문은, 그러므로 어디까지 여성의 신체이며 어디까지가 ‘이미지’인가의 질문이기도 하며, 이것은 ‘남성/여성, 자연/문화, 진리/허구, 육체/정신, 거울/눈’과 같은 서구 사회의 정체성을 생산하는 획일화된 이분법의 구조를 전복하는 열쇠가 된다. 해러웨이는 주체/타자의 구분과 타자라는 집단에 속하는 개별의 통합성을 추구하지 않으며 사이보그로 아이러니를 만든다. “하나는 너무 적고, 둘은 오직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83쪽) 사이보그는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적 기술로 만들어졌지만, 여성을 해방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우리가 모두 사이보그라는 확장된 신체 경험을 통하여, 사이보그는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의 기원 설화가 작동하지 않는 자신의 영역을 본다. 

 

해러웨이는 남성/여성 이분법의 경계와, 그러한 판단으로 인하여 여성에게 부여되는 여러 부정적 은유 모두 인공적인 신화라고 생각했다. 그로스의 《몸 페미니즘을 향해》(꿈꾼문고, 2019)는 여성의 몸은 그 자체가 문화적 산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구의 플라톤 이후 이성중심주의가 무시하고 지워온 몸을 되살려 걸맞은 지위를 제공한다. 이 시대의 몸은 기호이며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므로 해러웨이는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의 오이디푸스 서사를 해체하고, 사이보그에게 레즈비언 뱀파이어 서사로서 괴물의 서사를 부여한다. 햇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만 살아가기에 사회에서 공간을 점유할 수 없고, 보이지 않으며,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괴물이며 사회의 기본이 되는 이분법의 경계선을 존재만으로 위협하는 괴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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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사이보그 되기



글쓰기는 “현대 정치 투쟁의 주요 형식”(72쪽)이다. 사이보그는 읽고 쓰는 능력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건 시대가 있다. 그렇기에 사이보그의 글쓰기는 투쟁이자 해방의 수단이며 “타자로 낙인찍은 세계에 낙인을 쥐는 도구를 움켜쥠”(72쪽)의 행위이다. 이때 사이보그가 사용할 수 있는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항하는) 기원 신화는 SF가 된다. 이 글쓰기의 목적은 타자화된 여성의 몸 이미지를 해체하는 것이다. 그 목적으로 경계선을 정의하는 권력의 전복을 꿈꾼다. 이들의 글쓰기는 총체적인 집단을 이루려는 노력이 없다. 이들은 “경계 및 경계의 구성과 해체”(84쪽)의 경험이 있다. 

 

이질적인 존재가 키메라 언어를 이용하여 글을 쓴다.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는 “남성 담론의 장으로부터 자신만의 언어를 개발하는 장으로 이동한 여자는 (……) 짐을 벗어 던져 버렸을 때의 엄청난 느낌을, 번역을 그만둘 때의 그 느낌을 안다”(조애나 러스,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 2021, 낮은산, 298쪽, 리치 재인용)고 말했다. 자신만의 언어를 개발하는 장(場)인 이종언어를 처음 접하는 사이보그의 느낌을 고백한 에이드리언 리치는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2020, 바다출판사)에서 대학 시절에 배운 유명한 대가들이 아닌 여성 선배 작가들에게 끌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이보그는 계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글을 쓰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계보학을 정립한다.


사회의 기본적인 이분법의 경계를 허물고, 스마트폰과 결합한 키메라로서 사이보그의 글쓰기는 어떠할까? 토착어, 이종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글 쓰는 사이보그의 글은 누구를 대상으로 쓰일 수 있는가? 그리고 쓰인 글을 이종언어 사용자가 아닌 이들도 독해할 수 있는가.

 

조애나 러스와 에이드리언 리치, 샬롯 퍼킨스 길먼, 도나 해러웨이, 주디스 버틀러, 스피박, 살롯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마거릿 캐번디시를 살피는 것이 지금 내가 정립하려는 계보학이다. 수없는 신화에서 허구를 재생산한 이미지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혹은 나의 의견을 번역 과정 없이 서술하기 위하여 사이보그는 투쟁의 방식으로 글쓰기를 선택한다. 이종언어는 학습이 필요하다. 글 쓰는 공간은 내가 건설한 뱀파이어 성안이다. 스마트폰으로 네트워크 속으로 확장된 신체 경험의 사이보그는 뱀파이어 성 밖 군중들의 존재를 안다. 그 존재들은 언제나 뱀파이어 성을 침략할 준비를 마쳤다. 김은주 작가는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2017, 봄알람)에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개념을 통하여 “‘여성’이라 자연스럽게 묶일 그러한 본질과 범주가 존재하는가?”라고 물었다. 이때 여성으로서 ‘우리’는 누구인가? 여성은 단수인가 복수인가? 여성의 얼굴은 대중이 되지 않는다. 여성들의 얼굴 또한 대중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이보그의 얼굴은 어떠한가? 단수의 사이보그가 모여 여러 명의 ‘단수의 사이보그’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언제쯤 그것을 ‘개별적 존재로 구성된 복수의 무리’로 인식할 수 있는가. 무리에서 언제나 지워지는 개별성의 존재인 사이보그는 그렇게 글쓰기를 한다. 글은 수많은 자소, 단어, 어절, 문장, 단락 들로 구성된 복수이지만 하나의 글이다. “하나는 너무 적고, 둘은 오직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83쪽) 그렇다면 셋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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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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