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함께 달에 가자 [만화]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 인간성의 가장자리에서 묻는 특별함의 근원
글 입력 2023.01.16 17:17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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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스포일러를 다량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이버펑크의 미래는 도래할 것인가



책이나 영화에서 그리는 미래의 모습은 흥미롭다. 사이버펑크 콘텐츠의 시초격인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2019년의 LA를 배경으로 삼는다. 영화에서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나 인조인간 레플리칸트와 같은 기계 문명이 미래를 점령하리라 예측하였다. 당시 영화가 제작되었던 1982년의 시점에서 2019년은 영영 다가오지 않을 것만 같은 먼 훗날의 숫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2019년은 도래하고야 말았고,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고사하고 차도 면허도 없는 사람들만 넘쳐났다. 과거의 사람들이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이 얼마나 순진한가를 떠올리고 웃음이 나다가도, 동시에 80년대와 비교하면 격변한 2019년의 모습은 나도 모르는 새 세상이 순식간에 바뀔지 모른다는 기대와 공포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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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사이버펑크: 엣지 러너>는 게임 <사이버펑크 2077>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배경이 되는 나이트 시티에서, 사람들은 고도로 발전한 기술력을 이용해 편리함을 추구하고 신체 일부를 기계로 개조해 강력한 힘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혜택은 소수의 부유층에게만 집중되며 빈부 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고, 나이트 시티는 사실상 정부가 아닌 기업의 지배를 받는 배금주의 사회이다. 구급 대원과 같은 필수적인 국가 행정이 부재하고, 119 역할을 수행하는 트라우마 팀 인터내셔널은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라도 철저히 외면한다. 경찰 역시 사실상 총알받이 역할을 하는 등 유명무실하며, 시민을 지키기보다는 기업의 사주를 받는 사살 목적의 무장 단체로 기능한다. 이것이 진정 인간이 마주해야만 하는 2077년이라면, 혹시라도 그런 미래를 거부할 권리는 없는지 물어보고 싶다. 하늘 자동차만 빼고 모든 것이 변했던 1982년에서 2019년, 다시 그로부터 2077년까지, 과연 세상은 얼마나 변화할까? 그 변화의 방향은 진보일까, 디스토피아적 쇠락일까?




우리가 소년 만화를 사랑하는 이유



주인공 데이비드 마르티네즈는 나이트 시티의 가장 그늘진 구석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가난한 서민층으로 세탁 비용조차 제때 내지 못했던 그는, 교통사고로 그의 어머니 글로리아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순식간에 홀로 세상에 나앉는다. 그런 그가 삶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은, 글로리아가 가지고 있던 군용 무기 '산데비스탄'을 자기 몸에 이식하면서부터다.


우연히 만난 '루시'를 통해 '엣지 러너 크루'에 들어가게 된 데이비드는, 수장 '메인'의 도움을 받아 힘과 기술을 훈련하고, 함께 임무를 수행하면서 크루원들과 마치 가족 같은 유대를 형성한다. 혼자였던 데이비드가 엣지 러너 크루의 따뜻함 속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은 지독한 클리셰에도 불구하고 왜 소년 만화에 열광하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성숙한 어른 멘토, 약자에 대한 기꺼운 포용, 배움과 성장의 열린 기회, 소년 만화의 문법이 매력적인 건 그 따스함과 환대가 실제 각박한 현실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순전히 '만화적인' 요소라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원한다고 언제고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그 소중함을 배가한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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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 너무 행복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때쯤, 모종의 불안감은 확신의 절망으로 돌아온다. 크루원인 '필라'가 모두의 눈앞에서 사이버 사이코에게 허무하게 살해당한 사건을 시작으로, 이내 수장이었던 메인도 그 자신이 사이버 사이코가 되어 사랑하던 도리오를 죽이고 스스로를 파괴하기까지 이른다. 의심스러울 만큼 행복했던 엣지 러너 크루와 어린 데이비드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소년 만화의 문법에서 종결의 마침표는 상실이다. 그러나, 상실은 끝없는 심연의 절망에 주인공을 가두지 않고 그의 정신적 성숙을 도모하는 촉진제로서 작용한다. 데이비드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처음 아카데미 밖 세상으로 나아갔듯이, 데이비드는 필라의 죽음 이후 루시와 깊은 연인 관계로 나아갈 대화의 물꼬를 텄으며, 수장의 죽음 이후 메인의 의지를 이어 작은 꼬마에서 어엿한 크루 리더로 성장한다. 이처럼 소년 만화 속 상실은 그저 덤덤하게, 주인공의 행복과 성숙을 등가 교환한다. 


우리가 소년 만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어쩌면 한시적이라는 속성 때문이다. 유년기의 추억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결코 돌아갈 수는 없으며, 인생의 아주 짧은 순간 그 무엇보다도 밝게 빛나다가 이내 명멸하는 별이다. 그러나, 오히려 한시성 덕분에 추억은 현실의 지지부진한 권태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박수 칠 때 떠날' 수 있다. 어떤 것들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 소중하다. 예정된 상실이 소년을 더욱 빛나게 했다는 사실을, 소년이 언제까지나 소년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뿐이다.




"나는 특별하다"는 외침



(1) 인간성과 자율성을 잃어버린 사이버 사이코


사이버펑크 장르가 으레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인간됨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내어놓는다. 일례로 등장인물들은 종종 나체로 등장하는데, 애니메이션의 성적 대상화 맥락을 차치한다면 이 같은 장면은 몸을 더 이상 인간 신체가 아닌 기계의 일부라도 된 듯 건조하게 표현하는 듯했다. 실제로 메인은 데이비드에게 "너 아직 유기체냐?"라고 질문하면서, 돈이 모이면 뭐라도 이식하라고 조언한다. 이처럼 나이트 시티의 사람들은 몸의 인간성을 포기하더라도 물질을 통해 강력한 힘을 획득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몇몇 사람들은 몸뿐 아니라 정신의 인간성 역시 상실하는데, 지나친 신체 개조로 인격 장애를 일으키며 환각을 보거나 타인을 살해하는 데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을 '사이버 사이코'라고 부른다.


특이한 점은, 사이버 사이코가 보는 환각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풍경이라는 점이다. 메인이 사이버 사이코로 변했을 때 그는 조용한 사막을 달리는 평범한 몸의 자신을 본다. 데이비드 역시 이성의 끈이 끊어지려는 순간에 아카데미에 등교하던 자신과 어머니의 표정을 본다. 더 강력해지고자 평범함을 거부했던 사이버 사이코가 가장 그리워하는 풍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돌고 돌아 다시 평범함이었다. 이러한 무의식적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해서 자신을 개조했던 이유는, 사이버 사이코가 겪은 변화가 뚜렷한 목적성을 지닌 단계적 진보가 아닌 멈출 수 없는 추동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욕망에서 출발한 신체 개조는 한 번 미끄러지면 멈출 수 없는 경사면을 굴러, 그들은 인간성과 함께 자신을 제어할 자율성까지도 잃어버리게 된다.

 

 

(2) 특별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 꺾을 줄도 아는 마음


데이비드가 한계치까지 신체를 개조하자, 리퍼닥은 그가 사이버 사이코가 될 거라며 우려한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주변의 모든 걱정을 "나는 특별해"라는 한 마디로 무마하는데, 실제로도 그의 신체는 특별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하루에 두 번만 사용해도 몸이 녹아 버릴 산데비스탄을 열 번이나 사용하고, 산데비스탄 외 각종 임플란트에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 아라사카가 실험체로 눈독 들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말부 마지막 전투에서, 데이비드와 아담 스매셔는 서로 자신이 더 특별하다며 소리친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자신처럼 산데비스탄을 사용하는 아담 스매셔를 보며 충격에 빠지고, 아담 스매셔는 "이건 기초적인 임플란트다"라며 그런 그를 비웃는다. 산데비스탄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는, 더 이상 특별한 재능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특별하다"는 데이비드의 외침이 완전한 허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의 특별함은 산데비스탄이라는 기술에서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특별함은, 한계치를 초과하는 신체 개조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순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한 인간성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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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깜빡 않는 사람들과는 달리, 데이비드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죄 없는 사람을 죽일 때마다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의 신체는 차가운 금속으로 대체되었을지언정, 마음은 여전히 상실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몸도 마음도 기계처럼 변하는 세상이라면, 인간다움은 그 자체로도 특별함이 된다. 인간과 기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생각건대, 인간과 기계는 모두 목적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 나가는 추동력을 지녔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그러한 추동에 스스로 제동을 걸 줄 안다.

 

데이비드가 엄마의 꿈을 위해 아카데미에 다니고 메인의 꿈을 위해 크루 리더가 되자, 루시는 '넌 여전히 남의 꿈을 위해 산다'며 타박한다. 데이비드가 종국에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것은 달에 가겠다는 루시의 꿈이었다. 루시의 우려와 달리, 데이비드는 타인의 꿈을 '대리'하지 않았다. 루시의 꿈은 데이비드의 꿈이 되었으며, 그는 대리자가 아닌 동반자로서, 부채감에 떠밀려서가 아닌 그 자신의 꿈이자 루시의 꿈을 위해 주체적으로 희생을 선택했다. 

 

때로 산데비스탄의 강력한 힘이 그의 욕망을 부추겼을지라도, 그러한 추동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루시와 루시의 꿈을 사랑하는 마음 덕분이었다. 사이버 사이코는 자기 욕망을 관철하고자, 데이비드는 소중한 이의 꿈을 이루고자 산데비스탄을 사용한다. 같은 기술이라도 담긴 마음이 달랐기에 데이비드는 특별할 수 있었다.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꿈을 이루는 걸 보고 싶어

 

그게 나의 꿈이야

 

네 꿈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

 


이러한 메시지는 현대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시의적인 울림을 준다. 당장 사이버펑크의 미래가 도래하지 않더라도, 기술 사회와 AI의 발전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피할 수 없는 질문 속에 우리를 가둔다. 혹자는 이성 그리고 기술력을 인간만의 특징이라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모든 것을 굽힐 줄도 아는 마음에서 인간의 특별함이 온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욕심과 광기에 휩싸여 전쟁을 일으켜 수천수만의 무고한 희생을 방치할 때보다, 전쟁이 가져다줄 모든 이득을 포기하면서도 평화를 약속할 때가 더 인간적이다. 끝도 없이 미끄러지는 추동의 진보가 아닌, 필요하다면 의도적으로 진보를 유보하고 반추하는 능력이, 인간다움을 구성한다. 

 

산데비스탄이 '기초적인 임플란트'였듯이, 이제 기술을 사용할 줄 안다는 그 자체만으로는 특별해질 수 없다. 기술에 어떤 마음을 담는지, 무엇을 위해 기술을 쓰려는지, 그 쓰임을 성찰하고 필요하다면 전부 내려놓을 수도 있는지가 중요하다.

 

 

(3) 기계로서의 삶과 인간으로서의 죽음


데이비드의 죽음이라는 엔딩은 애니메이션에 몰입한 수많은 관객에게 큰 허탈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최악 아닌 '차악'의 엔딩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가 살아남는 미래는 상상보다 더 비참했을지도 모른다. 데이비드는 이미 추동의 내리막을 미끄러지기 시작했으며, 그는 매 순간 그저 간신히 붙잡고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가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했다 한들 그 이후의 삶은 인간성을 상실한 사이버 사이코로서의 파멸로 예정되어 있었다. 전투의 승패와 상관없이, '인간'으로서의 데이비드는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에 처해 있었다. 

 

나이트 시티에서 '어떻게 살았는가'가 아닌 '어떻게 죽었는가'로 사람이 기억된다면,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은 특별했다. 사이버 사이코의 최후는 정신 분열로 인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하다가 맥스텍의 총탄 세례로 맞이하는 수동적이고 비극적인 소멸이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루시를 지키고자 스스로 희생을 '선택'했다. 사이버 사이코와 달리,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으로서 자기 운명에 대한 자유 의지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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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는 다르지 않아

 

흥미로운 지점은, 데이비드가 다른 모든 이들에게 "나는 특별해"라고 외치면서도 오직 루시에게만큼은 "우리는 다르지 않아"라는 정반대의 말을 호소한다는 사실이다. 루시 역시, 남의 꿈을 위해 희생하는 데이비드를 꾸짖으면서도, 그 자신조차도 데이비드를 위해 자기 꿈을 유보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메인의 죽음 이후 크루는 사실상 해체 위기에 처했고, 루시에게는 당장이라도 팀과 데이비드를 떠나도 좋다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루시는 팀으로 돌아가지 않을지라도 데이비드 곁에 남아 그를 뒤쫓는 러너들을 남몰래 처리하면서 그를 지켰다. 루시 역시 달에 가겠다는 자신의 꿈보다 데이비드를 위하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 인물이었으며, 타인의 꿈을 위해 달리는 데이비드와 그가 '다르지 않았던' 이유다. 

 

과거의 루시는 나이트시티가 마치 빛으로 된 감옥 같다며 하루빨리 달로 떠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데이비드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루시는 이전과는 다르게 이제 나이트시티가 집처럼 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달빛이 밝으면 별이 보이지 않는다. 달빛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은 루시의 시야로부터 다른 모든 작은 불빛을 은폐했지만, 그 허구성을 깨닫고 자신의 바로 옆에 있던 데이비드라는 별을 발견한 루시에게, 달은 더 이상 그의 가장 간절한 꿈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루시는 달이 아닌 데이비드로부터 빛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런 그를 달에 보내고자 희생한 데이비드의 엇갈린 선택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어쩌면, 데이비드가 루시를 달에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부터 이미 죽음의 복선이 짙게 깔렸을지도 모른다. 데이비드는 실제로 루시 방의 달 포스터를 바라보면서 나지막하게 이야기한다. 저 포스터는 마치 달을 천국인 듯 묘사하지만, 한 사람이 달에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냐며. 

 

그의 말처럼 데이비드의 희생으로 루시는 마침내 과거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달 여행을 떠나지만, 루시의 표정은 상당히 심드렁하다. 데이비드와 브레인댄스로 체험했던 가상의 달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실제 발을 디딘 달의 모습은 생각보다도 더 무미건조했기 때문일까.

 

그러던 중, 루시는 태양이 돌면서 햇빛이 비친 찰나 데이비드의 환영을 마주하고, 그 순간 황량해 보이던 달의 풍경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스토리 전반에 걸쳐 유독 '빛'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사실 루시가 동경하던 달빛은 달의 표면에서 생성된 게 아니라 햇빛의 일부를 반사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루시가 진정으로 닿으려던 빛은 달 그 자체가 아닌 달을 빛나게 만들어 주는 광원으로부터 왔던 것이다. 그런 루시에게는, 나이트 시티의 네온사인도, 타오를 듯 강렬한 태양도, 달이 없으면 가려져 버릴 별도 아닌, 데이비드라는 광원이 루시의 달을 가장 밝고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2077과 엣지 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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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토록 감동적인 스토리 라인과 매력적인 인물 설정 등의 명확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한계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는 사이버펑크 장르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소재 자체만 두고 본다면 진부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더불어, 10부작이라는 압축적인 길이로 제작된 만큼, 세부적인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상당히 급하게 전개되었다는 지적 역시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니메이션의 작품성을 변호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바로 훌륭한 미디어믹스의 사례라는 점이다. 

 

전작 <더 위쳐 3>의 명성과 공격적인 자체 마케팅에 힘입어, <사이버펑크 2077>은 예약 구매만으로 800만 부를 넘기며 기대작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발매일이 차일피일 미뤄지던 데다가, 실제 발매 이후로는 구동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잦은 버그와 단조로운 진행 방식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유저들의 불만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런 와중에, 엣지 러너의 흥행은 <사이버펑크 2077>의 재흥행과 재평가를 불러일으켰다. 데이비드를 죽인 아담 스매셔에게 복수하겠다며 몇 년 만에 다시 게임을 켰다는 복귀 유저부터, 스팀 할인 및 핫픽스로 유입된 신규 유저를 모두 잡으면서, 게임 판매량은 다시금 급증했다. 

 

이처럼 엣지 러너가 미디어믹스의 모범 사례로 거듭날 수 있던 이유는, 단순히 게임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스토리라인을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실제 제작 비화를 들여다보면, 게임 제작사 CDPR과 애니메이션 제작사 트리거 사이에서 애니메이션 제작 방향을 합의하는 데만 무려 2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트리거 측은 일방적으로 CDPR의 요구를 수용하기보다는 그들의 전문 분야인 '애니메이션'에 특화된 방식으로 각본을 재구성했다. 형식만 달리하는 복제품이 아닌 상호 보완하며 각자의 개성을 지닌 성공적 미디어믹스로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1년 <아케인>을 통해 본 미디어믹스의 새로운 가능성이, 엣지 러너로 하여금 다시 방점을 찍었던 202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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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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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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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소년만화의 흥행이유와 데이비드의 특별함을 다룬 챕터가 특히나 인상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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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준
    • 좋은 글 잘 봤습니다.감사합니다. 기계로서의 삶과 인간으로서의 죽음과 비극적 결말이 예정된 결말이었다는 글이 특히 인상깊었습니다. 애니가 생각날 때마다 가끔씩 이 글도 읽어보도록 해야겠네요. 긴 글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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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준학
    • 엣지러너를 보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는 동안 해당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새로운 해석과 함께 새로운 감동이 밀려오더군요. 너무 감명깊었습니다.

      특히 사이버 사이코로 전락하고 만 인물들이 보게 되는 환상은 무의식적인 그리움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 좋았습니다.
      일종의 자폐처럼 자신의 원초적 욕망에 결국 갇혀버리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리움과 후회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됬네요.
      물론 다른 부분들도 좋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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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 구글에 떠서 봤는데 내용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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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버사이코
    • 명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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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히얀
    • 엣지러너 보고 나면 I Really Want To Stay At Your House가 들릴 때마다 자동으로 눈물이 흐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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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8.235
    •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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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 좋은 분석입니다 빛에대한 분석이 특히 좋았던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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