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제대로 짜인 웃음판, 국립극단의 '스카팽'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에 다시 돌아온 '스카팽'
글 입력 2022.12.26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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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 사진04.jpg

공연 사진: 국립극단 제공

 

 

최근 들어 웃으면서도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거나 분위기 따라 웃음소리를 내는 순간이 잦아졌다. 그래서인지 큰 고민 없이 웃는 것이 새삼스럽게 어렵게 느껴지곤 한다. ‘진짜 웃음’이 생각보다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가 뭘까. 일상에서의 웃음은 찰나의 순간에만 갑작스럽게 찾아올 뿐, 기존의 분위기가 다시금 공기를 장악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저 유쾌한 진짜 웃음이 필요할 때, 그 웃음판은 현실과 확실히 유리되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쉽사리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빠져드는 것이다. 마음껏 웃을 준비를 마친 상태로 말이다.


내게는 최근 만나게 된 국립극단의 희극 레퍼토리 〈스카팽〉이 그런 세계가 되어주었다. 무대를 신선하게 감상하기 위해 최소한의 정보만 숙지한 채로 공연장에 들어섰는데, 예상치 않게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순도 높은 웃음이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스카팽〉은 2019년 국립극단에서 제작 초연된 이후로 월간 한국연극 선정 '2019 올해의 공연 베스트 7', 제56회 동아연극상 무대예술상 등의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국립극단 대표 레퍼토리다. 올해는 임도완 연출의 지휘 하에 기존 공연에 참여했던 강해진, 김명기, 이중현, 문예주, 박경주, 성원, 이호철 배우와 더불어 시즌단원 김예은, 안창현, 이혜미 배우가 참여했으며 지난달 23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해 성탄절에 마지막 공연을 마쳤다.


 

"우리가 곤란할 때 언제나 멋지게 도와줄 사나이, 스카팽"

 

막이 오르면 작가 몰리에르가 무대 위에 등장한다. 몰리에르는 자신과 작품 그리고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다 같이 노래를 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재벌가인 아르강뜨와 제롱뜨는 자식의 정략결혼을 약속하고 여행을 떠난다. 그 사이 둘의 자식들은 각자 신분도 모르는 사람들과 사랑에 빠진다. 부모의 정략결혼 약속을 알게 된 두 자식들은 제롱뜨의 하인 스카팽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그렇게 젊은이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한 약간의 사심을 담은 스카팽의 계략이 시작된다.


"사실 제가 끼어들어, 해결 안 된 건 거의 없죠." 

 


국립극단의 〈스카팽〉은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극작가 몰리에르의 〈스카팽의 간계 Les Fourberies de Scapin〉(1671)를 원작으로 한다. 하인 ‘스카팽’이 두 집안의 정략결혼에 맞서 재치 있는 속임수로 두 자녀들의 진짜 사랑을 돕는 내용인데, 국립극단의 〈스카팽〉에서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바로 극작가인 몰리에르가 직접 등장한다는 점이다. 원작자가 직접 등장하는 공연이라니, 자신이 직접 쓴 공연에서 그는 대체 어떤 캐릭터를 보여주게 될까.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사진16.jpg

 

 

관객석이 소등되자 몰리에르는 곧바로 무대에 올라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무대를 가린 휘장 앞에서 그는 자신을 소개한 뒤 자신이 이끄는 유랑극단에 대해, 그리고 오늘 공연할 ‘스카팽’에 관해 설명한다. 휘장이 올라가면서 이동식 무대에 자리를 잡은 배우들이 공연의 주제가를 부르며 관객석 쪽으로 전진한다. 무대 오른편에 위치한 몰리에르의 책상은 무대와 명확히 분리되어, 극중극 바깥의 영역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배우들’은 몰리에르와는 달리 새하얀 얼굴과 짙은 눈썹 등의 과장된 분장을 한 모습으로, 이 역시 그러한 특징을 부각시킨다.


극의 발단은 가난한 이아상뜨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 재벌가의 자제 옥따브가 위기를 맞이하며 시작된다. 옥따브의 어머니인 아르강뜨가 또 다른 재벌가인 제롱뜨와 자녀들의 정략결혼을 약속한 탓이다. 두 가문의 경영 관계를 위해 약속을 깰 수도 수도 없다. 옥따브는 하인 실베스트르와 함께 제롱뜨 집안의 하인인 스카팽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사기에 가까운 계략에 능한 스카팽은 이들의 간절한 부탁에 도움을 주기로 한다.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사진08.jpg

 

 

스카팽은 이 사건을 풀어내기 위해 우선은 아르강뜨를 설득한다. 아르강뜨의 젊을 적 추억까지 얘기하면서 사랑과 운명을 들먹이지만 통하지 않는다. 그러자 자신이 모시는 제롱뜨의 아들 레앙드르의 연애사를 슬쩍 까발린다. 옥따브의 막역한 친구이기도 한 레앙드르도 집시 여인인 제르비네뜨와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흘려들은 아르강뜨는 제롱뜨의 아들도 옥따브와 다를 바 없다는 점에 기세등등해지고, 제롱뜨 역시 아들과 갈등을 겪게 된다.

 

스카팽은 두 아들들이 필요한 돈까지도 각자의 부모에게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먼저 아르강뜨에게는 이아상뜨의 오빠가 돈을 내놓아야 그녀를 파혼시키겠다고 협박했다고 말한다. 그럴 바에 소송을 걸겠다고 하는 아르강뜨에게, 재판 과정이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운지 술술 이야기한다. 그 과정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몰리에르가 재판장 역으로 직접 무대에 올라 과장된 연기를 펼치는 장면도 백미다.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사진18.jpg

 

 

그리고 제롱뜨에게는 아들 레앙드르가 터키 군함에 인질로 납치되었다며, 그를 구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그 돈은 제르비네뜨를 키워준 이집트 집시들이 레앙드르에게 그녀를 데려가려면 내놓으라고 요구했던 금액이다. 거짓말에 속아넘어간 제롱뜨가 하인 스카팽에게 돈을 대신 건네길 불안해하자, 스카팽은 펄쩍 뛰며 자신을 그 정도로밖에 신뢰하지 못하시느냐고 한탄해 능청스럽게 위기를 모면하기도 한다.


이렇게 돈 문제는 해결됐지만 근본적인 문제들은 어째 더 심각해져 버린다. 아르강뜨는 이아상트의 오빠에게 돈을 건넸다고 여기고 있으니 옥따브가 이아상뜨와 파혼하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게다가 스카팽은 주인 제롱뜨를 향한 오랜 앙금을 품고, 터키 군인들이 이제는 제롱뜨를 찾으러 왔다며 그를 자루 안에 숨게 하고 흠씬 두들겨 패다가 들켜버린지라 모든 거짓말이 들통난 상태다. 이 실타래처럼 꼬여버린 서사는 다소 김새는 방식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다급한 해피엔딩에 배우들마저도 몰리에르에게 ‘이런 막장이 어딨느냐’고 타박하는 장면이 폭소를 불러온다.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 사진06.jpg


 

〈스카팽〉의 관전 포인트는 글머리에서도 언급했듯 액자식 구조에서 오는 특징에 있다. 극중극의 서사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무대 바깥의 사건들이 끼어드는 순간들이 특히나 유쾌하다. 몰리에르는 계속 자신의 책상에 앉아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데, 배우가 긴 대사를 무사히 쳐내거나 어려운 액션을 해내면 안도하곤 한다. 이동식 무대 위의 사건에서 잠시 눈을 돌려 책상에 앉은 몰리에르의 반응을 살피는 것도 소소한 재미를 가져다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연극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순간도 왕왕 등장하는데, 배우가 부족해 양해를 구한다는 내용의 팻말을 무대 위에 설치한 뒤 잠깐 등장하는 단역을 대신 연기하기도 한다. 배우가 대사를 까먹고 버벅거리자 무대 위로 쳐들어와 벌컥 화를 내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끼어들어 분위기가 어정쩡해지고 흐름이 끊기면, “연결해.”라고 툭 지시하고 배우들에게 수습을 맡기는 장면도 유행어처럼 수차례 등장해 웃음을 자아낸다.


주로 몰리에르가 위치한 이동식 무대 바깥의 영역은 액자식 구성에서 액자틀에 해당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액자틀의 경계를 몰리에르뿐만 아니라 모든 캐릭터들이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연기하지 않는 배우들은 이동식 무대 아래의 의자에 앉아 동료의 연기를 지켜보는데, 이때 북이나 리코더, 멜로디언 등의 악기를 직접 연주하며 배경음악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다 자신이 무대에 오를 차례가 되면 자연스럽게 무대 위로 나선다. 


무대음악의 주축이 되는 김요찬 음악감독의 라이브 연주 역시 공연의 즐길거리에 풍성함을 더한다. 신체극으로 잘 알려진 임도완 연출의 영향으로 의자나 탁자 등 무대소품을 십분 활용한 다양한 모션이나 판토마임 등의 움직임 요소가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모든 타이밍마다 완벽하게 들어맞는 효과음들이 슬랩스틱이나 드럼 등의 다양한 악기로 연주된다. 무대 위의 상황을 주시하고 배우들과 소통하며 실시간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연주자의 모습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끝없는 연습과 노력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연출이었기에, 작은 실수마저 없는 완벽한 장면들에 관객들의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국립극단] 스카팽(2022) 공연 사진01.jpg


 

또 고전 희극에 결합된 동시대적 유머도 매력적이다. 배우들은 극의 특성에 걸맞게 고전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과장된 연기를 펼치는데, 그 와중에 마이클 잭슨의 춤 동작을 따라하거나 빠른 랩 박자에 맞추어 대사를 뱉는다. 정치인 성대모사나 장기하의 노래가사 등 미디어에서 유행하는 다양한 밈을 패러디해 대사를 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의 오늘날을 상기시키는 말재간들은 17세기 프랑스 사회의 맥락 속에서도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융화된다. 


〈스카팽〉은 대중적인 유머코드와 액자식 구성으로 재해석한 기발한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흠잡을 데 없는 노련한 연기로 완성된 훌륭한 공연이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었다면, 풍자극 고유의 색채는 옅었다는 점이다. 몰리에르의 원작은 당대의 시대상과 밀착된 귀족 사회의 가식을 통렬히 풍자한다. 국립극단의 스카팽 역시도 그 주제를 동일하게 가져가고 있지만 공연의 전반적인 흐름에서 풍자적인 뉘앙스은 그다지 묵직하지 않다. 극중 스카팽의 모습에서도 통쾌함보다는 무모함이 두드러진다. 


이는 무게를 덜어낸 가벼운 웃음을 노린다면 좋은 전략이다. 웃음 너머의 비판적인 코드가 존재감을 드러낼수록, 그 웃음 끝에는 씁쓸함이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사의 높은 밀도와 완성도 덕에, 전체적인 서사에 그 이상의 깊이를 기대하게 했다. 게다가 ‘가진 자들의 위선’은 어떤 시대에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재다. 극중에서 아르강뜨나 제롱뜨 등 재벌가의 행태를 보여줄 때, 오늘날의 시선에서 극적으로 몰입할 수 있을 만한 요소가 부각되었다면 어땠을까. 

 

*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극장 운영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면 바로 다양한 관객들의 관람 접근성을 확대하는 데 힘썼다는 점이다. 공연 기간 내 3일을 배리어프리 회차로 운영했다고 한다. 배리어프리 좌석과 한글자막, 음성해설, 한국수어통역이 제공되었다고 하는데, 일반 회차에서도 요일을 지정해 한글자막 또는 영문자막을 송출했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열린 공연 문화를 위해 힘쓰는 국립극단의 행보를 응원하면서, 그리고 언젠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올 〈스카팽〉을 기대하면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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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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