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난 팀의 주역이 아니라도 좋다 - 슬램덩크 [만화]

글 입력 2023.02.1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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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도래한 영광의 시대



약 이십 년의 오랜 기다림 끝에 올해 초 개봉한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만화책 후반부의 산왕공고와의 경기로 만들어졌다. 누적 관객수 305만 명을 돌파(2월 18일 기준)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1위를 노리며 오는 4월에는 아이맥스 개봉을 앞두고 있다.


추억의 명작이 이토록 인기를 얻을 줄 예상이나 했을까. 한차례 인기를 휩쓸고 지나간 작품의 영광은 과거에 남아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21세기에 영화로 개봉한 20세기 작품이 박스오피스 1위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금이야말로 제2의 전성기가 분명했다. 강백호의 유명한 대사를 빌려, 영광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슬램덩크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의 남녀 성비가 5대 5로 비등한 비중을 차지한다. 스포츠 장르가 남성팬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지던 때도 예전 일이 되었다. 여의도 더현대에서 진행하는 팝업스튜디오에서 최애 캐릭터의 굿즈를 사기 위해 오픈런(매장이 오픈하는 즉시 구매)을 행하며 품절 대란을 일으켰고 이 마저도 여성팬의 비중은 상당하다. 신생팬부터 원작팬까지 연령층도 다양해졌다. 작품 내 인기 절정으로 묘사되는 서태웅을 차치하고도 심지어 산왕의 이명헌, 정우성에게도 열혈팬들이 줄을 서고 있다. 영화를 통해 더욱더 입체적인 캐릭터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소감이다.


현재 가장 열광하고 들끓는 이들은 슬램덩크를 처음 접하게 된 신생팬일 것이다. 요즘 시대에 e북도 없이 오로지 만화책으로 승부하는 작품이라니. 이들은 한 편의 영화로 축소한 청춘을 다시 맛보기 위하여 n차 관람을 불사하며 원작에도 발 담그고 있다. 잇따른 관심 덕에 만화책을 만드는 제지업계 역시 호황이다. 유행에 탑승하여 슬램덩크를 시작하기에 시기적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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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팀의 주역이 아니라도 좋다



능남의 센터 변덕규와 채치수의 매치업을 통해 탄생한 명대사는 슬램덩크를 관통하는 중요한 대사가 되었다. 변덕규는 산왕전에서 신현철과의 매치업을 두고 머뭇거리는 채치수를 가자미에 비유하며 그를 각성시켜주기도 했다(“넌 가자미다, 진흙투성이가 돼라”). 화려한 기술을 가진 신현철이 도미라면 채치수의 역할은 그를 따라잡는 것이 아닌 팀에서 맡은 제 역할을 해내는 것이 되겠다. 이렇다 할 깊은 서사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마치 주인공의 백그라운드처럼 존재했던 조연을 짚어줌으로써 이야기는 다채로워진다.


슬램덩크는 내가 처음 만화책으로 접한 2000년대 초에 이미 전설로 남은 스포츠 만화의 표본이었다. 강백호의 이야기였지만 북산 농구부 모두의 이야기였다. 그 당시 농구의 룰조차 생소했던 강백호가 곧 나였으며 멤버들과 성장하며 농구의 재미를 깨닫게 되었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을 좋아했고 종료 휘슬과 함께 하이파이브로 이어지는 서툰 우정 앞에 눈물 흘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십오 년이 흘러 다시 보는 슬램덩크에 대한 감회가 남다르다. 인물 너머의 인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사건건 강백호를 놀려대지만 농구 시합을 응원하기 위해 고된 아르바이트를 자처하여 차비를 마련하는 백호군단이 보였다. 그리고 묵묵히 벤치를 지키며 팀을 격려해 온 권준호가 연기된 은퇴를 예감하며 울컥하는 장면에서는 함께 울컥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모두가 성장하고 있었다.


슬램덩크를 이끌어가는 주된 캐릭터는 남성이지만 스포트라이트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농구를 사랑하는 여성이 존재한다. 소연과 한나가 그렇다. 자칫 강백호가 농구에 입문하게 되는 발판으로 쓰이는 캐릭터가 될 뻔했으나 소연은 단순히 주연을 빛내기 위해 존재하는 여성은 아니었다.


농구 초짜인 강백호에게 레이업 슛을 가르쳐주고 격려해 주는 장면에 그치지 않고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강백호의 천재성에 질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소연에게 농구는 짝사랑 같다. 체력적, 기술적 한계에 부딪혀 포기해야만 했던. 시기 어린 질투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강백호의 무궁한 성장을 고대하기 때문이다.


한나는 패배 후 한풀 꺾인 팀의 사기를 끌어올리며 매니저의 역할을 다한다. 송태섭의 짝사랑 상대로 회자되곤 하지만 송태섭의 손바닥에 ‘넘버원 가드’를 적는 장면에서 이성적 매력이 아닌 든든한 조력자 느낌을 받았다. 한나가 남자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여성 캐릭터가 아닌 누구보다 북산의 승리를 응원하는 멤버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일 테다.


변덕규의 대사처럼 비록 '주역이 아닐지라도' 그들만의 방법으로 농구를 사랑하는 방법을 만들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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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다신 없을 팀을 만난다는 것



사실 슬램덩크는 단순하고 뻔한 스토리이다. 주된 스토리는 오합지졸 농구부의 전국대회 토너먼트 경기라고 볼 수 있으며 강력한 우승 후보인 산왕공고를 상대로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이끌어내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서태웅이 강력한 에이스로 등장하지만 화려한 우승 전적을 뽐내는 산왕에 비하면 북산에 대한 평가는 병아리 농구부에 불과했다.


그런 의미로 주장 채치수가 꿈꾸는 전국대회 진출은 줄곧 허황된 꿈으로 여겨진다. 우승은커녕 예선전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는데 채치수는 여전히 전국대회를 목표로 두고 연습을 강행했다. 영화에서 짧게 등장하는 과거회상 장면에는 같은 팀이었던 선배마저 (채치수의) 허황된 꿈을 강요하지 말라며 독재적인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채치수는 꿈에 그리던 전국대회에 진출하여 최강 산왕과 맞붙는 경기를 이끌어나갔다.


경기 후반부에는 산왕의 승리를 예감했던 관객들이 도리어 북산의 역전을 기대하며 응원한다. 별 볼 것 없는 팀으로 여겼던 남성들의 꿈틀거림에 반응했다. 완벽한 기술과 경기 능력보다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과 농구공에 대한 집념이 만들어낸 열정에 열광한다.


채치수의 꿈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저 농구가 좋아서. 농구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향해 간 것. 경기에 미숙한 강백호가 퇴장당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집 앞에 찾아왔을 때도, 자기중심적 경기를 이어가던 서태웅이 패스를 했을 때도. 채치수는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바랐던 팀을 만나게 되었다고.

 

 


청춘은 계속되어야 한다


 

슬램덩크는 현세대가 맛보지 못한 청춘이다. 영화에서는 형과 1대 1을 했던 코트에 혼자 남아 농구공을 튕기는 송태섭이 있다. 송태섭을 내내 압박해 온 존프레스는 그가 처한 인생 전반을 일컫는 것과 같았고 마침내 그가 장벽을 뚫고 질주할 때 가슴 깊숙이 강한 울림을 느꼈다. 오직 농구를 사랑하는 소년만이 코트 위를 달리고 있었다.


노력 천재 강백호는 여름 내내 이만 번 연습 끝에 쏘아 올린 기본 점프슛으로 산왕과의 경기를 역전한다. ‘왼손은 거들뿐’이라는 전무후무한 명대사가 나오지만 진정한 명장면은 그의 풋내기 슛이 아니었을까. ‘노력’과 ‘열정’ 빼면 시체인 북산의 낙제군단을 사랑하게 된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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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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