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평생 심장에 칼집을 내는 종신형 - 지나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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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사람마다 우선순위가 매우 다르겠지.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 질문해 보자면? 뜻밖에 나는 그 답을 명쾌하게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만, 일단 현재까지는, 이런 비슷한 유의 질문에 늘 일관된 답변을 해왔다. 나의 답변은 ‘서로 싫어하는 것에 대한 이해’이다.
관계를 처음 맺을 때는 좋아하는 것이나 비슷한 관심사에서 시작한다. 공감대를 형성하고,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그러나 유대관계의 지속성을 위해서는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싫어하는 것이 뭔지 정확히 말할 수 있고,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이 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런 지점이 서로 맞물려 있어 서로에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거나, 맞물려 있지 않아도 기꺼이 하지 않을 수 있는 배려가 필요하고, 그리고 그 배려를 이어질 수 있게 하는 이해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 책은, 이렇게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나의 의견을, 아름답고 직관적인 은유로 덧칠해주는 책이었다. 책의 초반 주인공은 스스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 마음의 표면을 상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형태가 그랬다. 반들반들하고, 매끄럽고, 어디에도 붙어 있지 않은 것. 붙일 곳도 없고 칼집도 없었다.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열기가 닥쳐올 때면 아무도 내게 붙지 못했다.
p16
하물며, 도예를 할 때 점토도 서로 붙으려면 칼집을 내야 한다고 한다. 칼집을 내야 덩어리들이 서로 잘 붙는다고. 그러나 주인공은 애정을 기울여 빚은 찻잔에 칼집을 내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으깨서 손잡이를 붙였다. 그 손잡이는 결국 찻잔에 붙지 못하고 부서졌다.
나는 그 은유가 훨씬 더 깊은 곳까지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칼집, 그러니까 타인의 욕망, 요구, 옹졸함, 선호 같은 것들과의 불가피한 충돌, 그리고 관계를 이루는 그 모든 흔하디흔한 의견 절충 과정 때문에 마음이 손상되는 걸 내가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결합하기 위해서는 칼집이 필요했는데, 내 마음에는 홈이 나 있지 않았다.
p16
지나치게 매끄러운 심장의 표면. 이 책은, 그 심장에 칼집을 내는 방법을 찾아 나선 한 사람의 발자취를 기록한 이야기이다.
p60
비밀은 두고 다녀야 한다
화자는 마니라는 동료를 통해 새로운 심리 상담 그룹에 들어가게 된다. 들어가기 전, 마니는 자신의 그룹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며 그룹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감 없이 얘기하는 마니에게, 주인공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도 되느냐고 물어본다. 마니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우리 심리치료사 의견이 그래요. 비밀을 지키는 건 유독한 과정이니 우리 그룹 구성원들은 원하면 어디서든, 무슨 얘기든 해도 괜찮다고 했어요.”
p25
로젠 박사는 비밀을 지키는 것은 수치심을 품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의 비밀을 지키는 건, 내 비밀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는 것보다 더 해로운 일이라고. 다른 사람의 수치심까지 함께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비밀’이란 친해진 관계의 증표 같은 것이었다. “이거 비밀이야. 너만 알아.” 하고 속삭이는 말에는 너와 나는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의미가 내포해있었다. 그래서 나는 남과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순간을 좋아했다. 나도 상대방에게 더 솔직해질 수 있고, 상대방도 나에게 특별한 유대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인식되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성인이 되고, 나이가 많아질수록, 다른 사람의 비밀을 듣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중간에 끼게 되어 혼자만 불편한 상황도 생기고, 비밀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그 이후에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게 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걸 느낄 때마다 ‘왜?’라는 의문이 들었다. 비밀을 나누는 것은 이렇게나 돈독하고 특별한 관계에서만 가능한데, 나는 왜 그 관계 자체는 좋아하면서 그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할까. 스스로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비밀은 다른 사람의 수치심을 함께 품게 되는 것이었구나. 그래서 내가 남의 비밀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수치심의 무게만큼 무거움을 느끼고, 수치심에 안절부절못했구나. 비밀은 놓고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그 순간에 두고,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글쎄, 그전과 상황은 하나 달라질 것 없을 수 있지만, 왜인지 그 생각 하나로 내가 비밀에서 비롯되는 수치심의 굴레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유 모를 찝찝함의 원인을 이제는 명확히 알게 되었으니까.
p118
거절, 분노, 화
거절, 분노, 화. 친밀감과는 아무 관련 없는, 오히려 대척점에 있는 단어들로 느껴진다. 그러나 로젠 박사는, 거절을 못 하면 친밀함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솔직하지 못하면 친밀하지 못한 건 당연하지. 언뜻 당연한 말로 들리기도 했지만, 또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체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어렵게 느껴진다. 뉘앙스가 좋은 말도 아니고, 부정적인 감정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며, 그 기호가 만들어진 배경이 나의 치부나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서 그럴 것이다. 그 얘기를 하면서 내 상처를 말해야 하고, 남의 상처를 듣게 될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또 상처가 날 수도 있다. 악의가 없는 상처라 해도 상처는 상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심장에 ‘칼집’을 낼 수 있으리라. 부정적인 감정만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차분한 행복함이 있을 수 있듯이, 적정한 선에서라면, 분노하고 화내는 애정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로젠 박사를 참 좋아했는데, 이런 면 때문이다.
p126
p159
자신에 대한 분노를 드러낼 때마다 그것을 축복으로 여기며 자신의 마음속에 새기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심지어 가시적으로 가슴께를 문지른다. 진짜로 나의 분노를 깊이 간직하겠다는 듯이. 너무 귀엽고 너무 깜찍하고 너무 따뜻하다. 분노를 일삼는 폭력적인 사람이 ‘분노도 애정의 일환이다’라고 말하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지만, 이런 사람이 ‘분노도 애정의 증거다’라고 말했으니, 나도 이 말에 더욱 신뢰가 갔다.
p195
p243
책을 읽는 나도 그랬으니, 직접 들은 크리스티는 더 신뢰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 말을 함께 듣고 함께 이행하는 사람이 주위에 있어서 더욱 느꼈을 것이다. 화를 내는 마니의 사랑을 전혀 몰랐던 크리스티는, 이제 그녀가 호통을 쳐도 그녀의 사랑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화가 나지도 않고, 불안정하지도 않고, 오히려 발전적인 생각이 가능하다. 내가 더 많은 걸 얻기를 바라는 것이 둘 모두의 애정이자 염원인 것을 알기에.
p437
우리 모두 종신형
크리스티는 많은 시간과, 많은 고백과, 많은 경험을 겪으며 비로소 심장에 칼집을 내게 되었다. 매끄러운 도자기 표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칼집을 내지 못할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내 아름다운, 칼집이 난 심장’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상처나 과거를 ‘극복해야 할 점’으로 한 번도 묘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설이 아니라 자기 고백의 연대기를 담은 수필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또 오히려 그래서 더 좋다. 진정한 해법은 이겨내거나 극복하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감정을 명확히 마주하는 것, 그 정도면 되는 것 같아서.
“제가 이걸 절대로 잊지 못하고 있는 거군요.”
로젠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티, 이걸 잊을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p148
아픈 기억을 잊지 않아도 된다. 잊지 않아도 간직한 채 무사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아픔을 이겨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너무나 다행이고, 너무나 위로가 되는 사실이었다. 물론 너무 힘들 수도 있다. 그러면, 로젠 박사의 말처럼 그저 유독한 비밀을 토해내면 되는 것이다. 토해내는 것이 분노인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고.
분노를 느끼는 것이 가장 미숙한 나 자신의 단면이라고 생각했다. 표출은커녕, 고작 스스로 느끼는 것에 불과한데도,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감정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 같고, 좋은 감정도 아닌데 감정적으로 치우쳐지고, 불쾌하니까. 가끔 혼자서 조금이라도 표출한 후에는 내가 이렇게나 미욱한 존재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 같아서 개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분노는 잘못이 아니다. 심지어 로젠 박사에게는 가슴에 새길 축복까지도 된다. 이 책에서 가장 큰 잘못은 혼자 참고 있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감당하려고 애쓰기라는 대죄를 저지르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매일 밤 로리에게 전화해 먹은 음식을 보고했다.
p391
이 내용이 소설이 아니라서 더 다행이다.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라서, 정말 존재했던 누군가의 아픔이고, 존재했던 누군가의 처방이자, 존재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라서 큰 위로가 되었다.
“아직도 R박사한테 상담 받고 있어요?”
그들은 묻는다.
“그럼요, 저는 종신형을 받았거든요.”
p472
우리는 평생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매끄럽고 우아한 심장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 늘 칼집을 내야 하는 현실, 그 사이 딜레마에서 늘 고민하며 살아간다. 사람은 사람 없이 살 수는 없다. 근데 또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게 가장 힘들다. 그러니 심장에 칼집을 내는 종신형은 비단 크리스티에게만 내려진 선고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평생 내야 할 심장의 칼집. 그러나 그 칼집은 남이 꽂을 칼이 아닌 나를 위해서임을 이제는 안다.
[주영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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