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을 위하여, 스타듀 밸리(Stardew Valley) [게임]

글 입력 2022.11.1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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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게임'의 유행과 스타듀 밸리의 독보적인 게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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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 이후, '힐링 게임'이 눈에 띄게 큰 인기를 몰았다. 주목할 만한 사례로,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2020년, 닌텐도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은 없어서 못 파는 그야말로 '품절 대란'을 겪었다. '동물의 숲'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무인도로 이주해 섬에 사는 동물 주민들과 상호작용하고 자연 환경에서 낚시하거나 곤충을 채집한다.


거리두기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어디론가 떠나고픈 우울감에 시달리던 현대인에게, 긴장감 넘치는 전투 액션보다도 '힐링 게임'이 선사하는 잔잔한 위로가 더욱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바쁜 도시의 일상을 벗어나 자연환경에서 여유를 즐기는 '힐링 게임'은, 농장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의 1세대 격인 '목장 이야기'부터 시작해 최근 선 발매된 국산 게임 '숲속의 작은 마녀'까지, 다양하게 개발되어 왔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로 그 중 GOAT(The Greatest Of All Time)는 단연 '스타듀 밸리(Stardew Valley)'다. 아직까지도 그만한 게임을 찾지 못해 검색창에 수시로 '스타듀 밸리 같은 게임'을 검색해 볼 정도이니 말이다.


스타듀 밸리는 개발자 에릭 바론 혼자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풍부한 콘텐츠와 디테일한 플레이 요소를 자랑하는 1인 인디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조자 주식회사'에서 쳇바퀴 돌듯 피곤한 회사 생활을 하다가 한적한 '펠리컨 마을'로 이주해 할아버지가 과거에 살던 농장에서 귀농 생활을 시작한다.


'힐링 게임'의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은 모두 비슷하다. 삶에 지친 주인공의 일상탈출, 여유로운 귀농 생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듀 밸리가 타 동일 장르 유사 게임과 비교해 독보적인 매력을 갖춘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스타듀 밸리를 플레이하며 느끼는 '힐링'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그 답을, 스타듀 밸리가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메타(meta) 고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었다.




현대인의 고향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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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거주해야 할 고향에서 떠나 밤의 심연에서 유리하고 있다. 기술 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고향을 잃고 존재 의미를 상실한 채 서로가 서로를 도구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고향이란 무엇인가? 시적 언어로서 '고향'은 각각의 개별자에게 상이한 의미 체계를 가질 것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정의의 공통점을 추려 보자면, 고향은 성장기 삶의 체험을 담고 있으며, 익명의 타자가 주체와 유리된 채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주체와 자연이 상호 교섭하는 애정의 장소다. 

 

또한, 고향이 반드시 '태어난 장소'와 일치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태어난 곳이 아니더라도 개인의 인격체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장소라면 충분히 고향이 될 수 있다. 나 역시도 태어나자마자 살았던 곳에서의 기억이 없으며, 따라서 성장 과정에서 그곳이 미친 영향이 미미해 고향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향이라고 하면 대부분 자연에 둘러싸인 시골을 떠올리곤 한다. 물론 고향과 시골은 동의어가 아니지만, 인간이 도시라는 공간에서 소속감 및 유대감을 맺기란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도시의 세 가지 성질을 분석해 보았다.


첫째, 도시는 파편성의 공간이다. 부분의 합과 전체는 다르다고 했던가, 그렇지만 도시의 아파트는 어쩐지 원룸의 합처럼 보일 때가 많다. 아파트 위층과 아래층 또는 옆집 간 간격은 불과 몇 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대한 관심 없이 그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개인적인 삶이 이어진다. 기껏해야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눈인사하는 정도다.


둘째, 도시는 익명성의 공간이다. 이웃은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며 살아간다. 익명성의 사회에서, 개인의 독자성과 개별성은 쉽게 은폐되며, 이는 곧 개인을 언제든 대체 가능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예컨대, 신축 오피스텔의 인기 입주 조건은 '풀옵션'이다. 방금 생산해낸 듯 깔끔한 '풀옵션' 가구는, 개별 입주자의 취향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으며, 계약이 종료되고 새로운 입주자가 들어오더라도 그대로다. 변하는 건 집값과 입주자뿐이다.


셋째, 도시는 동일성의 공간이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곳곳에 건축된 네모반듯한 고층 건물은, 서울의 어떤 공간을 둘러보더라도 특별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강남, 홍대, 압구정, 친구들과 서울의 어떤 곳을 방문하더라도 식사 - 카페 - (전시회, 영화관, 오락실 등)로 이어지는 늘 같은 코스를 반복하는 것은, 공간의 동일성 때문이다.


고향의 핵심이 주체와 장소의 관계 맺음이라면, 이 같은 특성을 고려했을 때, 도시에서 주체는 공간과 유리된 채 부유한다. 그러니만큼 도시는 나만의 추억을 담거나 특별한 애착을 갖기 어려워 고향의 조건을 만족시키기 녹록지 않다. 그래서일까, 누군가 '고향이 어디야?'라고 물었을 때 '서울이요'라고 답하기에는 무언가 2%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고향의 들길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그러나 현대 사회는 도시화와 함께 탄생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은 과연 어디란 말인가?




고향,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존재의 근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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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서울에서 지내고 있지만, 본가는 충청남도의 한 시골 마을에 있다. 서울에서의 바쁜 삶이 마음의 여유를 갉아먹을 때마다, 나는 곧장 경부 고속버스터미널로 달려가 버스표를 끊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내 고향은, 스타듀 밸리 현실판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아침마다 닭장으로 가 귀여운 닭들이 낳은 따끈따끈한 알을 바구니에 담아 오고, 가을이 되면 울퉁불퉁 못난 호박과 서리를 맞고도 살아남은 고소한 배추를 수확하러 가족이 다 함께 밭엘 간다.


강아지만큼이나 자그마했던 어린 시절부터 그곳에 살았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어린아이가 있는 가구였고, 그래서인지 동네 어르신들은 나와 동생들의 성장 과정을 모두 지켜보신, 꼭 친척 같은 존재다. 요즘도 고향에 돌아가 어르신들을 마주치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헷갈리시는지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시다가, '어 김 선생 집 첫째 딸이구나~' 하고 반겨주시곤 한다.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그곳의 모든 장소에 유년기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 예를 들어, 마을 입구에는 내가 '엄마 나무'와 '아빠 나무'로 부르곤 했던 커다란 둥구나무가 두 그루 있다. 엄마 나무의 굵은 나뭇가지에는 그네가 하나 묶여 있었는데, 어릴 때 나와 동생들이 장난을 치다가 한 명이 넘어져서 크게 다칠 뻔한 적이 있었다. 그걸 보신 어르신들께서는 우리가 다칠까 봐 그네를 철거하기로 결정하셨고, 그리하여 그 그네는 기억 속에만 남게 됐다. 이처럼 고향에서는, 나무 하나만 바라보아도 추억이 한 움큼이나 떠오르곤 한다. 고향의 어딜 가더라도 유년기의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물론, 내가 상경하여 서울에서의 삶을 선택하게끔 만든 것도 역시 고향이다. 그곳에 없는 것들을 누리기 위해 고향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울이라는 일상적 공간과 별개로 분리된, 시골 마을이라는 고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내게 큰 위안이다. 

 

고향이 있어서 가장 좋은 점은, 일상이 지치고 피곤할 때마다 '돌아갈 곳'이 기다리고 있다는 안정감이다. 그곳에서는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억지로 나를 꾸미거나 늘 긴장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 내 존재의 근원인 고향, 그곳에서 나는 나 자신으로서 숨 쉴 수가 있다. 


고향의 이점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항상 감사하고 있다. 동네가 조금씩 변하고는 있지만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으며 언제든 버스로 찾아갈 거리에 있다는 사실에. 또한, 만약 내가 도시에서 자랐더라면 유년과 추억의 근원지는 단순한 일상성의 공간으로 덮어 씌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어린이 세대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당장 내 고향 시골 마을에서만 해도 우리 집이 유일한 어린이의 집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도시 속 사람들이 지칠 때, 이들은 도대체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이 글을 읽는, 그런 당신에게, 스타듀 밸리의 펠리컨 마을을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메타 고향, 펠리컨 마을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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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듀 밸리의 배경이 되는 펠리컨 마을은 궁극적으로 여행지가 아닌 고향이며, 그곳으로 향하는 여정은 이탈(departure)이 아닌 복귀(return)이다. 

 

스타듀 밸리는 '마리오 오디세이'나 '젤다의 전설'과 같이 새로운 여행지를 모험하는 오픈 월드 게임과는 다르다. 스타듀 밸리의 일차적인 목적은 탐험이 아닌 정착이다. 플레이어는 마을 주민들과 친밀도를 쌓으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포섭되고, 농장을 커스터마이징하거나 낡은 마을 건물들을 수리하는 등 펠리컨 마을이라는 한정된 장소를 가꾸어 나가기 때문이다.

 

앞서 서술했듯이, 어떤 장소가 고향이 되려면, 한 개인의 성장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된 애정의 장소여야 한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가상 공간에서 태어날 수야 없었겠지만, 플레이어는 플레이 과정에서 이곳에 긴밀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고, 그리하여 펠리컨 마을은 게임 종료 버튼을 누른 후에도 생각나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조건 없는 환대의 고향이 된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펠리컨 마을을 '고향'으로 만드는 스타듀 밸리의 플레이 요소를 소개한다.

 

 

1. 마을 주민과의 교류를 통한 소속감의 증대


고향은 따뜻한 인류애의 장소로서 공동체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고향에는 그곳에서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 가령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에서 '나'가 '은자'를 고향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도, 은자와의 추억이 고향을 떠올릴 때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을 주민들과의 다층적 상호작용은 고향이라는 장소에 대한 소속감을 증대한다. 

 

특히나, 스타듀 밸리가 다른 농장 경영 시뮬레이션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주민들과의 입체적인 관계망 형성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마을 주민들과의 호감도 시스템은, 플레이어가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을 점층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끔 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모든 주민과의 호감도는 0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주민 NPC를 처음 만나 상호작용 대화를 나누어 보면, 사실은 0이 아니라 마이너스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그들은 매우 쌀쌀맞다. 

 

호감도를 쌓는 방법은 마을 주민들이 좋아하는 선물을 주거나 부탁을 들어 주는 것이다. 이때, 처음에는 쌀쌀맞았던 주민들의 말투는 호감도의 상승에 따라 친절하게 또는 애정이 넘치게끔 변화한다. 게다가, 만약 호감도가 일정 단계를 뛰어넘으면 연애 또는 결혼이 가능하고, 결혼할 시 해당 주민 NPC가 플레이어의 집으로 이사를 온다. 이처럼 플레이어는 호감도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체감하면서, 자신이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체험한다. 

 

주민 NPC와의 소통을 쌍방향으로 구성하려 노력했다는 점 역시 독특하다. NPC들은 일방적으로 대사를 읊기만 하는 게 아니라, 때로는 플레이어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에 따라 호감도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음악을 좋아하는 NPC가 작곡에 영감을 줄 수 있겠냐고 묻거나, 왜 귀농을 선택했는지 또는 주민 간 다툼이 발생했을 때 플레이어는 누구의 편인지를 묻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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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플레이어와 함께 성장하는 농장 그리고 마을


고향은 장소와 주체가 유리되지 않은 곳이다. 이는 즉, 인간의 역동적 삶의 움직임이 그와 연관된 장소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이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마을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는 이미 고정된 배경에 끼워지는 부품이 아닌, 자기 삶의 행적을 장소와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거주자가 된다. 

 

예컨대, 플레이어는 건축 자재와 돈을 모으면 마을 회관을 수리할 수 있다. 펠리컨 마을의 마을 회관은 과거에는 많은 주민이 모이는 왁자지껄한 공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찾는 사람이 없어져 방치되었다. 만약 플레이어가 주어진 퀘스트를 모두 이행하면, 마을 회관은 예전의 아기자기한 모습을 되찾고, 주민 NPC들이 다시 드나드는 공동체적 추억의 공간으로 복귀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플레이어는 자신이 마을 발전에 '기여'했다는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플레이어가 능력치와 재력을 키우면, 거주하는 집을 확장하고 농장에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있다. 방 안의 가구 역시도 직접 선택할 수 있으며, 심지어 스타듀 밸리 네이버 팬카페에서는 직접 작업한 도트 파일을 공유해 게임에서 제공하지 않는 디자인으로 농장을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게임 속 장소들은 플레이어의 개성을 담고 있으며, 주체와 장소는 긴밀한 상호 연관을 맺고 캐릭터의 성장에 따라 마을이 함께 변화한다.

 


3. 다회 차 플레이, 언제든 돌아오세요


마지막으로, 이 게임에는 정해진 엔딩이 없다. 물론, 1.5패치 이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는 정해진 도전 과제를 수행하면 쉽게 볼 수 있으며, 엔딩 이후에도 게임이 초기화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게다가, 엔딩 크레딧을 본 후에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 존재하는데, 이는 스타듀 밸리가 다회 차 게임이라는 개발자의 제작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이 게임만 몇천 시간 이상 플레이한 유저도 있을 정도다. 

 

이러한 특성은 스타듀 밸리로의 '귀향'을 가능케 한다. 플레이어는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도 축적된 추억의 흔적을 찾아 언제든지 펠리컨 마을로 돌아올 수 있다. 나 역시 이미 엔딩 크레딧을 보았지만, 바쁜 일상이 지치면 가끔 이 게임을 켜 보곤 한다. 평화롭고 감미로운 OST와 함께,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는 마을 주민들과 내 아기자기한 농장이 기다리고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정말로 펠리컨 마을과 주민들에게 일종의 애착과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스타듀 밸리에서는, 농사와 낚시를 즐기며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삶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일상성과 명확히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익숙한 편안함을 주는 이곳은, 그야말로 고향의 양면성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일상에 지칠 때마다 언제든 돌아오세요, 펠리컨 마을은 늘 당신을 기다리는 고향입니다. 이 게임의 '힐링' 요소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지금 힘들어하는 당신, 아기자기한 픽셀 세상에 당신만의 작은 고향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마무리하며 - 현대 사회에서 고향 개념은 확장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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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 고향이 꼭 '태어난 곳'일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고향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형성되는 개념인데, 이는 형성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누군가에게는 고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예컨대, 유년기에 빈번하게 이사를 한 사람이 고향을 콕 집어 말하기란 어렵다. 또, 농촌에서의 청년층 감소로 현대 사회 속 아이 대부분이 도시에서 자라는데, 도시는 파편성, 익명성, 동일성으로 인해 고향의 개념이 형성되기 어렵다. 그런 데다가, 최근 코로나바이러스로 오랫동안 거리 두기 정책이 있었는데, 이때 아이들은 공간적 체험을 최소화한 채 집 안에서만 일상을 보내야 했다. 

 

이처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늘 실향의 위기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고향은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게 하며 따뜻한 인류애의 장소라는 점에서, 인간의 실존에 있어 꼭 필요하다. 그런 의미로 스타듀 밸리는 간접적으로나마 고향의 체험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강력히 추천하고픈 게임이다. 

 

나아가, 스타듀 밸리와 고향 의식을 연결 지으면서, 현대 사회에 시의적인 의문점을 던져 보고자 한다. 스타듀 밸리라는 하나의 게임을 넘어, 인터넷 자체가 현대인의 고향이 될 수 있을까?

 

책 "메타버스-사피엔스"의 저자 김대식 교수는 10살에서 12살까지 주되게 살아온 곳을 '고향'으로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제트 또는 알파 세대는 아날로그 현실 이전에 디지털 현실을 경험했고, 디지털 현실에 최적화되어 뇌가 형성된다. 따라서 이들의 고향은 사실 대한민국이 아닌 인터넷인 것이다. 


고향은 존재의 성장 과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근원지다. 그렇다면, 현실 공간에서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가상 공간에서 보내는 현대인에게, 인터넷 세상이 고향이라고 해도 이상한 것은 없다.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하이데거는 과학 기술 문명으로 인해 인간이 고향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과학 기술 문명 그 자체로부터 고향을 발굴해 내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스타듀 밸리의 매력을 알아감과 동시에, 우리에게 '고향'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금 생각할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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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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