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공포 영화 주인공은 멍청해야 한다는 규칙 [영화]

영화 <캐빈 인 더 우즈>(The Cabin in the Woods, 2012)
글 입력 2023.01.0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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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를 보면 등장인물의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 곳에 무턱대고 들어가고, 아무리 생각해도 함부로 손 대면 안 될 것 같은 물건을 덥석 집어 든다. 저 정도면 위험을 자초한 것이 아닌가 싶도록 어리석은 등장인물의 모습에 답답해진다.


하지만 이들의 답답한 행동이, 모두 타의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이들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공포 영화를 비트는 공포 영화 <캐빈 인 더 우즈>(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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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캐빈 인 더 우즈>의 주인공은 노인의 경고를 무시하고 외딴 오두막집으로 휴가를 떠나는 다섯 명의 대학생이다. 이것만 보면 여느 공포 영화와 다르지 않지만, 이들을 몰래 지켜보는 지하 연구소가 있다는 점은 독특하다.


영화 초반부터 존재감을 뽐내던 이 연구소는 영화가 진행되며 그 정체를 드러낸다. 이들은 원격 조종으로 오두막집의 상황을 통제하며 우리가 아는 공포 영화의 클리셰를 충족해나가는 집단이다.

 

이들의 목적은 지하 깊은 곳에 있는 강력한 고대 신을 만족시키는 것. 고대 신이 원하는 조건에 맞춰 제물을 바치기 위해 연구소는 갖은 방법을 통해 주인공 일행이 시나리오대로 행동하도록 몰고 간다. 만약 의식이 실패한다면 고대 신이 일어나고 세상은 곧 멸망하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는 새 연구소의 화학 약품에 당한 주인공 일행은 멍청한 금발 ‘매춘부’, 힘이 센 ‘운동선수’, 똑똑하지만 재미없는 ‘학자’, 실없는 말만 하는 ‘광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얌전한 ‘처녀’라는 역할에 맞는 성격으로 변해가며 한 명씩 죽어 나간다. 그러다가 변수가 생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영화의 전개는 예측불허로 흘러간다.

 

 

 

제물을 바치는 현대인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공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는 이 연구소의 직원들이다. 이들은 의외로 상황을 통제하는 데 미신적 힘을 쓰지 않고 오로지 과학적인 수단만을 사용한다. 공포 영화의 흔한 과학자 악당처럼 엽기적인 실험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마취제나 흥분제 같은 걸 방사하며 정서를 조작하고, 기계를 조작해 지하실 문이 열리도록 하는 식의, 지극히 현실적인(?) 방법으로 비현실적인 사건을 끌어낸다.


이들이 초자연적 존재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괴물들이 주인공을 직접 처리하게 내버려 둘 때뿐이다. 그 괴물들마저도 무슨 주술이나 의식을 통해 불러오는 게 아니라, 새하얀 방에 하나씩 갇혀 있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두막이 있는 숲으로 올려보내진다. 평범해 보이는 직장인들이 현대적인 구조와 기능의 연구소에서, 평범함이나 현대와는 한참 동떨어진 미신적 존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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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리에 굴러가는 집단임을 고려할 때, 연구소는 엄청난 규모를 가지고 있다. 몇몇 괴짜 과학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여러 부서를 체계적으로 갖춘 제대로 된 연구소다. 위험한 괴물들을 가둬두고 있는 만큼, 넉넉한 보안 인력은 덤. 여기서 일하는 수많은 직원은 살인에 힘쓰고 있으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즐긴다. 주인공 일행이 어떤 괴물로 죽을 것인지 단체로 내기판을 벌이는 모습은 기이할 정도다.


이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이 행위가 다수를 위한 소수의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테다. 어쩌면 자신들이 있기에 이 세계가 유지되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영웅으로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말미에는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주인공에게 세상의 안위를 위해 이 연극에 놀아날 것을 종용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고대 신이 지하로 들어간, 상상도 가지 않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이 의식은 성공리에 거행되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제물이 희생되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에 동의하고 참여했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양상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고대 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게 아닐까? 이 잔인한 의식을 만드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제물을 바쳐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무력하고 미개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구소 직원들을 보면 이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현대에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영화는 초자연적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는 가상의 이야기지만, 현실이라고 제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계 곳곳의 공포 영화 규칙, 우리나라라면?


 

영화의 또 하나 흥미로운 설정은 고대 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 잔혹한 연극이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영화에는 연구소 직원들이 다른 나라의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장면이 나온다. 연극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여러 연극을 꾸몄으며, 하나의 예로 일본에서는 한 학급에 초등학생들을 가둬놓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전통적인 일본 귀신의 제물로 바친다. 각국의 공포 영화 클리셰에 맞게 의식을 치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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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연극이 우리나라에도 존재한다면 어떤 설정이 있었을지 궁금해진다. 최근에는 변하는 중이지만 전통적인 한국형 공포 영화는 원한을 가진 악귀들이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가 많다.

 

이걸 우리나라 공포 영화의 클리셰로 가정한다면, 가해자와 피해자를 무작위로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연극을 꾸미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느라 더 끔찍한 조작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복수를 원하는 한국 귀신들의 원조 격인 장화홍련전을 예시로 들자면, 장화와 홍련 같은 불쌍한 아이들을 괴물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들이 죽을 상황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귀신 장화홍련을 데리고 본격적인 의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반전을 추가해 귀신 자매가 연구소 직원들을 향한 복수까지 성공한다면 더 재밌겠다. 공포 영화를 비튼 <캐빈 인 더 우즈>를 또 한 번 비튼 공포 영화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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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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