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키키 스미스와 “자아 정원” 거닐기 [미술/전시]

<키키 스미스 - 자유낙하>를 향유하고..
글 입력 2023.03.23 14:3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크기변환]12_699117-52.jpg
키키 스미스 작 자유낙하/에치젠 고조 키즈키 종이에 요판 인쇄, 포토그라비어, 에칭, 드라이포인트/ 84.5x106.7cm/1994.

 

 

-전시 소개-

 

<키키 스미스 – 자유낙하>는 신체에 대한 해체적인 표현으로 1980년-1990년대 미국 현대미술사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온 키키 스미스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2022년 기관 의제인 ‘제작’과 전시 의제 ‘시’를 동시에 경유하는 이번 전시는 다양한 매체를 탐구하는 제작가로서의 면모, 그리고 시대이 굴곡에 따라 조형적 운율을 달리해 온 키키 스미스의 예술적 특성을 ‘자유낙하’라는 키워드로 풀어낸다.

 

스미스는 살과 죽음, 실제와 이상, 물질과 비물질, 남성과 여성 등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경계선 사이에서 뚜렷한 해답보다는 비선형적 서사를 택해왔다. 느리고 긴 호흡으로 주변의 ‘크고 작은 모든 생명’에 귀 기울이며 상생의 메시지를 던지는 스미스의 태도야말로 과잉, 범람, 초과와 같은 수식어가 익숙한 오늘날 다시 주목해야 할 가치이다.

 

 

 

# 저기 너머로 날아가고 싶은



KakaoTalk_20230323_120859936.jpg

 

 

키키 스미스가 표현하는 소녀는 이러하다. 작은 체구와 소극적인 표정. 하지만 분명한 눈동자. 아무 옷도 입지 않고 있어서일까? 멀리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추워 보였다. 추워 보이는 소녀에게 외투조차 벗을 수 없는 나의 마음에도 쓸쓸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이건 다 나의 “추측”이었다. 그 소녀는 나에게 춥다고 말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보다 두 손을 양쪽으로 펼치고 있었다.

 

그래서 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알고 있지 못한 그녀만의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녀의 손에는 그녀의 손만 한 날개가 들려 있었다. 두 날개를 소중히 꼭 쥔 그녀의 모습은 처음 내가 그녀를 마주했을 때와 달랐다. 그녀는 단단해 보였고, 편안해 보였다. 그녀가 소중하게 쥐고 있는 두 날개는 곧 그녀만큼 커져 미술관 밖으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난 그녀가 멀리 날아가기 원했다. 그녀의 날개를 마주한 이후 그녀에게 유리벽이, 이 전시장이 너무나도 작게 느껴졌다. 소설 <데미안>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데미안>

 


이 소녀에게 이 유리벽과 전시장은 알 같은 존재이며 오로지 한 인간으로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날개를 달고 그녀만의 세계, 사람들의 편견을 깨트려야 한다. 나처럼 그녀를 “도와줘야 할 대상”, “동정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깨트려야 하는 것. 소녀의 과제이기도 하지만 우리도 우리의 시선으로 갇힐 누군가의 세계를 지켜주어야 한다. 약한 것은 정말 약할까? 본질적인 강함과 약함은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단단함과 유려함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겉에서 볼 때는 가녀린 키키 스미스의 ‘소녀’는 우리의 생각보다 세계를 뚫을 만큼 강할지도 모르겠다.

 

‘너머의 것’을 탐구했던 키키 스미스. 그녀는 취약성을 품은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작품이 일방적인 교훈과 편견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에 의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는 여백을 드러냈다.

 

 

 

# 생명 정원 거닐기


 

우리의 자아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고등학교 때 배운 기술/가정 시간으로 돌아가 보면 자아정체성을 찾는 방법을 교과서에서 찾을 수 있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어가며 나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다는데, 난 믿지 않는다.

 

사실 믿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아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찾아지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 자신을 향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리 없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자아를 찾기 위해 배회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존재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키키 스미스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해 마치 “정원을 거니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하면서 배회하는 움직임을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드러나지 않던 키키 스미스가 “배회하는 자아” 섹션에서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스미스의 독특한 자아 탐구를 표현하고 있는 <나비, 박쥐, 거북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크기변환]KakaoTalk_20230323_120859936_04.jpg

 

 

해당 작품에서는 키키 스미스가 그녀의 작업실에서 “천”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세 가지 동물 나비, 박쥐, 거북이를 표현했다. 각각 그녀의 등, 허리, 온몸을 천을 이용해 덮으며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점은 바로 회화가 아닌 사진이라는 것이다. 다른 종류의 프린트들을 콜라주 하여 작품을 완성시킨 키키 스미스. 그녀가 이 작품을 통해 찾은 그녀만의 자아는 대체 무엇일까?

 

나비는 자유롭다. 어디든 날아갈 수 있고 그의 아름다운 자태에 사람들은 시선을 자주 빼앗긴다. 그러나 나비는 해야 할 일이 있다. 꽃들에 머물며 그들의 씨앗을 아주 멀리 더 멀리 퍼트려야 한다. 꽃과 계약을 맺은 셈이다. 그가 멀리 이동을 하는 동안 꽃들은 더 많이 생겨나고 그에게 주어진 일은 계속해서 늘어만 간다. 그가 죽을 때까지 말이다.

 

박쥐는 자유롭지 않다. 낮에는 활동을 하지 않고 밤에만 활동을 한다. 그들은 밤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기에 먹이 사냥도 밤을 통해 이루어진다. 박쥐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준다. 피를 먹는 “흡혈박쥐”가 존재하기 때문일까. 드라큘라의 원형 모델이 된 박쥐는 사람들에게 유쾌한 이미지를 주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박쥐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박쥐, 과일을 먹는 박쥐 등 충분히 우호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는 박쥐들이 많다. 그러나 왜 우리는 이들을 두려워하는가. 작은 오해가 큰 진실을 오염시킨 좋은 예이다.

 

거북이는 느리다. 몸짓이 거대하고 등껍질이 꽤 무거워 움직임이 굼뜬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다에 살던, 육지에 살던 거북이는 장수의 상징이다. 실제로 거북이는 다른 동물들보다 오래 사는 경우가 많다. 움직임이 느려서 시간도 느리게 가는 것일까. 그들을 바라볼 때마다 모든 것을 빠르게 해결하려는 나의 모습이 마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천천히 갈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은 “여유”에서 온다는 걸 거북이를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스미스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나비, 박쥐, 거북이의 특성을 빗대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직접 그리지 않고 프린트를 사용했음을 잠시 느낄 수 있다.

 

키키 스미스는 자신을 소개했다. 나비처럼 자유롭지만 작가로서 대중을 즐겁게 해줘야 하는 책무가 존재하고, 박쥐처럼 자신에게 다가오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그녀도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리고 거북이처럼 그녀의 인생과 자아에 대해 긴 시간 동안 고민하며 모든 것을 여유롭게 바라볼 줄 안다. 간단하지만 깊은 고민이 담겨있는 그녀의 자기소개는 나로 하여금 산책을 하고 싶게 한다. 그냥 산책이 아닌 “자아 정원 산책”. 나의 자아를 찾기 위해 빙빙 도는 한이 있더라도 한계가 없는 산책을 하고 싶어진다.

 

 

[크기변환]KakaoTalk_20230323_120859936_07.jpg

 

 

가로, 세로, 위, 아래 방향에 상관없는 “자아 정원 산책”. 지금 떨어지고 있는 것이 스미스 자신의 신체인지 자아인지. 나는 이 작품에서 자유롭게 낙하하는 그녀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찾기 위한 모험으로 보인다. 앨리스가 또 다른 세계에 낙하하며 떨어졌던 것처럼 그녀가 알지 못했던, 우리가 알지 못했던 SELF를 찾기 위해 기꺼이 다이빙할 줄 아는 삶. 그 삶이 바로 스미스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닐까.

 

지금 내 모습과 자아가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스미스의 작품을 보면서 “정원 산책”한다면 분명히 지금보다는 솔직해진 내 자아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마무리된 전시이지만 언젠가 다시 올 그녀만의 산책에 나는 기대를 걸어본다.

 

 

[임주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