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도트 그래픽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당신에게 [게임]

그래픽 노블과 게임의 새로운 가능성
글 입력 2023.05.0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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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는 두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는 날에 카페에 가는 사람과 술집에 가는 사람. 나는 한때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당시, 그리고 아마 지금도, 손님들이 가장 많이 주문했던 메뉴는 단연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는데, 그때마다 원두를 도장처럼 꾹 누르는 탬핑(tamping)이 유독 재미있었다. 바리스타에게 있어 탬핑은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아주 섬세한 작업이라지만, 알바생이었던 나는 그런 건 잘 몰라도 맛있는 커피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저 열심히 꾹꾹 눌렀던 것 같다. 어쩌면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꼭 탬핑을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나누는 그 모든 진지한 이야기에는 누군가의 용기와 진심이 담겨 있기에, 한마디도 허투루 듣지 않으려 꾹꾹 눌러 듣기 때문이다. 

 

반면 술집에서의 대화는 그 반대의 작용이, 한껏 뜨겁게 머물다가 날려 보내는 알코올처럼,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이야기들을 훌훌 털어 버리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술은 가볍고 카페는 무거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그렇다기엔 술잔에 털어 넣는 이야기들은 너무 무겁고 카페를 나서는 발걸음은 가볍기 때문이다. 확실한 점은, 두 장소 모두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놓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장소라는 사실이다.

 

카페나 바에서 누구든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갑자기 옆 테이블에서 너무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 와서 이목을 잡아끄는, 그래서 하던 일도 멈추고 한동안 숨죽여 몰래 이야기를 엿들었던 경험이. 그러다 보면 바텐더나 바리스타는 세상의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매일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이처럼 카페나 술집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공간인 동시에 이야기를 듣기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두 개의 게임은, 가상 세계 속 바텐더 혹은 바리스타가 되어 다양한 인물의 '사는 얘기'를 듣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또 다른 유형의 사람이, 이야기가 듣고 싶어지는 날 컴퓨터를 켜는 유형의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술을 섞고 삶을 바꿀 시간이군



게임 "VA-11 HALL-A: Cyberpunk Bartender Action"은 시내의 작은 바에서 술을 서빙하며 손님들의 고민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임이다. 이곳 '글리치 시티'는 첨단 기술이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고 부패한 정부가 기업의 지배를 받는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이다. 사이버펑크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글리치 시티'에는 안드로이드, 사이보그, 로봇으로 신체를 개조한 인간 등이 함께 살아가는데, 이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외형이나 성격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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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바텐더인 '질'이 되어 손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원하는 음료를 제조한다. 그렇지만 플레이어는 스토리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으며, 어떤 음료를 만드는가에 따라 엔딩이 달라지고, 특정 음료를 만들면 이벤트를 해금하거나 '카모트린'이라는 성분을 음료에 넣으면 손님을 더 취하게 만들 수 있을 뿐, 전반적으로는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관찰자 역할이다. 

 

따라서 이 게임의 매력은 스토리 그 자체에 있다. 세계관 자체는 매우 독특하지만, 바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고민은 우리 모두 한 번씩은 떠올려 봤을 법한 보편적인 인간과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나도 경험해 본 적 있어, 도로시.

그런... 존재론적인 의심과 위기. 어떤 게 진짜이고 아닌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함.

한두 달 정도였지만...

공황 발작이 일어나기도 했고, 뭔가를 '느껴보려고' 팔을 긁어대기도 했지.

하지만 공황 발작 때문에 아드레날린이 넘쳐서 긁는 게 느껴지지 않았고 덕분에 공포심은 더해갔어.


어떻게 극복했는데?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책을 읽었어.

"이 세상의 마지막 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 중 하나야.

어느 순간 책을 읽다가 울게 됐는데...

내가 '가짜'를 보고 울었다는 걸 깨달았지. 가짜 이야기와 가짜 등장인물들에.

나는 그것들이 가짜라고 해서 덜 소중하게 여기거나 하지 않았던 거야. '현실'이라고 해서 뭐가 다르겠어?

만약 네가 누군가의 상상일 뿐이라고 해도, 난 여전히 널 소중하게 여길 거야.

 

 

질은 이처럼 고민을 해결해 주거나 위로하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조차도 풀지 못한 과거의 인연으로 고뇌하는 인물이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질은 인격적 성숙을 거쳐, 마지막쯤에는 자신의 고뇌를 마침내 풀 용기를 갖게 된다. 이처럼 독특한 세계관 속 개성 넘치는 인물들에게 이입하다 보면, 플레이하는 시간은 결코 지루할 수가 없다. 

 

게임을 처음 실행하면, "이 게임은 편안한 상태에 한 잔 마시면서 과자를 손에 두고 플레이하시는 게 최고로 좋습니다. 편안히 게임을 즐겨주세요."라는 메시지가 플레이어를 반긴다. 이 메시지는 게임 '발할라'의 분위기를 요약해 주는 듯하다. 나 역시 종종 불을 끈 채 스탠드 하나만 킨 채 맥주 한 캔을 옆에 두고 게임을 즐기곤 했으며, 자극적이거나 중독적인 요소는 크지 않았지만 떠올리면 편안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플레이어는 마치 진짜 바텐더가 된 것처럼 바 BGM을 선택해서 재생할 수 있는데, 사이버펑크 세계관에 딱 어울리는 일렉트로닉 사운드트랙이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린다. 물론, 사이버펑크 장르 특유의 괴짜스러움, 일본 서브컬처 문화에 대한 낯섦, 몇몇 대사의 부적절성 때문에 호불호가 강력히 갈리는 게임이지만, 개성 넘치는 비주얼 노벨 인디 게임인 만큼 해당 장르에 관심이 있다면 플레이해 보기를 권한다.

 

 

 

트리플 샷 에스프레소 한 잔


 

도트 그래픽과 로파이를 애호한다면, 게임 "Coffee Talk"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도 최근 이 게임의 후속작인 "Coffee Talk Episode 2: Hibiscus & Butterfly"가 발매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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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하고 싶을 때 카페에 가는 유형과 술집에 가는 유형 중 나는 전자에 속한다. 그러나 24시간 무인 카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카페는 생각보다도 일찍 문을 닫곤 한다. 이 이야기만큼은 술 없이 꺼내고 싶은데, 하지만 늦은 밤 또는 이른 새벽이 되면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그래서 '커피 토크'의 심야 카페가 못내 부러웠다. 해가 지고 나서야 문을 여는 이 카페에는 메뉴판도 없다. 손님은 추천 메뉴를 묻고, 바리스타는 손님에게 오늘 어떤 기분인지를 묻는다. 이런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이지 몇 번이고 상상했다. 

 

개발사의 인터뷰에 따르면, 제작 당시 앞서 소개한 '발할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진행 방식 자체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발할라'와 마찬가지로, 플레이어는 바리스타가 되어 손님들의 고민을 듣고 차와 커피를 서빙한다. 그러나 이때 '발할라'와 달리 사전에 레시피가 주어지지 않아 진행하면서 레시피를 발견해야 하며, 특정 분기점에서 정확한 음료를 만들어야 해피 엔딩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손님의 요구사항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이 외에도 라떼를 만들 때면 직접 라떼 아트를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음료 제작 단계에서 게임 플레이적 요소의 소소한 디테일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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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이 게임의 가장 큰 차별화 요소는 시청각적인 만족감이다. 나는 종종 유튜브로 ASMR을 즐겨 듣곤 하는데, 이 게임은 진행하는 모든 순간에 그런 ASMR을 들을 수가 있다. 우선, 카페를 배경으로 한 만큼 늘 잔잔한 로파이 BGM이 흘러나온다. 또, 커피 내리는 소리, 스푼 부딪히는 소리, 잔에 물 따르는 소리, 비 오는 소리, 창밖 도로에서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등, 섬세한 음향 요소가 잔잔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더해 준다. 게다가 따뜻한 색감의 아기자기한 도트 그래픽은 레트로 감성을 좋아하는 플레이어라면 싫어할 수 없는 매력 요소이다. 

 

'커피 토크'의 세계관 역시 독특한 판타지 배경으로, 카페가 자리 잡고 있는 시애틀은 엘프, 드워프, 오크, 심지어는 외계인까지 어울려 살아가는 공간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다른 개성과 다양성의 충돌로 고민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종족 간의 차이로 집안이 결혼을 반대한다는 커플, 연예인인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윗세대의 아버지, 비건이라면서 피를 마시지 않고 동성의 친구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는 뱀파이어, 백지상태로 인간의 규범과 질서에 적응하는 외계인까지. 이들의 고민은 '커피 토크'의 시애틀이 아니더라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고민을 듣는 과정에서 생각할 수 있는 지점도 많았고, 그런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화합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이 게임의 제작 의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게임의 무궁무진한 가능성


 

비주얼 노벨은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일견 모호한 구석이 있다. 게임이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체력 바, 스킬, 퀘스트가 아닌 스토리라인을 감상하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게임 플레이적 요소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소개한 게임을 플레이하다가도 '이걸 대체 왜 하지?'라며 당혹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위 게임들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물론 자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제작자가 전달하는 이야기와 메시지 자체가 너무나도 즐거웠기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이에 대해 그럼 책을 읽으면 되지 않느냐고 질문할지도 모르지만, 비주얼 노벨 게임의 차별화된 매력은 액자 밖이 아닌 액자 안 1인칭 시점으로 직접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게임의 존재는, 게임이 단순 유희뿐 아니라 문화예술과 융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우리는 왜 게임을 할까? 사실 나는 어렸을 때 게임이 '나쁜' 것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들은 정서에 좋지 않다며 게임을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나 역시도 공부에 집중하면서 게임에 빠져 지내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게임을 사랑하게 된 나는 그런 생각이 낡은 것임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게임에 대한 편견은 남아 있으며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 이제는 게임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게임이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인식은, 물론 아예 틀렸다며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실제로 다수의 게임은 자극적인 데다가 중독을 유발하며, 플레이어 간 욕설이 난무하는 채팅창을 보면 정서에 악영향을 미치기는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게임을 통해 나타나는 역효과의 근원은 오히려 다르게 발전시키면 문화예술과의 융합을 통한 순기능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 근원은 바로 비교할 수 없는 '몰입감'이다. 사실 중독될 만큼 빠져들고 험한 욕설을 써 가면서까지 게임을 하는 것 역시, 플레이어가 어떤 방식으로든 게임에 몰입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문화예술에 있어서 이 몰임감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미디어 아트에서는 VR 기술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상 현실에서 실제로 들어와 있는 듯한 현장감이 완전히 새로운 예술적 체험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술은 거리 두기와 관조를 통해서도 실현할 수 있지만, 종종 몰입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도 표현하려 한다. 그렇다면 그런 종류의 예술에 있어서 가장 잘 들어맞는 장르는 엄청난 몰입감을 제공하는 게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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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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