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뇌 과학으로 사람을 들여다보다 - ‘뇌 까리다: 젠더탐구’ 이지영 연출

글 입력 2022.12.2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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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전쟁’이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 되어버린 근미래, 메디아라는 새 대통령이 나타나 기존의 여/남 두 개의 젠더 대신 ‘중립적’이고 ‘오차 없는’ 뇌 과학에 근거한 12젠더 분류법을 제안한다. 각 개인은 뇌 검사를 받고 새롭게 부여받은 젠더에 따라 자신의 직업까지 바꿔야 한다. 그것이 본래 자신의 뇌 적성에 가장 잘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책이 시범으로 적용된 엘리시온 시민들은 혼란에 휩싸인다. 메디아의 개혁은 오래된 갈등을 봉합할 묘수일까, 아니면 또 다른 갈등의 불씨일까.


이지영 작/연출의 ‘뇌 까리다’ 시리즈 세 번째 작품, <뇌 까리다: 젠더탐구>는 관객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다. 이야기 자체는 크게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연극이 가진 논점은 하나가 아니고,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논점을 발견해낼 수 있기에 볼 때보다 보고 나서 더 많은 생각을 불러온다. 과학이 과연 가치중립적인 분야인지부터 시작해서 우리 사회의 젠더이분법, 성 불평등과 관련된 수많은 질문이 극장 밖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뇌는 아직 인간이 잘 알지 못하는 신체 부위 중 하나다. 뇌 과학이 탐구할 영역이 넓은 만큼, 뇌 과학과 연극의 조합으로 다룰 수 있는 주제는 광범위할 것이다. ‘뇌 까리다’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는 이지영 연출을 만나 세 번째 주제인 ‘젠더탐구’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뇌 과학과 연극의 결합, ‘뇌 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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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뇌 까리다: 젠더탐구>는 친일탐구, 권력탐구에 이은 ‘뇌 까리다’ 시리즈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뇌 까리다’는 어떤 시리즈이며 이번 연극은 어떤 작품인지 소개도 부탁드립니다.


뇌 까리다 시리즈는 ‘권리장전 페스티벌’에서 처음 선보였어요. 당시 페스티벌 주제가 ‘친일탐구’였는데, 어떻게 접근해볼까 고민하다가 친일 부역자들의 뇌를 한번 ‘까보자’는 생각을 했죠. (웃음) 또 ‘뇌까리다’에는 ‘아무 말이나 지껄이다’라는 뜻도 있으니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잘 맞겠다 싶었어요.


한번 해보니까 뇌 과학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사람을 보는 것이 흥미롭더라고요. 그래서 첫 번째 공연 후 권력자들의 뇌를 들여다보는 <뇌 까리다: 권력탐구> 편과 이번 <뇌 까리다: 젠더탐구> 편까지 만들었어요. 앞선 두 공연은 공연에 강연 형식을 도입한 ‘렉처 퍼포먼스’에 가까웠는데, ‘젠더탐구’ 편의 경우 서사의 비중이 이전보다 더 큰 공연인 게 특징입니다.

 

 

인간의 뇌에 꾸준한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연출님이 뇌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대학원에서 ‘그로토프스키의 배우 훈련법’을 뇌 과학적으로 고찰해보는 소논문을 쓴 적이 있어요. 그때 뇌 과학을 공부하면서 우리 뇌가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서, 권리장전 페스티벌에서도 제가 먼저 ‘친일탐구’라는 주제에 뇌 과학적으로 접근해보자고 제안을 했어요. 연극에 뇌 과학을 결합하는 시도가 많지 않으니까 신선하고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해서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젠더’라는 굉장히 뜨거운 주제를 갖고 작업하셨습니다. 쉽지 않았을 듯해요. 어쩐지 부담스러운 주제였을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떻게 정해진 주제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젠더감수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금 젠더를 화두로 일어나고 있는 첨예한 갈등에 대해서 발화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공연을 기획할 당시 제가 젠더 이슈에 관심이 많은 시기이기도 했고요. 물론 젠더 문제 중에서도 트랜스젠더 이야기처럼 제가 당사자가 아닌 부분은 접근이 유연하지 못하거나 포착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놓치는 부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배우분들의 친구와 지인분들 이야기를 많이 수렴하고 저희 팀이 다 같이 관련 주제를 공부하며 공연을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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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준비하신 공연이 드디어 무대에 올랐는데요, 공연을 보신 연출님의 소감은 어떤가요? 생각만큼 잘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아쉬운 부분이 보이기는 해요. 연습 때는 잘 안 보여서 실제 공연을 하며 흐름을 찾아가는 지점이 많아요. 첫 회차 공연 때 다 보여주지 못한 호흡이나 템포, 강조점이 두 번째, 세 번째 공연에서는 좀 더 살아나는 게 보이더라고요. 공연 회차가 더 많았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들어요. 


극장 활용도 공연을 진행하며 보완한 부분이 있어요. 극장 PLOT은 가변형 극장인데, 이런 극장은 객석을 어떻게 배치하고 무대를 어떻게 쓸지 창작진의 아이디어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게 매력적이에요. 그런데 막상 극장에서 리허설을 해보니 생각보다 공간이 넓어서 이야기가 자꾸 흩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파티션을 추가로 설치하며 급히 무대를 수정했죠. 스크린 역시 첫 공연 때는 한 면만 나왔는데 시야 방해구역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두 번째부터 두 면에서 재생되는 걸로 바뀌었고요. 

 

 

이번 공연을 만들며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들’ 역할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성전환을 결심한 아들에게는 젠더가 목숨과도 연결되는 정말 중요한 문제예요. 반면, 12젠더분류법으로 각자 다른 젠더를 받은 사람들의 거부 반응은 그 젠더가 진짜 자신의 본질과 맞닿아 있지 않은 데에서 오는 불편함보다는 그냥 그 젠더의 직업군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하는 불평이 대부분이거든요. 아들이 젠더를 대하는 태도와 다른 사람들이 젠더를 대하는 태도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관객들과 젠더란 무엇인지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혹시 공연을 준비하며 참고했던 작품이나, 이 공연을 본 관객들이 읽어볼 만한 자료가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가 공연을 준비하며 많이 읽었던 책 몇 권을 소개해 드릴게요. 『젠더, 만들어진 성』(코델리아 파인, 휴머니스트), 『젠더 감정 정치』(김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교차성x페미니즘』(한우리, 김보명, 나 영, 황주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뷰티풀 젠더』(아이리스 고틀립, 까치),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강남순, 한길사) 『커넥톰, 뇌의 지도』 (승현준, 김영사) 입니다.

 

 

 

메디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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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젠더분류법이라는 아이디어가 정말 독특했어요. 연출님 아이디어인가요?


네, 저는 젠더리스 사회로 가는 것이 굉장히 힘들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 중간 단계인 12젠더분류법이 있어야 한다고 봤어요. 아이디어를 내고 12개로 나뉜 젠더에 해당하는 직업군을 하나하나 정한 건 저고, 관객분들이 QR코드로 해본 젠더검사의 알고리즘을 생각한 건 조연출님이에요.


극에서 새로운 젠더분류법을 고안한 건 메디아인데, 저는 메디아가 젠더리스 사회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은 아니라고 봤어요. 기존의 젠더 이분법에서 여성인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서, 또는 경험에 형평성이 있다면 성차별이 없을 거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메디아가 사적 복수에만 매달리는 인물로 납작하게 표현되지 않기를 바랐어요. 메디아도 자신의 부당함을 알리고 젠더 이분법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측면이 분명 있으니까요. 메디아의 그런 복잡한 면모를 표현하는 게 조금 어려웠습니다.

 

 

저도 메디아의 입체성을 표현하는 게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혹시 연극에서 메디아의 입체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신경 쓰신 부분이 있다면 한 가지 정도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메디아가 국민에게 사과를 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다음 유튜버가 등장해 악담을 막 해요. 물론 메디아도 뇌 검사 결과를 조작했다는 잘못이 있지만, 이 장면을 통해 사람들이 메디아라는 사람을 총체적으로 본다기보다 그의 잘못을 여성성과 연관시켜 이런 식으로 또 한 명의 여성을 부정적으로 ‘소비’했다는 게 느껴지기를 바랐어요. 

 

 

메디아를 비롯해 이아손과 크레온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자 에우리피데스가 쓴 비극의 등장인물이고 한데요, 이 셋을 2050년 배경의 이야기에 데려온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메디아라는 인물은 누가 해석하고 어떻게 무대에 올리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양한 모습이 되더라고요. 천하에 나쁜 여자로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어떻게 보면 메디아도 국가가 개인에게 휘두른 폭력의 희생자인데 그때 메디아라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사적인 복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고요. 그런 부분이 흥미로웠어요. 또, 이아손은 메디아라는 막강한 여성 뒤에 숨어 그를 이용하다가 크레온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자 배신하죠. 크레온은 가부장적인 면모가 있는 인물이고요. 인물들의 특성이 워낙 뚜렷하기에 그 특성을 가져오면 2050년 배경에서도 흥미로운 상황이 전개될 거라 생각했어요. 

 

 

연출님은 극 중 제시된 새로운 젠더분류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금 하는 일과 전혀 다른 일이 적성이라고 나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는 사실 생각보다 사회 순응적인 사람이거든요. (웃음) 만약 진짜로 그런 전쟁이 일어나 피해가 막심하고, 사람들이 다 기존의 젠더라는 것이 너무 지긋지긋하던 시점에 누군가 혜성처럼 나타나 그런 제안을 한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요. 실제로 연극 속 상황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공연 시작 10분 전부터 젠더 전쟁이라는 가상 상황에 대한 영상을 계속 틀어두었고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과학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믿음에 기반한 정책이라면 꽤 그럴듯해 보일 것 같아요. 저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저라면 어쩔지 생각해봤는데 저 역시 과학적으로 반박할 근거를 찾지 못하면 받아들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웃음)


맞아요. 말씀을 들으니 생각난 건데, 사실 이번 연극에서 뇌 과학의 중립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공연 준비 과정에서 공부하며 알게 되었는데, 뇌 과학의 연구 결과물도 실험자가 가진 편견이나 왜곡된 인식의 영향을 받아 완전히 중립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잘 드러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지점도 연극에 녹여내고 싶었어요.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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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님은 원래는 배우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뇌 까리다’ 시리즈로 연출도 하게 되신 건가요? 


네, 맞아요. ‘뇌 까리다’ 시리즈를 다른 작가님께 맡기려니 뇌 과학 공부가 따로 필요한 부분이라 여러 가지로 곤란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부족하지만 제가 극을 쓰기 시작했어요. 계속 극을 써오던 작가가 아니라서 드라마성이나 완결성은 좀 약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부분을 렉처 퍼포먼스나 관객 참여적인 요소를 통해 보강하려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공연에서도 관객에게 QR코드를 나눠주고 젠더 검사를 시킨 것, 연극 중간중간에도 배우들이 계속 말을 걸었던 게 기억에 남아요.


이번 연극이 완벽한 관객참여형 연극은 아니지만, 저희 세계관을 관객분들이 함께 고민해보고 그 상황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젠더 검사는 해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재판 장면의 경우도 재판 방청객이나 그 재판을 실시간으로 보는 시청자는 되어야 이 연극이 주는 메시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질문도 많이 드렸죠. (웃음)

 

 

이번 공연에 대한 반응을 계속 모니터링하고 계신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뇌 과학과 젠더’라고 했을 때 너무 어렵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하시면 어쩌나 염려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다들 재미있게 봐주세요. 우리가 이야기하려 했던 지점을 엄청 정확하게 짚어서 쓰신 리뷰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 공연을 더 심화, 발전시킬 수 있겠다는 확신이 조금씩 생겨요. 모든 피드백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저희가 계획하는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모든 이야기를 감사하게 읽고 있어요. 

 

 

세 번째 공연까지 해서 이제는 ‘뇌 까리다’가 어엿한 시리즈가 된 것 같은데요, ‘뇌 까리다’ 다음 시리즈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일단은 이번 공연에 대한 피드백을 많이 듣고 난 다음, 지금의 ‘젠더탐구’를 한 번 더 발전시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이번 공연이 입문편에 가깝다면 다음번에는 심화편이 되는 거죠. 그때는 더 많은 의견을 수렴하고, 성소수자의 직접적인 이야기를 다루거나 성소수자 배우님과 공연을 함께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이 작업을 준비하고 젠더라는 게 무엇인지 탐구하는 과정에서 제가 실수하거나 왜곡한 부분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이 문제에서 제가 갖게 된 한 가지 굳은 믿음이 있어요. 개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만으로도 해결될 문제가 많다는 거예요. 함께 공부하며 그걸 많이 느꼈어요. 존중 없이 차별과 혐오, 배척과 터부시로 이어진다면 갈등의 골은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어요. 이번 공연이 관객분들에게 사람 자체에 대한 존중을 한 번씩 더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공연, 많은 질문을 발생시키는 공연이라면 좋겠습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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