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왜 정조인가 - 정조, 화성궐리사를 세우다

글 입력 2022.11.05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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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정조라. 정조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잠시 충격을 받았다. 놀라울 정도로 수원화성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고, 그 죽음의 집행인이었던 영조의 세손이라는 점은 영화 <사도>를 통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분명 빠짐없이 배운 인물일 터인데 정녕 기억나는 것이 이것밖에 없단 말인가. 나의 기억력은 왜 이토록 알량한 것인가. 그런 가벼운 자괴감에 빠져 생각해 보니 정조에 대해서 거의 알지도 못하는 내가 그의 업적을 기리고 노래하는(정말로 노래하는) 공연을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정조와 관련된 책이라도 한 권 읽어보자 다짐하게 된 건 모름지기 사전 조사의 이유도 있었지마는 이 위대한 인물의 개인사가 궁금해진 탓도 컸다. 학창 시절 교과서의 근엄한 문체로만 접해오던 그의 놀라운 업적과 성취. 책장을 넘기면 금세 잊어버리고 마는 그 유구한 기록들. 그런 객관적 사실 정보의 나열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까 왕으로서의 정조보다는 그에 선행하는 인간으로서의 정조가 알고 싶었다. 그렇게 무작정 찾아간 도서관. 표지가 마음에 들어 문득 집어 든 책에서 정조에 관한 꽤 흥미로운 사실을 여럿 알게 되었다. 우선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정조가 아버지의 형인 효장세자에게 입양되었다는 것. 이는 할아버지 영조가 손자 정조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실시한 조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영조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었고, 관료와 당파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협력파와 반대파로 갈라져 있었다.


관료들에게도 이 사건은 날벼락이었고, 자칫하면 그 찬반에 따라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정조를 보호하거나 즉위를 막아야 했다.


- 책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중



사도세자에 대한 그 어떠한 발언도 용납되지 않았다는 이후의 조정.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라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에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로부터 정조에 대한 암살 시도도 극에 달했다고 하니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조에게 마음속 한인 동시에 자신의 생명과 지위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1776년 정조가 즉위하던 날, 그가 가장 첫 번째로 외친 말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 선언은 사도세자의 죽음만큼이나 어딘가 안타깝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책에서도 설명하듯 이런 외침만으로는 14년간 죽음의 공포 속에서 불안한 세손 시절을 보내야 했던 고통과 분노를, 무엇보다 부친의 억울함을 쉬이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조는 사도세자의 원한을 풀고 추앙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으니 그 첫 번째 노력의 성과가 한양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단순한 이장이 아니었다. 정조는 곧이어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보호하고 수원행궁을 정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방위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특수행정구역 ‘수원부’의 지위를 한 단계 격상해 ‘수원유수부’로 바꾼다. 그리고 조선 최강의 군대로 평가받는 자신의 친위부대 ‘장용영’ 군사들을 주둔시켰다.


1794년(정조 18),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참배하러 간 정조는 수원 팔달산에 올라 번화해진 도회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때가 되었다.” 아버지의 묘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꿈꾸었던 정조, 그가 드디어 수원성 축조를 명령한 것이다. (...)


이렇게 시작된 화성 건설은 1796년 8월, 32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 책 『두 리더: 영조 그리고 정조』 중



그러고 보니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한 것이며 친위부대 ‘장용영’을 어딘가에 주둔시켰다더라, 하는 일련의 역사적 사실이 스멀스멀 기억 저편에서 떠오르는 듯도 하다. 그러나 언젠가 역사책에서 접했을 이러한 기념비적 사건들보다 나의 눈길을 끌었던 건, 다름 아닌 화성 행차에 나선 정조의 모습이었다.


행차 당일 화양루, 공심돈, 장안문을 지나 방화수류정에 도착한 정조는 조그만 과녁이 설치된 그곳에서 주위 신하들은 물론이요, 구경나와 있던 주민들에게도 활쏘기를 시켜 1등 한 자에게 무과 최종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즉시 내리고 축하곡을 올렸다고 한다. 또 세 시간 이상이 걸리는 화성 한 바퀴를 다 돌고도 서장대에 올라 군사훈련까지 관람했는가 하면 행사를 준비한 화성 유수에게 논밭과 노비(전민)를 내리고 화성 안팎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도 세금을 면제해주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머무는 이곳 화성에 정조가 얼마나 큰 애착을 느끼고 있는지, 그가 얼마나 생기 넘치는 사람인지를 알게 된 건 이후 그의 개인사를 탐독하고 이해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기쁨과 뿌듯함으로 가득했다던 정조의 화성 순시 일화를 전해 들으며 기분 좋은 충만함을 느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그간 납작하게만 느껴졌던 몇백 년 전 인물이 불현듯 마음 어딘가에서 되살아나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또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내게 다가왔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었다.


아울러 정조는 스스로 ‘태양증’이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다혈질이었다고 한다.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표현으로 주변 사람을 자주 상처 입히기도 했다고. 고백하자면 책에 수록되어있는 그의 편지나 언행을 보면서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와하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생각보다 되게 불같은 사람이었구나. 그 지나친 무탈함과 솔직함이 자못 부럽기도 했다. 이따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점에선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고 말이다.


조금은 모난 성격을 공유하는 정조와 나. 그렇게 정조대왕과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며 아주 조금은 친해진 상태로 <정조, 화성궐리사를 세우다> 공연을 보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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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까지는 2시간 가까이 걸렸으므로 정조가 수원화성을 행차한 그날의 멀고 먼 여정을 떠올리며 집을 나섰다. 수원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 뒤 궐리사로 향하는 택시를 곧장 잡아탔다. 창밖 날씨가 끝내주게 좋았다. 근래 이렇게 날씨가 좋았던 적이 있던가? 평소에도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는 나로서는 압도적으로 눈부신 그날 날씨에 예의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대왕이 강림이라도 하신 걸까, 싶은 이상한 착각이 들 정도로 하늘은 푸르다 못해 새하얀 도화지 같았고 햇빛은 쨍쨍했으며 엄청난 양의 구름이 그 뒤로 뭉게뭉게 피어있었다. 폭신한 구름빵을 만들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 밤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정조와 화성 순시를 함께했을 때 느꼈던 충만함 같은 것이 그곳 하늘에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도착한 궐리사. 따사로운 빛이 내리쬐는 경내를 둘러보고 현장으로 이동하니 마침 공연이 막 시작될 참이었다. 당최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이 공연, 생각보다 볼거리, 들을 거리, 즐길 거리가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첼로 라이브 공연부터 그 흥겨운 음색에 맞춰 흐르는 노랫소리, 무대 이곳저곳을 활기차게 뛰어다니며 춤을 추는 극단 배우들. 현장 극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역사성이 가미된 공연인 만큼 조금은 진지하고 딱딱하게 진행될 것이란 편견 따위가 저도 모르게 작동된 것이 분명했다. 현장 관객의 상당수가 부모님과 함께 온 초등학생 그리고 노인분들이었다는 걸 상기하면 춤과 노래와 악기라는 다소 쉬운 언어로 극 초반부를 구성한 극단의 선택은 과연 탁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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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소동 같던 무대가 지나가고 이후에는 본격적인 연극이 시작됐다. 연극을 보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역시 궐리사에 관한 부분이었다. 오산시 궐리사는 조선 중종 때 공자의 후손인 공서린(孔瑞麟)에 의해 지어진 강당이라고 한다. 제자들의 면학을 독려하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어 그늘 밑에서 가르침을 베풀기도 했다는데 그래서인지 궐리사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궐 서쪽에 있는 엄청난 위용의 은행나무다. 보기만 해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다채로운 노란 빛을 품고 있는 은행나무. 그 오랜 세월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아한 기량과 압도감은 보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만들게도 했다.


이후 은행나무는 공서린 후학 양성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공서린이 세상을 뜨자 은행나무 또한 생을 다하게 되는데. 250년의 세월이 흘러 기적적으로 싹을 틔우고 소생한 이 은행나무를 때마침 정조가 발견한 것이었다. 정조는 자신이 조성한 화성 신도시에 공자의 사당을 재건하고 그 배움의 뜻을 기리고자 했다. 그리하여 공자의 고향인 궐리의 이름을 따 탄생하게 된 것이 지금의 ‘궐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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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게 분류하자면 <정조, 화성궐리사를 세우다>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행위 예술과 1인극과 춤과 노래, 첼로 연주가 조화롭게 뒤섞인 1부는 그야말로 공연예술의 축제라 보아도 무방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1부 공연의 배경으로 흐르던 감미로운 선율의 노래다. 노래의 가사에는 “네 꿈에서라도~”라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해당 가사를 들으면서 당신의 꿈에서라도 떳떳한 아들이 될 수 있길 소망한다는 정조의 모습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과-몰입일까. 아무래도 전날 밤까지 정조의 다사다난한 인생사가 담긴 책을 읽고 흠뻑 심취해있던 터라 여러모로 감수가 예민해진 모양이다.


다채로운 오색 공연이 지나가고 이어진 2부에서는, 정조와 궐리사에 대한 연극이 진행되었다. 한 가지 놀라웠던 건, 극단 배우들이 무대 진행을 위한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와중에도 관객석에 선물을 나눠준다든가 친근하게 말을 거는 식으로 끊임없이 관객의 흥미를 끌어낸다는 데 있었다. 이와 더불어 “야~ 멋있다” “대박이야” 같은 대중 친화적인 용어를 섞어가며 극을 구성한 것은 (특히 어린 연령층의) 관객이 더욱 수월하게 공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리라. 무대에서 발화되는 대사들을 듣고 있노라면 공연 기획을 맡은 제작자들이 최대한의 관객을 포용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진심이 전해져오는 듯했다.


사도세자를 여성으로 설정한 점도 색다른 인상을 주었다. 이어 노론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와 정조의 난투극을 정말로 모래밭에서 몸을 치고받는 난투극으로 구성한 것은 평면적으로만 느껴졌던 당대의 역사적 사건에 놀라운 역동성을 불어넣어 주었다. 곳곳에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처럼 정조가 사대부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고, 사도세자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점을 함구해야 했으며 임금에 즉위하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한 일련의 사건들이 내게는 스크린 밖 무대를 통해 더없이 생생한 하나의 현장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극에 몰입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배우들의 힘도 분명 컸을 것이다. 극단 정:지의 최규호 배우가 맡은 정령 역은 가장 관객 친화적인 인물로서 수시로 흥이나 추임새를 넣어가며 알기 쉽게 궐리사를 설명해준다. 또 신하와 백성 역을 두루 맡으며 극의 활기와 유머를 불어넣어 준 김주찬 배우부터 은행나무와 같은 엄청난 기량이 느껴지던 공서린 역의 정인정 배우. 무엇보다 정조 역을 맡은 정찬희 배우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와 일종의 내적 친밀감이 생겨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딘지 장난기가 서려 있는 듯한 얼굴. 그러나 앞서 난투극에서도 느껴지던 비장함과 굳센 의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를 외칠 때의 당당함과 범상치 않은 기골. 책 속에서만, 상상 속에서만 어렴풋이 존재하던 정조의 모습이 실체화되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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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드레스를 입은 권선화 안무가의 화려하고도 절제된 동작과 아름답고 청아한 선율을 뿜어내던 이진영 첼리스트의 연주, 극단 배우들의 흥미진진한 연극을 정신없이 보고 있으니 공연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못내 공연이 끝났다는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 즈음 책 『리더라면 정조처럼』 의 저자 김준혁 한신대학교 교수의 강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준혁 교수는 궐리사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궐내 심어진 은행나무의 나이가 1,500살이라고 전해주었다. 나무 그늘을 천장 삼아 그 아래서 많은 제자가 공부했다고도 하니 은행나무는 그간 얼마나 많은, 정말로 수백 년에 걸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켜봐 온 것일까. 그 아득한 세월의 흐름 앞에서 무언의 경이와 탄식이 일었다.


강의를 통해 알게 된 놀랍고도 안타까운 사실 중 하나는 정조가 갑옷을 입고 잤다는 것이었다. 자객으로부터 두 번의 암살 시도를 당했기 때문이다. 실제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고. 수면 바지나 체육복을 입고 자는 나조차도 자주 잠을 설치고는 하는데, 그 옛날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누군가는 갑옷을 입으면서까지 밤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그래서 편히 잠자리를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 슬펐다. 책으로는 그가 ‘두 번의 암살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접한 터라 실제 자객으로부터 암살 시도를 당했으리라곤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매일 밤을 근심과 걱정으로 지새웠을 정조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나 있을까.


조금은 착잡해진 마음으로 이어 들은 강연에서 수원시와 화성시, 오산시가 본래는 하나의 지역으로 통합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수원이 조선에서 제일가는 큰 도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조선 정부에서 공자를 받들기 위해 직접 창설한 기관이 성균관과 궐리사 단 두 곳뿐이었다고 하니 궐리사가 무언의 상징적인 위상을 가지는 공간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김준혁 교수가 강연을 마무리하며 전한 발언은 의미 깊다. 김준혁 교수는 물었다. 자고로 공부는 왜 하느냐고 말이다. 중학교 전후로 질문을 받았다면 서울대 가려고, 고등학교 때 질문을 받았다면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중고 12년의 시절을 지나 대학에 진학하면서 공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자연스레 변화하게 되었다. 김준혁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다. ‘성공’이라는 추상의 결과를 위해 달리는 게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실천하고, 행하느냐다.


김준혁 교수는 답한다. 사람들에게 지식과 지혜를 널리 알리기 위해 공부한다고. 지식이 쌓이고 쌓이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이다. 공동체를 위해서 큰 인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길 바란다는 김준혁 교수의 말이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까지 사회로부터 받아온 도움을 환원하기 위해, 무분별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로운 지식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결국은 나와 공동체를 위해 공부하는 것. 이 말을 5년 뒤, 10년 뒤, 20년 뒤에 들으면 또 어찌 다가올지 새삼 궁금해진다. 정조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서민 교육 전파였던 만큼 그 (불같은 성격과) 교육 이념을 받들어 더 좋은 사회를 위해,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정진하고 공부하고자 다짐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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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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