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걸어놓고 즐기는 미완성 그림 [미술/전시]

글 입력 2022.11.13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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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는 《피로사회》의 한국어판 서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성과만 중시하는 사회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착취하는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게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심지어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훨씬 더 효과적이고 강하다. 즉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나에게 했던 짓이 ‘자기 착취’였구나 깨달은 순간이다. 나를 보살피지 않고 일만 하다 응급실에 실려갔다. 구급차 안에서는 ‘이거 흔치 않은 경험이군’ 하며 내부를 최대한 자세히 관찰했고(그마저도 제정신이 아니라서 흐릿한 잔상만 남았다) 응급실의 딱딱한 침대에 누워서는 그제서야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 약 냄새 나는 소란스러운 응급실에서 안정감을 느끼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퇴원하고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병원에 누워 있는 내 모습과 상황이 ‘누가 봐도 쉬어야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편안했다. 잘 쉬는 것도 능력이라는데 쉴 때마다 밀려오는 죄책감과 이러다 도태되어버릴 것 같은 불안은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 동시에 ‘나는 잘 쉬는 법을 모르는구나’ 하는 또 다른 절망감이 겹친 채로 몇 년을 지내왔다. 불면증과 잦은 소화불량은 당연한 일이었다.


알고 보니 이는 나의 긍정적인 모습만을 ‘나’라고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정적인 나의 모습(심지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모습조차) 배제한 채 소위 ‘완벽한’ 모습으로만 살려고 하니 스스로에게 박하게 구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의 소견이다.

 

100% 동의한다. 자발적인 착취를 멈추기 위해 요즘은 상담도 열심히 받고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책도 좀 읽는다. 이제 완벽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조금은 찌질하고 치사하고 유치한 내 모습까지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단계까지 진전이 있었는데 도움이 됐던 김환기 화백의 작품을 하나 소개한다.

 

그 전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점화의 제작 과정을 먼저 살펴보면, 천 위에 점을 하나씩 찍어 나간 뒤 점 하나하나를 네모꼴로 둘러싼다. 이 과정을 서너 번 반복한다. 그 과정을 지나면 점을 둘러싼 네모꼴은 그 빛깔이 겹치며 번져 나간다. 은은한 번짐은 수묵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그가 전통 문인화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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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 캔버스에 유채, 236.0x172.0

 

 

1970년 1월 8일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어쩌면 내 마음속을 말해주는 것일까.

 

 

화가에게 점화란 단순히 색 있는 점들의 배열을 넘어서 그간 즐겨 그리던 대상들을 점 하나에 압축시킨 것이다. 또한 아픔과 그리움, 외로움과 작가의 집념까지 담아내니 그림 앞에서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삼색 점 있는 붉은 점화.jpg

<삼색점 있는 붉은 점화> 1970년, 캔버스에 유채

 

 

이 그림이 바로 나의 완벽주의를 내려놓는 데 도움을 줬다.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흰 여백이 많이 보여 오히려 눈길을 끈 작품이다. 작품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어떤 분이 찾아와서 내가 걸어놓고 즐기는 미완성 그림 한 폭을 굳이 달라고 졸라서 할 수 없이, 그럼 언제든지 싫어질 때는 내게 다시 돌린다는 약속으로 양보한 일이 있다. 그분이 갑자기 그 그림을 들고 찾아왔다. 그러나 그림은 내 기억속의 그림이 아니다. 웬일일까? 그림은 육중한 유리틀 속에서 숨 막히는 상태로 앓고 있었다. 분홍빛, 진달래 빛, 동그란 점들인데, 진한 선을 두른 유리 틀 속에 넣어 놨으니 그림은 그 우아한 아름다움을 잃고... 다시 생명을 찾은 삼색 점 미완성은 다시 제자리에 우아하게 걸려졌다. 

어느 날 수화는 세 가지 빛깔이 점으로 음악 같은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친구한테 편지도 썼다. 녹색, 홍색, 청색의 동그란 점들이 위에 한 줄, 다음은 분홍색, 진달래 빛 점들이 하나 가득, 맨 아래 두 줄만 점들을 또 한 번 엷은 분홍으로 둘러쌓았다. 전체는 분홍빛 그림이다. 

...... 

참으로 기회는 더디 온다. 내가 죽은 뒤에라도 눈 있는 사람이 내 그림을 볼 때 알아볼 것이라고 한 그 오랜 세월이 이제야 오는 것 같다. 처음으로 제대로 옳게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만난 느낌이다. "삼색점 있는 붉은 점화". 흰 공간을 남겨놓아서 사람들은 미완성인 줄 알고 나도 편의상 미완성이라고 불렀던 #187 작품, 뒤에는 분명히 26/08/70과 사인이 있는 이 그림을 미완성이 아니라고 본 사람은 이 사람 하나다. (김향안)

 

 

‘미완성을 옳게 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은 내게 큰 위안이었다. 이왕 하는 거 잘해야 한다는 혼자만의 규칙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던 나에게 ‘그래서 잘 하는 게 뭔데?’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누군가 말했던 신선한 포도 비유가 생각난다. 포도를 한 송이 사면 아직 익지 않은 알도 있고 썩거나 찌그러진 알도 있다. 하지만 전체 포도는 신선하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든 작품이든 부분의 합으로 생각해야 한다. 신 빼고는 완벽할 수 없기에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은 반드시 존재한다. 하지만 괜찮은 모습까지 합쳐서 ‘총체적인 나’로 느끼는 게 중요하다. 미완성도 걸어놓고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미완성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이 분명 존재한다.


또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괜찮다. 누군가 남은 일을 이어갈 테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기가 끝마치고 갈 수는 없다는 것, 일을 시작해 놓고 가는 것이며 남은 사람이 이어 받아서 끝마치고 또 시작해서 이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1992년 1월 10일 금요일,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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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완벽주의와 강박을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통달하지 못했고, 갈 길이 (아주) 멀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나에게 하나의 다짐이기도 하다. 미완성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으니 진정하라고. 그만 첨벙거리라고. 한계가 없다면 그로 인한 발전도 없으니 말이다.


완벽주의를 ‘완벽하게’ 고치려던 내게 상담 선생님이 해준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완벽주의는 굉장한 드라이브가 될 수도 있고 끊임없이 스스로와 주변을 힘들게 하는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거일 수 있어요. 그래서 이거는 그냥 잘 이해하고 잘 활용할 수 있으면 돼요. 버리고 고쳐야 되는 게 아니라.”

 

피로사회를 살고 있는 모든 완벽주의자들에게 김환기 화백의 그림과 완벽하지 않고 별 볼 일 없는 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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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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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구름13
    • 좋은 글에 예상치 못한 큰 위로를 받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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