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변성의 늪에 떠오른 구원 소설 - 도서 '이국에서'

글 입력 2022.11.1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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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인의 가변적 정체성


 

목적지만을 향해 달리는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바라볼 때면, 프로메테우스가 해방을 넘어서 광대나 마법사가 되었다는 상상을 한다. 현대사회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말도 안 되는 불꽃 쇼를 우리 앞에서 화려하게 펼쳐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배가 갈리는 것도 모르는 복어처럼 그걸 보면서 멍청하게 입을 껌벅거린다.

 

프로메테우스가 약속한 기술은 우리를 신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화려한 마술은 엄격하고 자상한 신의 품에서 우리를 떨어뜨려 놓았다. 이것이 과연 비극일까? 글쎄, 예견된 사건은 비극일 수가 없다. 그건 그냥 결과라 불린다. 그리고 인간이 신이 되고, 달콤한 신의 품으로 떨어져 나간 것은 예견된 결과다. 에덴동산에 살던 시절부터 예견된 일이었으니까 이것은 결코 비극도 아니고, 심지어 슬프지도 않다.

 

그 대신 우리는 과정을 잃어버렸다. 과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것을 행하는 주체가 무엇이든, 어디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네모난 액자에서 우리는 순간, 혹은 결과를 고정하고, 운송수단을 통해 풍경을 망각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것을 기록한 덕분에 많은 것을 분석할 수도 있어졌고, 빠른 속도로 더 멀리 많은 곳을 갈 수 있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에게 축복을! 우리는 심지어 배양육도 큐브로 맞추고 달에 엘리베이터를 세울 수 있다. 이제 인간이 달에 당도했으니, 아르테미스는 이제 다른 집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신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은, 모든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이 다원화되고 추상화될수록 인간은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현대에는 불안감으로부터 빠르게 고개를 돌리게 할만한 수많은 자극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래서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전능한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극으로부터 영원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어느 순간 고개가 뻐근하다고 느껴질 때 비극이 시작된다. 그때 우리는 자아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 모호한 세계에서 그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수많은 결과로 쌓아올린 것들이 텅 빈 수레바퀴와 다름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매일매일, 아름다워지고 똑똑해지길 바라는 광고들이 버스나 지하철에 붙어 소리 지르는 것을 보며 살아간다. 우리가 무엇이든 될 가능성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실존도 그래서 가변적인 상태에 머문다. 행정적으로 현대인은 국적이 있지만, 현대인의 자아는 이국에서 살아간다. 이런 현대인의 불안을 표현한 것이 오늘 리뷰할 소설, '이국에서'다.

 

 

 

2. 소설 개요


 

소설 '이국에서'는 깔끔한 플롯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국에서'는 반강제적으로 정체성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문득 떠오르는 단어에 의해 이국으로 떠나고, 이국에서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 황선호는 자신이 보좌하는 정치인의 정치적 비리를 덮기 위해 갑작스러운 실종을 연기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어디에 잠적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황선호는 '보보 공화국'을 떠올린다. 보보 공화국은 정치적 분쟁이 끊기지 않은 나라로, 전쟁과 폭정 등으로 자국을 피한 이웃대륙의 난민들이 경유지로 선택하는 나라다. 그리고 황선호의 어머니가 가끔 받는 글들에서 언급된 나라기도 하다. 처음 보보 공화국에 도착한 황선호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술에 빠져 산다. 그러던 중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던 글들이 다시 떠오르게 되고, 이를 호텔의 종업원과 공유하게 되면서 글의 저자가 '친구들의 집' 출신이라는 것을 안다. 종업원은 관심을 두고 수사를 돕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쿠테타로 보보 공화국은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강경한 정책을 펼친다. 외국인 황선호는 갑작스럽게 호텔에서 나가야 하는 입장에 선다. 이때 친하게 지내던 술집 주인의 추천으로 쟝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소개받는다. 그곳은 천연동굴을 파낸 곳으로, 황선호와 같이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약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들과 이야기한 끝에, 쟝이 '친구들의 집' 출신이라는 것과 이곳이 그 유지를 이어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친구들의 집'은 동양학을 전공한 어떤 교수를 중심으로 뭉친 집단으로,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며 자급자족과 평화를 지향했다. 하지만 이러한 집단은 정부로서 불순한 모임으로 보였고, 이에 대항하여 친구들의 집 사람들은 평화시위를 펼친다. 잔혹한 진압 끝에 '친구들의 집'은 와해하고, 강압으로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

 

황선호의 어머니에게 글을 지속해서 보낸 남자는 '친구들의 집'에서 일어난 비극을 카메라로 담아 세계에 알리려 했지만, 실패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자국에서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 출신으로, 진압 과정에서 정신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황선호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지만,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친구들의 집'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제압하는 자에서 제압당하는 자로서 맞섰지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황선호는 그 자신이 도착한 것이 그의 유지를 이으라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친구들의 집'을 살리는 데 집중한다. '친구들의 집'은 황선호의 기묘한 운명에 반응하여 다시 결집하기 시작한다. 처음 그에게 친구들의 집을 찾아준 호텔 종업원은 그들이 있었던 일을 책으로 써낸다. 한편, 황선호는 자신이 모시던 정치인으로부터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모든 일이 끝난 후 온 이들에게 자신은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황선호가 보보 공화국의 흔한 나무를 바라보면서 책은 끝을 맺는다.

 

 

 

3. 나가며


 

소설 '이국에서'는 황선호가 '자국에서' 쌓아올린 자기 자신을 부정한 후, '이국에서'야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황선호의 이야기는 오늘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재현된다. 작게는 갑작스럽게 떠나는 여행으로, 크게는 외국으로 떠나는 워킹홀리데이가 그렇다.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다.

 

기본적인 플롯에 다른 흥미로운 주제도 끼어들어 전개된다. '이국에서'는 '자국'이 아닌 '외국'에서 정체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경계선에 관한 이야기이며, '국가적 폭력'에 대항하여 '시민들의 작은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연대를 지향하는 이야기이다. 때로는 강아지와 인간을 같은 선상에 놓는 묘사에서는 개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사상이 묻어나온다.

 

2022년 말은 러시아 전쟁 탓에 국가 간 연합이 강조되고 있어 상대적으로 민족주의가 덜 이슈가 되고 있지만, 이 소설이 연재될 때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경제위기로 민족주의가 강세에 있던 시기였다. 브렉시트에 이어 트럼프의 당선까지 세계는 장벽을 높게 쌓았다. 덜 이슈가 되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한번 '트럼프 신드롬'이 스쳐 지나간 국제정세에 신냉전이 민족주의 기류에 탑승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세계적인 이슈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 집단이 만들어낸 혐오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재현되고 있다.

 

황선호는 이러한 세계에서 '친구들의 집'에서 답을 찾았다. 황선호가 그 자신을 비로소 찾은 것에는 독자로서 카타르시스들을 느끼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마침 2020년에 마사누스바움의 '세계시민 주의 전통'을 리뷰한 바 있다. 디오게네스는 개와 함께 항아리에 살면서 경계를 초월하고 진정한 인간성을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그 글에서도 밝혔듯, 명확한 정치적, 법률적 방향성을 제시한 키케로와 달리 디오게네스는 거리의 철학자로서 생을 마감했다.

 

'친구들의 집'의 행진은 아름답지만, 황선호도, 그를 이끈 작가도, 교수도 명확한 방향성에 관해선 자세히 기술하지 않았다. 황선호 개인은 구원을 얻었지만, 최소한 이 세계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는 청년 중 하나인 나의 마음은 구원할 수 없었단 말이다. 황선호와 달리 현대인들은 멀리서 온 구원소리도, 정치적 공동체에 적극 투신할 이유도 없다. 아마 이 끔찍한 무기력함이야말로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혐오와 분노의 원천일 것이다.

 

그런 현대인들은 '자국에서'도 나를 채워낼 수 없고, 아마 '외국에서'도 그럴 것이다.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여행을 불사했지만, 그들의 여행이 완벽한 터닝포인트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퇴직 후 에세이스트들이 조용해진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런 실존적 불안은 여행으로도, 철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림자처럼 붙여놓고 그것이 피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 수도. 황선호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했지만, 우리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성숙시키고 구원할 수 있을까? 이 책이 준 가장 큰 시련은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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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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