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닙니다, 자유는 전 원하지 않습니다 [도서/문학]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관하여
글 입력 2022.11.1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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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골라, 햇볕이 적당히 드는 자리에 앉아 자유롭게 글을 쓴다. 자유로운 나를 봐, 어쩜 이리 자유로워. 자유로운 개인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우린 이미 충분히 자유로워 보인다. 이런 나를 구속하는 것은 오직.... 내일 해야 할 과제와 오직...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오직... 앞으로의 취업 준비와... 오직.....

 

끝이 보이지 않는 오직의 향연에 자유로운 나를 구속하는 게 너무 많다는 걸 문득 깨닫지만, 뭐, 그래도 괜찮다. 모두들 이렇게 사는 거니깐.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해선 현재의 작은 자유쯤이야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아닙니다, 자유는 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Ein Bericht fur eine Akademie)에서 카프카는 묻는다. 사람들은 정말 자유를 원하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착각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출구를 찾아 길들여진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자유인으로서 현재를 살고 있음에도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니, 애초에 이 자유로움은 착각이라는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여기까진 얼마든지 이해 가능.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 자유를 원하냐’는 무슨 뜻인지 궁금해진다. 자유롭지 않길 원하는 사람도 있다는 건가. 모두들 자유를 위해 사는 것 아니었나. 일단 난 자유롭길 무척 원하는데.


그렇게 자유에 대한 생각에 꼬리를 잇고 잇다 보면, 이러한 자유의 모순성에 대해 꼬집은 사회심리학자, 그 이름도 유명한 ‘에리히 프롬’을 만나게 된다. 세기의 베스트셀러 『사랑의 기술』(1956) 전에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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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원하십니까?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1941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일 때였다. 따라서 저자는 시대 상황에 주목하여 극단적인 전체주의가 등장하고 개인이 그 전체주의에 동조한 이유에 대해 심리학적 설명과 역사적 설명을 결합해 풀어낸다. 독특한 점은 자유가 전향적인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을 유발했다고 서술한 점이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짐이 된 자유


 

개인이 등장하기 전 시대의 인간은, 어머니와 일체로서 존재하는 뱃속의 태아와 유사하게 자연과 연결된 의존적 존재였다. 외부 세계와의 유일한 통로인 탯줄은 인간의 자유를 소거하고 개성을 제한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소속감과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안정감을 주고 방향을 제시한다. 프롬은 이를 ‘원초적 유대’라고 부르는데, 이는 원시 공동체의 자연합일적 모습, 중세인의 교회 혹은 사회적 계급과의 결속에서 발견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개체화’ 단계에 도달하여 ‘원초적 유대’에서 벗어나게 되면, 인간은 독립적으로 자신의 방향을 찾고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안전을 도모해야 하는 과제에 당면하게 된다. 근대라는 ‘개체화’를 통해 비로소 개인이 된 인간은, 억압받던 자아를 꽃피우며 독자적 인격의 힘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점점 외부 세계와의 거리가 멀어지며 ‘원초적 유대’ 상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고독을 맛보게 된다. 인간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유대감을 형성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갑작스레 없어진 유대감의 자리를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이 대신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분리로부터의 불안과 동요가 극심해지면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나게 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은 극심한 불안의 고통으로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그의 개체적 자아와 세계 사이의 간격을 제거함으로써 고독을 극복하려고 애써왔다. 이러한 도피의 메커니즘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나는 어디에 속하는지 설명을 잘 듣고 생각해 보자.


먼저 첫째는 ‘권위주의’적 방법으로, 이는 원초적 유대를 대체할 ‘2차적 유대’를 모색함으로써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세부적으로 보면 ‘피학적’ 충동의 형태와 ‘가학적’ 충동의 형태로 나눌 수 있다.

 

'피학적 형태'의 목적은 개체적 자아를 제거함으로써 그 불안함, 허무감의 감정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는 자신을 괴롭히고 비하하여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고, 동시에 더 강력한 전체의 일부가 되어 그 힘의 기운과 영광에 참여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가학적 형태'는 그 목적이 주로 고통의 가해 그 자체로 오해되곤 하는데, 그것은 수단일 뿐이며 진정한 본질은 타인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이다. 가학적 충동은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강하고 지배적인 특성으로 인해 그 의존성이 쉽게 망각되곤 한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가학적인 사람은 지배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존적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피학적 경향과 가학적 경향은 완전히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프롬은 이 둘이 ‘공생’이라는 목적을 근저에 놓고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얘기한다.

 

두 측면의 결합은 바로 이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엿볼 수 있는데, 힘은 권위주의적 성격자에게 자동적으로 사랑과 존경, 복종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오직 힘만을 숭배하기에 힘의 권위에 복종함과 동시에 약자를 힘으로써 지배하고자 하는 두 가지의 특성 모두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도피의 방법은 ‘파괴성’이다. 파괴는 가학-피학적 충동과 달리 공생을 목표로 삼는 게 아니라 대상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가진다. 내 밖에 있는 세계를 파괴하면, 그 세계와 비교하여 내가 무력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하류 중산층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나치즘이 하류 중산층의 파괴적 충동에 호소하여 적을 만들고 싸움에 동참시켰음을 예로 들 수 있다.


세 번째 도피의 방법은 ‘자동인형적 순응’으로, 개인은 자신이기를 그만두고 문화적 유형이 제시한 성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가장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에게, 그리고 작금의 현대인에게 가장 많이 애용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읽다 보니 이미 주어진 목표를 나의 목표로 받아들이고 사회의 기대에 맞춰 살려고 애쓰는 나의 모습이 자꾸 겹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이런 양상을 보이는 이들을 함부로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진정한 자유에 다가갈 수 없다면 그렇게라도 살아야만 고독의 불안을 극복하고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 여하튼 프롬은 말하길, 우리가 주체적이라고 생각한 결정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제시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고독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의 생명과 자유와 안락에 대한 더 직접적인 위협에 쫓겨 타인들의 기대에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한다.

 

 

 

진정한 자유, 그 이름은 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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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끊어내고 제대로 자유를 직면할 수 있을까? 프롬은 ‘자발적 활동’에서 그 해답을 구한다. 자발적 활동 즉, 오직 자아를 자발적으로 실현함으로써만이 인간은 자신을 세계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통합시킬 수 있다.

 

이는 예술과 같은 창조적 활동을 통해 대상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사랑’이 아닐까 싶다. 사랑은 동적이며, 분리를 극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발로하여 완전한 일체가 됨으로써 모든 것을 완결 짓는다. 하지만 개인을 제거하지 않으며 강박적 활동 또한 아니라는 점에서 앞선 도피책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사랑이라는 자연과의 새로운 연결을 달성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자, 이쯤에서 『에리히 프롬 평전』을 저술한 프리드먼이 프롬에 관해 했던 말을 공유하고자 한다. “프롬의 글은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든 뒤 갑작스러운 활기로 끝난다.”


이 책을 접하고 내가 느낀 바를 참으로 적확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시대를 겨냥한 촌철살인의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 결말이 글쎄. 아 하필 사랑이라니.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왠지 뭐랄까.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예시들로 오목조목 비판하며 반성시켜놓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관념만 던져놓고 쏙 도망가 버린 느낌이 든다. 이에 당시의 나는 허무하기도,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프롬의 다른 저작들을 접하고 사랑에 대해 전보다 깊이 되뇌게 되면서, 역시 ‘사랑’밖에 없다는 너무나 진부하지만 그래서 더 지나치기 쉬운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사랑을 ‘모태적 관계에서 벗어난 인간이 자연과 맺을 수 있는 새로운 관계’의 해답으로 제시하여 깊게 설명하고 있진 않지만, 앞서 언급한 프롬의 대표작, 『사랑의 기술』에선 과연 이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까지 보다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프롬이 그렇게 단어 하나만 띡 던져주고 가 버릴 사람이 아니다.

 

 
근대인은 자신이 좋아 보이는 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알았다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익명의 권위에 순응하고, 자신의 자아가 아닌 자아를 받아들인다. 그가 그럴수록 무력감은 더욱 심해지고, 그는 더욱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근대인은 겉보기에는 낙관적이고 창의적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무력감에 압도되어 다가오는 재앙을 마비된 것처럼 멍하니 지켜볼 뿐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276쪽)
 

  

정리하자면, 프롬은 인간은 자유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유가 주는 고독과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얘기하며, 그 도피의 양상은 강력한 권위, 이념, 사상에 복종하여 안정감을 되찾고 세계와의 단절되었던 유대관계를 회복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처럼 다시 모태로 회귀할 순 없기에, 대체된 이차적 유대감으로 도피하였다고 해서 내재된 불안감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진정한 해결책인 사랑을 찾으려 애써야 한다.

 

 

 

글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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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는 프롬의 책을 골라, 햇볕이 적당히 드는 자리에 앉아 프롬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너무도 무력하고 게으른 나지만, 그럼에도 불안에 떨며 기대에 맞춰 사는 순응적인 삶에서 열렬히 이탈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독의 불안에 맞서기 위한 프롬의 매뉴얼을 꼭꼭 씹어 먹고 싶다. 이처럼 삶에서 예고 없이 찾아오는 근본적인 고독과 불안, 두려움의 방문에 뒤척이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조심스레 일독을 권해 본다.

 

 

[박예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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