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유의 꽃은, 증오의 땅 위에서 피어나지 않으니까 [드라마/예능]

<진격의 거인>이 말하는 자유의 조건
글 입력 2023.04.1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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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허용된다.’

 

도덕 시간에나 배울 법한 당연한 말이다. 태어난 이상 내게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자유가 주어지지만,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할 때, 그것이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는지 경계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세상이 굴러갈 수 있을까? 예컨대 나는 개를 싫어하는데, 누군가 개를 산책시키러 나왔다고 하자. 이건 개를 보고 싶지 않은 나의 자유를 침범한 것일까? 만약 그건 아니라고 말한다면, ‘개를 산책시킬 자유’와 ‘개를 보고 싶지 않은 자유’ 중 후자는 왜 존중받지 못하는가? 왜 그 자유는 그렇게 쉽게 박탈되는가?

 

다소 혼란스러운 이 논의는, 사실 그 자체로 세상은 자유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예컨대 ‘살인할 자유’와 ‘개를 산책시킬 자유’가 똑같이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라고 하더라도, 전자의 경우 이를 막는 ‘살인죄’라는 법이 있는 반면 후자의 경우 그런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를 보고 싶지 않은 어떤 유별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법에 의해 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기를 택한다. 세상은 그렇게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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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은, 이 ‘자유’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소년인 에렌 예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의 초반부에서, 에렌은 여느 소년만화의 주인공처럼 진취적인 주인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에렌은 점차 변해가기 시작하고, 종국에는 그를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 모두가 맞서 싸워야 할 극악무도한 빌런으로 변모한다. 인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거인과 맞서 싸우던 그는, 어쩌다 인간 전체를 위협하는 괴물이 되었을까.

 

 

 

모두의 잘못이자, 누구의 잘못도 아닌


 

<진격의 거인>은 거인과 인간의 전투를 다루는 애니메이션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건 이 작품의 초반부에 한정된 이야기로,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이야기는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인간들의 처절한 싸움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대립구도가 이렇게까지 변화하게 되는 과정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이 어떤 세계관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오래전, 조건에 따라 거인이 될 수 있는 피를 가진 종족이었던 ‘에르디아’인은 거인의 힘을 활용해 다른 민족들을 무차별적으로 점령해 왔다. 그러나 이후 종족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상황이 혼란스러워지자, 자신의 종족이 초래한 갖은 비극에 죄책감을 갖고 있던 에르디아의 왕은 권력을 포기하는 길을 택한다. 그는 식민지국이었던 ‘마레’가 거인의 힘을 활용할 수 있도록 몇몇 에르디아인을 마레에 남겨둔 후, 나머지 에르디아인을 데리고 외딴 섬 안으로 들어간다. 또 에르디아인들이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높은 벽을 쌓고, 그들의 기억을 지워 버린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에르디아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세계는 평화로워지지 않았다. 외려 거인의 힘을 활용할 수 있게 된 마레는, 이전의 에르디아와 같은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버린다. 또 마레는 에르디아인을 통해서만 쓸 수 있는 거인의 힘을 온전히 통제하기 위해, 에르디아인들은 더러운 피를 가지고 있으며 섬에 사는 에르디아인들은 악마라는 사상을 주입한다. 설상가상으로 죄를 저지른 에르디아인들을 붙잡아 ‘무지성 거인’으로 만든 뒤, 이들을 에르디아인들의 섬에 무차별적으로 풀어 놓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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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역사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죄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복합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과거 선조의 잘못에 대해서는 속죄해야 하지만 지금은 영문도 모른 채 갇혀 살고 있는 에르디아인과, 지금은 에르디아인들의 자유를 짓밟고 전쟁을 감행하고 있지만 한때는 에르디아 제국의 직접적 피해자였던 마레인까지. 그들의 역사는, 누구 하나만의 잘못으로 쓰여진 역사가 아니다.

 

 

 

자유를 향한 갈망은, 어떻게 세상을 향한 증오가 되었나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에렌 예거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자유’다. 벽 안쪽의 에르디아인이었던 에렌은 거인에 의해 엄마를 잃고, 그때부터 거인을 모두 죽이고 인간의 자유를 되찾겠다고 결심한다. 작중에서 에렌이 보여주는 충동적이고 악에 받친 모습은, 모두 자유에 대한 그의 강한 열망을 나타낸다.

 

초반부에 이 작품이 제시하는 대결구도는 명확하다. 다른 인간을 지키려는 인간과, 인간을 잡아먹으려는 거인 간의 싸움. 선한 쪽은 인간이고, 악한 쪽은 거인이다. 그렇기에 에렌은 이 구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자유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친구들을 지키는 데 사용한다. 그렇게 에렌은 끊임없이 거인을 죽이고, 결국에는 섬 안의 거인 모두를 토벌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그들의 역사가 새롭게 밝혀지면서, 에렌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벽 바깥의 세상은 그들이 쟁취해낸 자유가 아니라, 되려 새롭게 맞서 싸워야 할 적이었기 때문이다. 에렌이 원하던 동족의 완전한 자유는, 언제든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바깥 세상과는 양립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게 작품의 대립구도는 선과 악의 대결구도에서, 에르디아인과 나머지 종족의 대결구도로 재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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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때부터 자유에 대한 에렌의 열망은 더 이상 ‘악을 처단하는 선’이 아니게 된다. 내 민족을 지키려면, 다른 민족은 짓밟힐 수밖에 없으니까. 내 민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칼날은, 이제 거인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향해야 하니까. 그렇게 에렌은 과거의 에르디아 제국이 그랬듯, 자국의 영광을 위해 온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쪽을 택한다.

 

 

 

세 개의 이념, 세계의 불신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끝맺어야 할 이들의 싸움. 그러나 너무도 복잡하게 얽힌 역사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최선의 선택지’란 없다. 에르디아인도 행복하고, 바깥 세상도 행복할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있다고 해도 그들은 그런 선택지를 고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둘 중 하나가 끝나야 이 싸움도 끝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존’의 선택지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작중에서 등장인물들이 선택하는 이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에르디아인의 생식 능력을 없앰으로써, 고통 없이 에르디아 민족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결국 바깥 세계가 에르디아인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거인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유전자를 가진 에르디아인을 모두 ‘안락사’시킨다면, 장기적으로는 세계의 평화가 오지 않겠냐는 입장이다.

 

그러나 어느 에르디아인이 이 방안에 선뜻 동의하겠는가? 세계를 위해 우리 민족이 사라져 줘야 하니 대를 잇기를 포기하라고 강요한다면, 누가 기꺼이 동의하겠는가? 결국 이 방안은 이미 바깥 세계에 의해 자유를 잃은 에르디아인들에게, 또 한 번 자유를 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에르디아인의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에렌은 이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에렌이 이 방법을 대신해 선택한 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길이었다. 바로 거인의 힘을 이용해 에르디아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을 학살하는 것. 세상에서 지워 버릴 한쪽을 골라야 한다면, 에렌이 선택한 쪽은 나머지 전부였다. 과거 에르디아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극단적인 세력 역시 이쪽에 동조하게 되고, 결국 에렌은 이 계획을 실행하는 데 성공한다. 셀 수 없이 많은 거인들이 섬을 빠져나가, 세계를 짓밟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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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대학살이 시작되자, 에렌과 함께해 왔던 동료들은 홀로 살아남기를 택하는 대신 나머지 민족들을 구하기로 결심한다. 안타깝지만 그들에게 이 증오의 역사를 끝낼 뾰족한 묘책은 없다. 그들이 세계를 구해 다른 민족들이 살아남는다면, 비가역적인 피해를 입은 그들은 이 일을 잊지 않고 언젠가 에르디아를 멸망시키려 들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일단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구하기로 한다.

 

세 개의 계획은, 모두 각자를 지탱하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에르디아인, 또는 나머지 민족, 또는 그저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안락사와 대학살 역시 표면적으로는 사람을 죽이는 계획이지만, 그 본연의 목적은 누군가를 살리는 것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동시에 세 개의 계획은, 모두 세계의 신뢰를 받을 만큼 견고하지 못하다. 한 계획은 무고한 희생을 요구하고, 한 계획은 너무 극단적이며, 한 계획은 장기적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제3자의 입장에서 극중 상황을 지켜보는 우리가 막연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는 공존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계획들의 불완전함은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증오 위에선 그 어떤 꽃도 피어날 수 없음을


 

잔혹하고도 처절한 이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여러모로 크게 읽히는 건 과거 일본이 저지른 제국주의적 만행에 대한 반성의 태도다. ‘제국’으로서 에르디아와 마레가 저지른 만행, 에렌이 에르디아를 위해 감행하는 대학살과 그에 동조하는 예거파의 광기에서는 확실히 과거 일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분명한 건, 지금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서로 다른 민족을 포용하자는 말은 실없는 소리처럼 들릴 뿐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성숙한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후회’를 한다. 그때, 에르디아인을 너무 미워하지 말걸. 그때, 마레인의 심정을 조금 더 이해해볼걸. 그때, 에렌에게 좀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 줄걸.

 

그렇기에 이 이야기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안타깝게도 과거에 있다. 마레 제국 사령관이 남긴 대사를 들어보자.


 

“이 책임은 우리 어른들 모두에게 있다. 증오를 이용하고 증오를 키우고 증오에 구원이 있다고 믿으면서, 우리의 모든 취약한 문제들을 악마의 섬에 쏟아내 버렸지. 그 결과 저런 괴물이 태어나서 우리가 쏟아냈던 증오를 되돌려주려 왔다. 만약 한 번 더 미래를 꿈꿀 수 있다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난 맹세한다.”

 


결국 그들에게 있어 현재의 참상을 만든 건 과거의 증오였다. 에르디아 제국이 거인의 힘을 타국을 무참히 짓밟는 용도가 아닌, 자국을 발전시키는 용도로만 사용했더라면. 전쟁이 끝난 뒤, 마레 제국이 에르디아인을 조금만 더 존중해 줬더라면. 어쩌면 그 과거에 누군가가 다른 민족을 존중하기 위한 한 발짝이라도 내디뎠다면, 이야기는 지금의 파국까지 다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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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유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 보자. 에렌은 이 복잡한 세계의 모든 일들을 ‘자유’에 대한 문제로 치환해 버리며, 자신에게는 학살할 자유가 있고 나머지에게는 그걸 막을 자유가 있으니 된 것 아니냐는 논지를 펼친다. 그러나 세상은 자유로만 굴러가지 않는다. 앞서 말한 법처럼 제도적인 요소도, 사랑처럼 감정적인 요소도, 경제처럼 현실적인 요소도 모두 맞물려 굴러가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리고 지금을 후회해야 할 과거로 만들지 않으려면, 자유보다도 더 우선시되어야 할 건 누군가를 증오하는 일을 멈추는 것이다. 그 자체로 지향해야 할 가치더라도, 그것이 증오를 먹고 자라난다면 반드시 후회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증오의 땅 위에서 빠르고 강하게 성장했지만, 그 끝은 결국 독선이고 아집이었던 에렌의 자유가 그랬듯이. 그건 비단 자유뿐 아니라 그 어떤 좋은 가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증오를 먹고 자란 마레의 힘, 증오를 먹고 자란 프록의 조국에 대한 충성심, 증오를 먹고 자란 라이너의 엄마의 모성처럼.

 

그러니 과거에만 해답이 있는 문제에 직면하지 않은 현재의 우리라면, 미래를 위해 좀 더 따뜻하고 희망찬 땅에 우리의 가치를 심어볼 수 있을 테다. 매 순간 지금을 ‘잘한 선택’으로 기억할 수 있길 바라면서, 증오가 아닌 다른 양분을 먹고 자라날 어떤 가치를 말이다. 어쩌면 자유에 대한 어린 시절 에렌의 순수한 꿈을 이뤄줄 수 있는 건, 지금 수많은 가능성 앞에 서 있는 우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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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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