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오네스코 - 대머리 여가수 [도서/문학]

외젠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에 대하여
글 입력 2022.12.1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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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부인: 전 오빠한테 주머니칼을 사줄 수 있어요. 하지만 조부님께 아일랜드를 사드릴 수 있으세요?

스미스: 인간은 이동은 발로 하지만, 몸은 전기나 석탄으로 덥혀요.

마틴: 오늘 황소를 팔면, 내일은 달걀 주인이 되죠.

스미스 부인: 인생을 살면서 창밖을 봐야 돼요.

마틴 부인: 아무것도 없는 의자에도 앉을 수 있어요.

스미스: 늘 모든 경우를 생각해야죠.

마틴: 천장은 위에 있고, 마루는 밑에 있어요.

스미스 부인: 제가 '네' 하면, 그게 제 화법이에요.

마틴: 각자 운명이 있듯이.

스미스: 순환논법도 원의 일종이죠. 잘못된 원.

(11장, 「대머리 여가수」)


뭔 소리야. 도통 뭔 얘긴지 무슨 맥락인지 파악할 수 없는 문장들이 극을 뒤덮고 있다. 말 잇기처럼 사방으로 펼쳐지는 문장들. 이 극은 ‘조리 없음’이라는 유일한 구심점을 확보한 채, 무작위·무의미하고도 혼돈스럽게 전개된다. 아니, 보이고 있다.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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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 1909~1994)는 1909년 루마니아의 슬라티나에서 태어났다. 1911년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으나 동생의 죽음과 부모의 불화 등으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며 루마니아와 프랑스를 전전했다. 그는 이때부터 시와 희곡, 시나리오 등을 습작했으며 이후 대학교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1983년에 프랑스로 건너간 후, 전쟁의 불안정함 속에서 첫 번째 희곡 「대머리 여가수」(1950)를 발표했다.


「대머리 여가수」는 앞서 보았듯 의미가 없는 문장, 단어, 음절들로 대화를 시도하는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연극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는 마틴 에슬린(Martin Esslin)이 자신의 저서 『부조리극』에서 베케트, 이오네스코, 아다모프 등의 연극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인 ‘부조리극’으로 분류되는데, 부조리극이란 “통합된 원칙을 잃고 분열된 세계 속에서 느끼는 인간 존재의 우주적 상실감을 표현하고자 하는 연극”을 말한다.


1950년대 초반, 프랑스어가 모국어가 아닌 극작가들이 파리에 머무르며 전쟁의 폐허를 응시함으로써 인간 존재를 재고했고 이와 같은 인식에서 나온 자신들의 고통과 악몽을 종이 위에 쏟아놓았다. 그들의 현오한 부조리의 감정과 전통적 글쓰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반(反)연극적 형태로 표출되었다. 부조리극은 부조리함에 직면한 인간의 불안을 기저에 두고 진행되는 작품인 만큼, 부조리에 대한 논증 전개를 배제하고 구체적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그저 ‘보인다’. 세인들의 막연하고 근거 없는 조리 앞에 그들이 믿으려 하지 않는 적나라한 부조리를 늘어놓는다. 하여, 이성적 사고, 논리, 줄거리 등을 배격하는데 가장 주요한 공격 대상은 아무래도 조리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 ‘말’이다.

 

이러한 부조리극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는 플롯의 부재, 정체성 없는 꼭두각시형 등장인물, 동문서답식 말 주고받기, 언어적 혼란 등 그 특성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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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그럼에도 간단히 요약을 시도해 보자면, 막이 열리고 부르주아 가정의 거실이 보이며 영국인 스미스 부부가 등장하는데, 스미스 부인은 저녁에 먹은 수프, 생선, 감자튀김 얘기, 국에다가 소금을 너무 많은 넣은 얘기 등 수다를 쏟아놓는다. 스미스는 파선 당한 배의 선장처럼 환자와 함께 죽어가는 의사가 좋은 의사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신문을 읽으며 왜 사망자의 나이는 나오는데 태어난 사람의 나이는 밝히지 않는지에 대해 의아해한다.

 

이후 시계가 일곱 번 친다. 침묵, 시계가 세 번 친다. 시계가 한 번도 치지 않는다. 화제가 바뀌어 누가 누군지 확실하지 않은 보비 왓슨 가의 이야기가 나오고, 하녀 메리가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마틴 부부가 손님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스미스 부부와 마틴 부부 네 사람이 식탁에 앉아 있는데, 초인종이 울리나 바깥에 아무도 없는 기묘한 일이 세 번 반복된 후, 네 번째에 소방대장이 들어온다.

 

소방대장은 자신의 일화를 소개하고 하녀 메리가 그를 위해 ‘불’이라는 시를 낭송한다. 이후, 하녀 메리와 소방대장은 퇴장하고 스미스 부부와 마틴 부부는 앞에 나왔던 11장처럼 동문서답의 대화를 시작한다. 리듬이 빨라지고 인물들의 말투가 공격적으로 변모하며 문장이 해체되고 음절, 자음과 모음이 고함처럼 터져 나온다. 이후 갑자기 대사가 중단되고 다시 조명이 들어온다. 마틴 부부가 처음의 스미스 부부처럼 앉아 그들의 대사를 그대로 되뇌며 막이 내린다.

 

 

 

마틴 부부는 부부인가


 

마틴 부부의 등장 장면은 참으로 기이하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람인 듯 부끄러워하다가 혹 어디서 우리가 본 적이 있는지 묻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그 둘은 맨체스터 출신이며 같은 시각에 같은 기차를 탔고 같은 주소, 같은 층, 같은 방에 살고 있으며 같은 딸을 갖고 있음을 알아낸다. “희한하네요, 정말 신기하네요, 우연의 일치군요.” 시계가 스물아홉 번 치자, 마틴 부부는 엄숙하게 일어나 서로가 부부임을 자각하고는 껴안는다. 그러나 뒤에 하녀 메리가 등장하여 그들은 사실 진짜 부부가 아니라 서로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말을 덧붙이며 확신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그 둘이 진짜 부부인지, 모르는 사이임에도 착각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오네스코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닮았고 누가 누구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즉 그들이 서로를 몰라보는 이유는 갑작스럽게 기억력에 큰 문제가 생겨서라기보단, 개체성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관습 때문에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 진정으로 서로를 알아보지는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진실이 무엇이든 마틴 부부는 서로가 부부라는 사실, 혹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실존에 처해있다. 이는 자기 소외와 현대인의 소통 단절이라는 주제를 선명히 노정한다.

 

 

 

스미스 부부는 마틴 부부인가


 

갑자기 대사가 중단된다. 다시 조명이 들어오면 마틴 부부가 첫 장면의 스미스 부부처럼 앉아 있다. 연극이 다시 시작된다. 마틴 부부가 최초 스미스 부부의 대사를 그대로 되뇌는 가운데 서서히 막이 내린다. (11장 막, 「대머리 여가수」)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들은 역할을 바꾸어 다시 작품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마틴 부부나 스미스 부부나 아무런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성이 전무한, 서로 교환 가능한 인간이다.

 

 

스미스 부부, 마틴 부부는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고 어떤 열정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누군가, 다른 사람, 어떤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독자적인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항상 '다른 사람‘이다. (…) 그들은 교체 가능하다. (외젠 이오네스코, 『노트와 반노트』)

 


즉 순환하는 영원의 시간 속에 갇혀버린 스미스 부부는 마틴 부부이고 마틴 부부는 스미스 부부이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는 당시의 부르주아적 세계를 현시하는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관습적 행동, 기성 관념에 순응하는 사고, 앵무새와 같이 판에 박힌 언어만을 구사하는 행위들이 인간을 대체 가능한 일상의 기계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읽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은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2022년 버전 「대머리 여가수」를 새롭게 만든다고 하면 여기서 얼마나 달라질까. 그러다 현시대의 문제점을 꼬집고 적절한 비유를 들어 비판하기엔 그 도량이 너무 커서, 세인인 나로 고개를 돌려보기로 한다. 무의미한 관습적 행동, 기성 관념에 순응하는 주체성을 상실한 사고, 본 대로 쓰인 대로 뱉는 나의 것이 아닌 나의 언어. 내 것인지 네 것인지 나의 견해인지 세상의 견해인지 출처를 상실한 문장들. 갖은 수식어구들로 길고 휘황해진 활자들. 하지만 속 빈 강정. 그러니 내가 말해도 네가 말해도 남이 말해도, 내가 나여도 너여도 남이어도 점점 무방해지고 있다.

 

 

 

말은 달리는가 다른가 닳았나



이제껏 사람들은 언어가 인간의 감정, 사고를 전달하고 의사소통을 주도하는 수단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조리극들은 이러한 언어에 대한 믿음을 붕괴하고 언어를 통한 소통 불가능의 세계를 보여준다. 상투적인 표현들, 해체된 문장들, 어휘들의 편집광적인 기계성, 의성어 사용 등 여러 기법을 통해 언어가 소통의 도구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소통을 성립시키지 못하는 장애물임을 보여준다.


스미스: 아, 세, 이,오, 우, 아, 세, 이, 오, 우, 아, 세, 니, 오, 우.

마틴 부인: 비, 시, 디, 휘, 기, 리, 미, 니, 피, 히, 시, 티, 뷔, 지, 쥐.

스미스 부인: (기차를 흉내 내며) 칙칙, 폭폭, 칙칙, 폭폭, 칙칙, 폭폭, 칙칙, 폭폭, 칙칙, 폭폭

스미스: 그.

마틴 부인: 쪽.

마틴: 아.

스미스 부인: 냐.

(11장, 「대머리 여가수」)


작품 끝에 이르면 기차가 미친 속도를 내어 달리듯, 등장인물들은 서로의 귀에다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말이 미친듯 질주한다. 결국 말이 달라지고 닳아, 고장 난다. 이 언어의 고장은 시니피앙(기표)과 시니피에(기의) 사이의 원활한 기능이 파열되었기 때문이다. 의미가 소리를 지배하는 관계에서 역전되어 소리가 의미를 앞서게 되었다. 그와 함께 말이 보증하고 있던 조리의 세계, 현실이 의미를 상실하고 붕괴된다. 논리적 연결이 와해되고 인과성 없는 ‘집단적 독백’ 상태가 무료하게 반복·변주된다. 인습적이고 기계적인 말의 난무 속에서 소통은 중지되고 인물들은 해체되었다.


이러한 언어의 발작 역시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언어, 소통 양상을 드러낸다. 허울만 남은 공허한 언어. 상투적이고 진부하여 내실을 유실한 말들. 별로 특별한 의미가 없는 말들. 즉, 아무것도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는 자음과 모음들로 뒤섞인 고함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대머리 여가수는 어딨는가


 

작품의 제목 「대머리 여가수」에서 ‘대머리’와 ‘여가수’라는 단어의 어색하고도 오묘한 결합은 우연적 콜라주의 형태를 띤다. 작품에서 대머리 여가수는 딱 한 번 소방대장에 의해 아주 사소하게 언급될 뿐이다. 마치 그들이 나누는 ‘개와 소’,‘송아지’,‘닭’,‘뱀과 여우’,‘꽃다발’,‘감기’같은 우화들처럼 어쩌다 그냥. 즉 대머리 여가수가 제목이 된 특별한 의미가 없다. 이렇듯 무작위로 무의미의 제목을 설정함으로써 이오네스코는 반(反)제목, 반(反)연극에 방점을 찍는다.


부조리함을 해설해 줄 대머리 여가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가. 불행, 아니 당연하게도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다. 이 부조리함을 어떻게 타파해야 하는지 이오네스코는 극에서 답을 주지 않는다. 그의 극은 충격 기법을 통해 현실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황당하고도 비현실적인, 아무 일도 시작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일도 진정으로 끝나지 않는, 시작도 끝도 없는 극을 통해. 관객들이 극을 보고 크게 비웃을수록, 그것이 우리네 세상이며 현실임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충격도 비례하여 커지도록.


소방관: (출구로 향하며 멈춘다.) 그런데 대머리 여가수는요?

(전체적 침묵, 어색함)

스미스 부인: 그녀는 늘 같은 방식으로 머리를 해!

(10장, 「대머리 여가수」)


대머리 여가수는 분명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극을 본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대머리 여가수’만이 남는다. 없지만 있는, 이것이야말로 지고의 부조리함. 한편으로, 그녀는 없기에 동시에 누구든 될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얼마든지 대머리 여가수를 지정하거나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그 조리와 부조리의 간극에서 오는 충격은 고스란히 자신의 것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대머리 여가수」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곳에서 우린 뭐든지 할 수 있게 된다.

 

 

참고 문헌

이선형, “「대머리 여가수」에 나타난 언어의 문제”, 『프랑스문화연구』, 프랑스문화학회, 2009

김찬자,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읽기』, 세창미디어, 2013

외젠 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 민음사, 2003

 

 

[박예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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