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돌아오지 않을 순수의 시절, 클로즈 [영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글 입력 2023.04.20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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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주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변한다’는 사실 뿐이다.”

 

이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왜 변해야만 하는지, 그 의미를 열심히 부정하며 살고 싶었다. 소중한 것들은 오래도록 곁에 남아서 서로의 삶이 더 풍성한 행복으로 가득해지도록 도와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부정만 하는 것은 오히려 답보하게 할 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도 없음을 조금씩 깨닫는 요즘이다.

 

한 공간에서 함께하던 시절은 반드시 지나가고, 조금 더 먼 거리에서 서로를 응원해야 할 때가 온다. 나 혹은 내가 알던 사람은 각자의 고됨을 이기는 삶을 지속하며 예전의 그가 아니게 된다.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허울 뿐인 약속이다. 변한다는 사실은 분명함에도, 순수한 마음을 지키려는 의지와 표현이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유일한 힘이다.

 

성인이 되고 졸업, 취업 등 거창하지는 않지만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 꽤 커다란 선택의 연속이 바쁘게 지나가고 있는 몇 년 사이. 온 사회를 뒤흔들었던 몇 차례의 재난과 혼란 속에서도 순항하고 있는 척 열심히 닥친 일들을 헤쳐왔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어떤 마음은 점점 더 굳건히 닫히고 어떤 마음들은 새롭게 열리고 있었다. 대단한 듯 말했지만, 이를 테면 책임감의 무게는 늘어나고 변화에 대한 수용은 더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나의 주변은 비교적 안녕했으나 비로소 혼자가 아닌 관계를 통해 주고받는 힘과 그 책임은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친구들을 만날 때면 마음은 정말 스무 살 같다고 진심 어린 농담을 하지만, 어린 말과 행동으로 서로를 다치게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더 단단해진 신뢰로 서로를 응원하기에도 귀한 시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적인 듯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보편적인 이런 나의 이야기는 영화 속 형제 같던 두 친구, 레오와 레미에게로 자연스레 귀결된다. 평범한 듯 특별했던 둘의 관계가 어디서부터 무너져 흘러가기 시작했는지, 나는 왜 둘을 보며 슬픔을 감출 수 없었는지, 조금 더 읽어주시길.

 

 


영원히 시들지 않을 우리의 계절

제75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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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는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던 레오와 레미, 두 소년이 마주해야 했던 시리도록 아름다운 계절을 담은 드라마. 탁월한 감각과 감성으로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관을 창조하며 셀린 시아마, 배리 젠킨스, 션 베이커의 계보를 이어갈 차세대 감독으로 손꼽히는 루카스 돈트 감독의 신작이다.

 

제71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포함 총 4관왕에 올랐던 데뷔작 <걸>에서 정체성에 대해 세밀히 탐구한 그는, 차기작 <클로즈>를 통해 다시 한번 내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친구들로부터 관계에 대한 의심을 받기 시작한 이후, 마음의 균열을 경험하게 된 어린 소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타인과 특정 집단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갈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

 

감독 자신의 어린 시절과 10대 초반의 불안이 투영된 이 작품은 그가 탐구해온 정체성의 문제에서 확대되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모두의 한 시절을 건드린다. 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통해 인물의 변화하는 심리를 다채롭게 포착, 다시 한번 루카스 돈트 감독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으로 극찬이 이어지고 있다.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던 레오와 레미는 친구들에게 관계를 의심받기 시작한다. 이후 낯선 시선이 두려워진 레오는 레미와 거리를 두고, 홀로 남겨진 레미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고 만다. 점차 균열이 깊어져 가던 어느 날, 레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데…

 

 

 

10대의 순수한 잔혹함


 

형형 색색의 꽃들 사이로 자유롭게 내달리는 레오와 레미는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다. 서로가 서로의 전부인 듯 함께하기만 한다면 행복이 영원할 것 같았다. 등을 꼭 맞대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자거나, 꽃밭에서 장난을 치며 뒹구는 모습은 티없이 맑은 유년의 전형이었다. 중학교에 가도 별다른 것은 없을 줄 알았지만, 같은 반 아이들의 시선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친구 이상이 아니냐며 순수한 듯 던진 잔혹한 물음은 관계에 잔잔하게, 그러다 커다란 파동으로 혼돈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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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의 적을 두고 한편이 되어 싸우는 전쟁 놀이도, 함께 누워 자는 밤도 이제는 사라졌다. 남들이 말한 우정의 선은 레미에게 칼과도 같았다. 레오는 또래 집단에 적응하기 위한 당연한 수순이라는 핑계로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레미를 밀어내고 또 밀어냈다. 오보에를 연주하던 섬세한 눈과 손으로 열심히 레오를 좇던 레미는 형용할 수 없이 커다란 웅덩이에 빠진 듯, 세상과 레오로부터 멀어져갔다. 

 

 

 

유년 시절에 고하는 안녕


 

레미가 없는 학급 소풍을 다녀오던 날, 아침부터 느껴졌던 알 수 없는 불안은 레미의 죽음이 되어 눈앞에 다가왔다. 자신의 탓일까 두려워하고 회피할 수록 슬픔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소리내 말하지 않아도 스크린을 채우던 따뜻한 둘의 대화는 레오의 죄책감과 후회로 가득해졌다. 타인의 시선에 가장 예민한 십 대 초반, 이리저리 흔들리던 레오가 사춘기 특유의 소속감을 갈구하며 새로운 친구들 사이 엉성하게 자리잡는 모습은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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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학년이 되면 새로운 반에서 비슷해보이는 친구를 찾아 적당한 무리를 꾸려 일 년을 무사히 보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사회성을 길러야 한다는 이유로 원하지 않는 이들과 반강제적인 단체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가혹하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친밀함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배려와 친절만으로 유지되지 않는 관계는 고달팠다. 그럴 때에는 내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무엇 때문에 불편하고 힘든지 생각하면 의외로 쉽게 문제가 해결되기도 했다.

 

조금 더 일찍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고 솔직했다면 둘은 다른 결말을 맞았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레오가 되어 함께 후회하며 울었다. 서운하고 그리웠다고 왜 먼저 말하지 못했을까. 어린 나이에 겪기에는 너무 컸던 친한 친구의 부재를 어떻게 울지 않고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자신의 반쪽같았던 친구가 이제 돌아올 수 없다는 상실감을 과거에 묻고 단단하게 나아갈 수 있을까.

 

슬픔을 겪는 레오의 눈은 점점 그 전의 것과 달라져갔다. 이전만큼 환하게 웃지 않고 공허함과 불안이 어딘가 내려앉았다. 걱정없이 맑기만 했던 유년이 어느새 레오의 등 뒤에 있었다.

 

 

 

예민하다 못해 처절한


 

돌아보면 학창시절이 가장 좋았다고들 말한다. 무엇에서든 책임이 없이 자유롭고, 그 나이이기에 허용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어른의 관점이라면 10대는 걱정없이 행복만 해야 할 테지만, 감정의 파고를 어느 때보다 심하게 겪는 때이기도 하다.

 

학급, 학교라는 사회 안에서 매일 부딪히고 겪는 치열한 관계가 한 사람의 자아와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하루, 일주일, 일 년 사이에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친구들과의 관계란 웬만큼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휩쓸려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처절하기 까지 한 10대의 감정을 레오, 레미 역의 배우는 참 섬세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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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가 많지 않으면 답답해하던 나도 둘의 대화를 긴장하며 따라가느라 호흡이 바빠졌던 것 같다. 서운하지만 작아보일까 차마 전하지 못하는 마음, 미안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놓친 사과, 가볍고 무심한 물음으로 가장한 걱정. 닿지 못한 진심들이 떠다니다 깨어져 버린 관계가 슬프게 느껴진 것은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인 걸까.

 

관계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는 한, 어리석게 후회하지 않도록 늘 진심을 다해야한다는 사실을 한 층 레오가 다시 한 번 알려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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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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