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탈레랑의 노래 - 뮤지컬 나폴레옹 [공연]

아듀, 나의 작은 거인이여
글 입력 2023.05.14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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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나폴레옹을 찾아 오랜만에 회기를 찾았다. 한창 취업준비와 아트인사이트 활동을 시작할 때의 나의 옛 동네, 많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나 부러 찾지는 않을 이곳, 공부하느라 다니던 스터디카페와 글쓰기 좋은 카페, 자주 들린 식당을 스쳐지나며 옛 기분에 젖었다. 회기는 참 고즈넉하고도 시끌벅적한 동네이다. 회기역과 경의선 철길을 기점으로 나뉘어 있긴 하지만, 한 개 권역에 경희대와 한국외대, 시립대가 다 모여 있는 동네이고 그만큼 수많은 젊은이들과 그들을 수용하기 위한 아주 넓은 원룸촌으로 이루어져 있다. 쇼핑할 만한 상가나 주점과 같은 위락시설도 그다지 많지 않지만, 늘 사람, 특히 젊은이가 많은 동네인 이곳은 그 특유의 조용한 벅적함이 좋다.


뮤지컬 나폴레옹은 평일엔 1회, 20시로 기획된 터라, 저녁 먹을 여유쯤은 있어 좋았다. 물론 그만큼 끝나는 시간은 뒤로 미루어지게 되는지라 조금 후의 밤, 대중교통이 끊기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음날의 출근 등의 생각들이 성가시게 떠오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리 뻔질나게 들낙거린 식당이었으나, 주인 할머니는 아쉽게도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유롭게 식사를 마치고도 남는 시간 동안에는 경희대 구석구석에 미리 알아봐 둔, 인적이 드문 곳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경희대 병원을 좌측으로 끼고 정면으로 곧잘 들어가 원형교차로를 기점으로 하면, 그로부터 너른 호수를 끼고 있는 본관 건물 사이는 아주 키 높은 나무들로 넉넉한 음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 권역이 경희대의 낭만적인 부분이라, 나는 생각한다. 봄에는 벚꽃이 저 위로 높다라니 매달리는 것을 보노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평화의 전당은 본관 옆으로 나 있는 가파른 오르막 위에 당당하니 서 있다. 첨탑은 없지만, 날카로운 기둥 및 화려한 기둥장식들,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고 있노라면, 아아 아무래도 이게 고딕양식인가 하는 그건 가보네, 싶어진다. 아름다운 건물, 그리고 한적하고도 고고하니 드높은 입지, 어슴푸레 저녁이 깔린 고지대에서 곧 있을 뮤지컬의 티켓과 일정을 가지고서 시내를 내려다보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오늘 뮤지컬은 서역 불란서에서 바다 건너 찾아온 인물들이 직접 연기를 펼친다더라. 내한 공연이 처음이라 내가 미리 생각해볼 만한 것은 그다지 없었지만, 그들도 공연의 전후로 하여 언제라도 이 풍경을 보노라면 무언가 흡족함을 느껴볼 법하지 않을까, 하고 공연장으로 들어선다.


*

 

서역 이 만 리 이국인들이 프렌치 언어로 펼치는 뮤지컬 나폴레옹은 참으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낯설긴 하나 그들의 생김새나 언어가 가지는 이국적인 면모는 오히려 나폴레옹과 탈레랑을 내 안에 그려보는 데에 적이 도움된다. 나폴레옹의 외양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키가 작으면서도 보무가 당당하다는 것뿐이었는데, 무대 위의 배우를 보면서 아, 딱 저와 같았을 것이다 하고 생각케 된다. 원어는 못 알아들을 것이었지만 탁월하다는 감상을 자아낸다. 조금 딱딱하게 말하자면, 남의 나라 일화였던 만큼 내 나라 언어로 들었더라면 약간의 이물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할 정도로. 양 언어 사이의 간격을 지워내는 것,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어색함은 완전히 떨쳐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마제스티"가 "폐하"로 바뀌는 때의 어색함이랄까. 내 안에서 폐하란 단어는 "폐에-하"와 같이 길게 늘여뜰이는 발음을 띠고, 언제나 붉은 용포를 입은 사람을 향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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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자막을 보는 것은 조금 어렵다. 평화의전당 극장에서는 자막이 좌우 측 스크린으로만 제공되고 있는데, 극장 연극 특성상 자막 자체가 번거로움이긴 하다마는 무대 위쪽에도 자막이 제공되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이를 대신하여, 평화의 전당이 마련해둔 음향시설은 가히 훌륭했다. 사전 보도자료와 배우진들의 인터뷰가 알렸듯, 물리적인 전율을 일으키는 수준의 기물이다. 말하자면 음파로 흠씬 두들겨서 표피로부터 전율을 감각하게 만드는 정도의 것이랄까. 대의, 혁명, 정복, 승리와 같이 나폴레옹 서사가 포함하고 있는 제재들은 대부분 전율과 어울리는 것들이라, 음향의 힘을 톡톡히 느껴본다. 민중의 지지 속에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는 장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거행한 즉위식의 장면은 아직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극중 주인공이자 주요 제재는 나폴레옹과 그의 서사이지만, 나레이터는 그의 외무장관 탈레랑이 맡는다. 무대 위의 나폴레옹을 보자마자 그가 모든 서사의 중심축,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관찰자이자 서술자, 이 서사의 귀속자인 진정한 주인공은 탈레랑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듀, 몽 페틷 지양", "잘 가게, 나의 작은 거인이여"라는 탈레랑의 독백으로 뮤지컬은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이 탈레랑의 회고와 서술이라는 것. 큰 키에 검은 착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매 빛나는 민머리와 대조되는 눈가 움푹한 음영의 카리스매틱,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불어의 우아함뿐 아니라 듣기 좋은 편안함과 서늘함이 공존한다. 어둠 속에서 진행되는 그의 독백이 내 눈을 곧바로 사로잡았다. 음흉하면서도 비밀스러운 느낌.

 

 

 

 

탈레랑은 분명 사랑할 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비열하고 음흉하고 거짓과 조작을 일삼는 사람, 그야말로 중상모략에 으뜸인 자, 스스로 그 누구도 믿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 전형적인 악당의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어딘가 신경 쓰이고 마음이 가는 사람, 주목과 집중을 사는 사람, 어쩌면 이것은 오로지 배우의 힘, 탁월한 캐스팅의 소산일지도 모르겠다. 뮤지컬 나폴레옹에 있어, 나폴레옹은 극이 존속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자 중심이라면, 탈레랑은 그 극을 이끌어가는 힘이요 동력이다. 실제의 나폴레옹 서사가 지니는바 비일상적인 업적들, 혁명과 정복은 1인칭으로 서술하기에는 남새스러운 일일 테며, 한편으로는 미화의 소지가 있다. 내가 내 입으로 나의 혁명은 어쩔 수 없었으며, 나의 정복은 이러한 대의를 가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의 모순과 딜레마는 어쩔 수 없는 것이요 나는 고통스러워라고 말해온다면 그 서사의 깊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극의 전반부, 정열적인 혁명가인 나폴레옹이 빛으로 나타난다면, 탈레랑은 줄곧 어둠이다.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기까지의 전개, 1막은 거듭하는 승리와 성공의 상승구조를 보이고 있으나, 그 서술을 탈레랑이 진행해나가는 것은 재미있다. 그건 마치 뱀이 멀찍이서 아담과 이브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모습과 같다. 그의 내러티브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암시하고, 나폴레옹이란 인물에 너무 깊이 매료되지 않도록 서사와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조율한다. 1막, 황제의 대관식까지의 상승구조는 인터미션을 거쳐, 과연 몰락을 향해 하강한다. 대의를 위해 달려나가던 정열적인 나폴레옹도 결국 황제에 즉위하고서부터는 일전의 순수함과 정열을 상실한다. 불의와 공포에도 굴하지 않던 그의 단단한 정신과 신념은, 권력자가 되고 난 연후엔 아집과 독선으로 탈바꿈된다. 시민과 혁명의 나라, 이 이데올로기를 전 세계에 퍼뜨려 이상적 세계를 건국하겠노라는 그의 신념은, 그의 야욕과 정복전쟁을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늘 승승장구해오던 그의 군대와 지략가로서의 면모는 그에게 패배의 두려움을 알려주지 않았고 워털루 전투를 끝으로, 그에게 예정된 몰락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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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랑은 그림자 속에 숨어, 언제나 나폴레옹을 바라보고 서술한다. 그를 조종하기 편한 사람이라고 우습게 생각하면서도, 작은 거인이라고 회고하는 것에서 그의 모순적인 마음이 엿보인다. 탈레랑은 나폴레옹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그를 경배하지 않았지만, 그를 사랑하였다. 단신에서 뿜어나오는 카리스마와 꺾을 수 없는 의지와 불같은 추진력, 혼란의 프랑스에게 잠깐이나마 제국의 꿈을 보인 사람, 정치가 탈레랑에게 그런 나폴레옹은 단순하여 우스운 사람, 그러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 분명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가고 난 비어버린 황궁에서, 탈레랑은 나폴레옹을 그리워한다. 만약 나폴레옹이 탈레랑의 뱀과 같은 신중함과 야비함을 듣고 더불어 모의할 정도로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자였더라면, 프랑스는 여전히 제국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이 외부로는 두려운 정복자이자 내부로는 권위의 상징인 황제로 굳건히 있는 동안, 내정과 외교에서 탈레랑이 종횡무진했을지도 모르지. 죽이 맞는 두 사람의 상상, 물론 그랬더라면 세계지도가 바뀌었겠지만.

 

 

"그는 내가 발견한 것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탈레랑에게 나폴레옹이란, 분명 가장 훌륭한 군주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절대 성군은 아닐 것이다. 오만할 정도로 압도적인 자, 절대자, 패자 覇者로써… 그의 오묘한 그리움, 어딘가 서늘한 애틋함이 좋았다. 그것이 발칙할지언정 가장 솔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활한 사람이 짓는 애호는 역설적으로 순수한 것이 되어 내 마음에 좀 더 깊숙이 다가온다. 그런 탈레랑의 입을 빌려 본 극이 자아낸 톤 앤 매너, 사람의 순수한 선의가 변질되어가는 모습을 드러내는 과감함, 혁명과 승리와 패배와 몰락이 함께 다루어지는 것이 좋았다. 나폴레옹의 영웅성뿐 아니라 인간적인 한계가 함께 다루어지는 것이 좋았다. 극은 끝났지만 아직 뮤지컬 나폴레옹의 기억은 선하게 남아 있다. 찬란하게 몰락한 황제의 옆모습과 어둠 속에 서 있는 탈레랑의 얼굴로.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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