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지금부터 ‘히어스토리’가 시작된다 – 연극 ‘히어’

글 입력 2023.01.1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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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 포스터.jpg

 

 

테일러 맥의 <히어>가 더줌아트센터 제작으로 국내에서 초연된다. 이번 작품은 국내에 소개되는 테일러 맥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배우이자 극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테일러 맥은 정형성과 경계를 벗어나는 아티스트로, 자기 자신의 젠더를 여성이나 남성이 아닌 ‘performer’로 표기하겠다 소개한 바 있다. <히어>는 테일러 맥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신선한 극이다. 제목인 ‘히어(hir)’는 극 중 성전환을 한 맥스라는 인물이 ‘her’, ‘his’ 대신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성중립대명사이다.

 

 

 

무너져버린 아버지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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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황선하

 

 

아프가니스탄 전쟁터에 군인으로 파견되었다가 제대한 아이작이 집에 돌아오며 극이 시작된다. 그를 반기는 것은 안락한 집과 따뜻한 환영 인사가 아니라 폭탄이라도 맞은 듯 엉망진창이 된 집과 변해버린 가족들이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집에 있던 모든 것이 제자리를 벗어나 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는 또 다른 전쟁터에 도착한 것처럼 보인다. 


늘 소파에 앉아 근엄한 모습으로 티비를 보던 아버지 아놀드는 이제 나이트가운을 입고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한 채 박스에서 잔다. 어머니인 페이지는 그가 말을 안 들을 때면 얼굴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여성호르몬제를 약과 함께 먹이는 등 남편을 학대한다. 여동생 맥스는 성전환수술을 해서 더 이상 여동생이 아니다. 냉장고에 핸드백이 들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방은 동생의 방이 되었고, 이제부터 거실이 자신의 방이라는 통보를 받는다.


아이작에게 이 집은 집이라고 할 수 없다. 온통 바로잡아야 할 것투성이다. 사방에 흩어진 물건도, 너무 낮게 설정된 실내온도도, 학교에 안 가고 홈스쿨링을 한다는 맥스도. 그러나 페이지는 집안을 정리하려는 아이작을 만류하며 호르몬제니 젠더니 예술이니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이어서 맥스는 자신을 he, she, him, her 대신 ‘히어(hir)’로 지칭하라고 말한다. 이들은 왜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을까.


극이 진행되면서 아이작이 집으로 여겼던 것은 ‘아버지의 집’이었지 페이지와 맥스의 집은 아니었다는 게 드러난다. 과거 아버지의 집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관점이었을 것이다. 아놀드에게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남성 가부장으로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그 자리가 위협받는다 싶으면 가차 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아놀드 밑에서 페이지와 맥스에게는 집이 없었다. 집은 오히려 이들을 억압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아놀드가 아프고 아이작이 입대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페이지와 맥스는 집이라 불리는 것을 무너뜨렸다. 엄밀히 말하면 이들이 무너뜨린 것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아놀드의 집, 아버지의 집이다.

 

 

 

웃어도 될지 망설여지는 블랙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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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황선하

 

 

설정과 시놉시스만 보고도 눈치챘겠지만 <히어>는 매우 상징적인 극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노골적이기까지 하다. 엉망진창이 되고 이전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집은 더 이상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 영화의 주인공 배역을 맡을 수 없는 현실 속 세상을 반영한다. 여성과 성소수자, 유색인종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는 그들의 목소리는 아이작이 페이지, 맥스와 집을 두고 갈등하는 모습과 겹쳐진다.

 

그러나 견고하리라 믿었던 아버지의 집이 누군가에게는 없으니만 못한 것이었으며, 한 꺼풀만 걷어 보면 무너지기 직전의 어설픈 판잣집이었다는 걸 이제 모두가 알게 된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그 집을 복원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자칫하면 교훈적이거나 작위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과장된 인물과 내내 튀어나오는 신랄한 유머다. 특히 자신을 ‘히어’로 지칭하기를 선언한 맥스는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며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곤 한다. 그의 농담에 웃어도 되나 망설이는 순간, 이미 그는 다음 대사를 하는 중이다. 맥스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물이 아니다. 유머를 통해 맥스는 어떤 권리를 위해 싸우는 운동가나 관객을 가르치려는 선생이 아니라 그냥 변덕스러운 청소년 ‘맥스’라는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물론 가장 많이 희화화되는 것은 아놀드와 아이작의 남성성이다. 집안의 폐기된 규칙처럼 이들의 남성성은 연극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한다. 집안에 군림하던 아놀드의 현주소는 이제 애완동물만도 못하다. 관객은 뇌졸중 환자인 그를 앞에 두고 웃어도 되는지 고민에 빠지지만, 과거에 그가 가족에게 휘둘렀던 잔혹한 폭력의 역사는 웃음의 면죄부를 준다. 


제대한 아이작도 마찬가지다. 보통 전쟁에서의 제대는 가장 명예로운 일로 가족의 환대를 받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는 마약을 하다가 불명예제대를 했기에 오히려 제대 사실이 웃음거리가 된다. 자랑스러운 아버지와 아들은 이 극에서 없다. 아들이 무너진 아버지의 남성성을 애써 바로 세워보려고 하는 노력은 소용 없는 애잔한 몸짓으로 보일 뿐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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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황선하

 

 

극은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기보다 엉망이 된 집의 모습을 인정할 수 없는 아이작과 그 집을 이끄는 페이지, 맥스의 대립으로 채워진다. 이들의 입장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1부에서는 집인지 알아보기도 어려울 만큼 어질러져 있던 집을 2부에서는 아이작이 모두 청소하며 갈등은 더 심화한다. 끝내 새로운 집에 적응할 수 없었던 아이작은 과거 아버지가 행한 폭력을 답습하고 만다. 아놀드는 그런 식으로 '제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아버지의 규칙이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폭력을 휘두른 대가는 자기 자리를 되찾는 게 아니라 밖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아이작은 이 모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맥스는 이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래된 것이라고 답한다. 맥스의 대사는 우리가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것을 정의 내리고 구분하려는 시도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걸 상기시킨다. 즉 사람을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는 것,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는 것은 모두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맥스와 페이지가 만들려는 것은 기존의 집을 대체할 새로운 집이 아니다. 이들은 집이 생기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 집을 해체하고 집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려 하는 쪽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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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황선하

 

 

그러므로 이 집의 풍경도 기존의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바람직한 질서로 제시되지 않는다. 맥스와 페이지 사이에도 입장 차이와 갈등이 당연히 존재한다. 기존의 집을 부수는 것이 이들에게는 더 나은 선택지였음을 보여줄 뿐이지, 무너진 집 위에 무엇을 지을지 또는 지어야 하는지 극은 알려주지 않는다. 맥스가 특정 소수자를 대표하지 않고 그저 맥스로 남은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의 집이 무너진 다음에 새롭게 써나갈 이야기가 어떤 형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굳이 이름 붙이자면 맥스가 명명한 것처럼 ‘히어스토리’가 적당할 것이다. 기존의 질서에 들어맞지 않는 존재가 주체가 되어 그의 관점으로 쓰는 이야기. 다시 정해보는 ‘제자리’. 무너진 집 위에 어떤 집을 지을까. 또는 집이라는 게 꼭 필요할까 고민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래된 것들이 새롭게 써나갈 이야기를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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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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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tty
    • 한때 폭군이었고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뇌졸중으로 자립의 기반마자 잃은 자를 조롱하고 학대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영 복잡하고 불편한 극이었다.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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