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공자의 64대손이 세우고, 어명으로 꽃피우다. - 정조, 화성궐리사를 세우다 [공연]

오래된 은행나무처럼 굳건히 기억될 곳
글 입력 2022.11.0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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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청명한 하늘, 제법 쌀쌀해진 바람사이로 아직까진 조금 따가운 햇살이 비춥니다. 거리엔 낙엽이 뒹굴고 가로수들이 제법 쨍하게 물들었고요. 외출 할 때마다 형형색색의 나무를 보는 게 행복인 요즘입니다. 날이 조금씩 추워질 때마다 다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곧 떠나갈 가을을 만끽하자는 것입니다.

 

경기도에 살고 있지만, 주된 생활 반경이 서울 안이라 경기 남부로는 자주 외출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강을 건너야 하는 곳이라면, 서울을 가로질러야 하기 때문에 이동 시간이 무척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을의 절정에 서있던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간만에 경기도 내의 다른 시로 이동하였는데요.

 

먼 길을 이동한 까닭은 서울에서 약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경기도 오산시 궐리사에서 특별한 행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멀리 떠나는 여정이라 그런지 여행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설레임을 가득 안고 편도 2시간 반 가량의 시간 동안, 지하철과 기차 그리고 버스를 타고서 장소로 이동하였습니다.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르 주도하다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 그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점과 대표적인 건축물인 수원 화성과 규장각, 그리고 정약용입니다. 빅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대중들이 보는 정조의 이미지를 분석한 결과, 가장 먼저 조선의 성군이라는 키워드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듯 정조는 정치와 문화 그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으면서,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깊었다고 전해집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입니다. 한 개인으로서 그의 삶을 조명해보자면, 어린 시절부터 일어난 여러 사건들 때문에 눈물 없이는 보기 힘들 정도로 마음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손에 죽임 당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혹독히 공부해야 했으며 세손시절부터 왕이 되고 나서까지도 암살시도로 목숨을 여러차례 위협 받았으니까요.

 

그러나 정조는 그 어떤 왕보다도 훌륭한 정치를 펼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러 사건들에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군주로서의 덕목을 쌓아나간 것입니다. 왕위에 올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조선의 구석구석을 재정비하여 문화국가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설움을 풀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신도시를 경제도시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하여 일종의 낙원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어질고 총명한 왕이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던 정조는 초계문신제나 규장각 설치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스로 문예를 주도하고 관리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재위 시기 동안 한문 및 훈민정음의 확산과 보급을 통해, 백성들에게 국왕으로서의 자질 뿐만 아니라 스승으로서의 권위를 톡톡히 보여주었습니다.

 

정조는 변화를 유연하게 대처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영조 때부터 이어진 탕평정치를 무사히 잘 이끌어 가면서도, 문화정치로 중인층과 여성, 농민들까지 아주 광범위한 지식의 대중적 확산을 도모하였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시대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르네상스기를 주도했다고 평가받는 정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업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궐리사를 부흥시킨 것입니다.

 

 

 

[극] 정조, 화성 궐리사를 세우다 - 궐리사의 건립과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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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궐리사는 경기도 오산시에 위치해있습니다. 유교의 창시자 공자의 뜻을 이어받아, 후학양성에 힘쓰고자 했던 공자의 64대손 공서린 선생이 중종 재위 당시 설립하였습니다. 처음 명칭을 듣고서는 사찰인가 생각하였지만, 설명을 통해 유학을 공부하는 일종의 강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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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에 가까워질 무렵부터 큰 은행나무가 담장 너머로 보입니다. 이것은 궐리사에 잘 도착했음을 알려주는 징표입니다. 서원 앞마당에 자리한 큰 은행나무는 언제부터, 왜 이곳에 있었을까요?


은행나무는 수명이 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진 속 나무도 1500년 경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궐리사 설립 때부터 함께 한 나무는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깨우침을 주기 위해 북을 달아두고, 행단 아래서 수업을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잠을 물러치기 위해서였겠지요.

 

왜 하필 은행나무였을까요? 유래를 살펴보니,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에는 필기할 일이 귀했으므로, 수업은 필기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진행할 수 있었기에 야외 수업이 가능했던 것이죠. 공서린 선생께서 공자의 뜻을 이어 받고자 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공서린 선생의 별세 이후, 궐리사는 예전의 명성을 잃게 되었고 많은 이들이 찾던 공간은 금세 황폐해졌습니다. 은행나무 또한 힘을 잃어 무려 250년 동안 죽은 것과 같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던 궐리사에 다시금 생기가 돌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정조 때문입니다. 정조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강당이 있던 옛터에 사당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8일 간의 수원 화성 행궁 당시에도, 화성 지역에 도착하여 향교에 들려 대성전(공자를 모신 사당)에 참배를 드릴 정도로 유학 진흥에 대한 의지가 깊었다고 전해지는데요. 당대 사료에도 유학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18세기, 정조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유만주라는 선비가 쓴 일기 『흠영』의 첫 문장입니다.

 

 

요임금의 갑진년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132년이 흘렀고, 숭정제의 갑신년으로부터는 132년이 흘렀으며, 강헌대왕 임신년으로부터는 384년이 흘렀다.

 

시간에 대한 기윈이 흥미롭게도 세 층이다. 첫째 기원은 유교의 성군 요이다. 보편 문명으로서의 유교가 당대인에게 압도적이었음을 보여준다.

 

- 『정조와 정조 이후』, p. 20

 

 

성리학은 조선의 근간이었기에, 어쩌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궐리사를 부흥시킨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1792년 정조의 어명 아래, 폐허였던 공간은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마을 이름 '궐리'를 따와 마침내 궐리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궐리사는 190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사료를 기반으로 잘 고증하였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궐리사도 피해 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궐리사는 크게 성묘와 성상전으로 구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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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전은 90년대에 중국 본토에서 물 건너 온 공자 선생의 석상을 중심으로 4명의 제자 (안자, 맹자, 증자, 자사)가 네모나게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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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에는 정조가 규장각에서 옮겨온 것으로 알려진 공자의 초상화를 모셔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제사를 올릴 때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제기고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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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돌계단으로 내려오면 우측에 사진 속 행단 건물이 보이는데요. 앞서 말씀 드린 이 모든 이야기를 행단 옆 무대에서 팀 [정:지]의 <정조, 화성 궐리사를 세우다>를 통해, 보다 즐거운 방식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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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1500년 경, 공자의 후손 공서린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화성에 강당을 짓는다. 하지만 공서린이 운명을 달리하며 강당은 물론이고 은행나무 또한 생을 다하게 되는데...

 

그로부터 250년이 지난 어느 날, 정조는 화성에 있던 공자의 사당을 발견하고 '인'사상을 강조했던 공자의 뜻을 이어받아 사당을 재건하고자 공자의 고향인 궐리의 이름을 따 궐리사로 명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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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등장인물 모두가 등장하여, 음악에 맞춰 강렬한 몸짓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은행나무를 연상시키는 단체 안무와 붉은 옷을 입고 독무를 추는 배우를 감상함으로써 관객들은 삽시간에 극 안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번 행사는 다양한 연령층이 자리했는데, 그 중에서도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온 어린 친구들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는데요. [정:지] 특유의 움직임과 중간 중간 작은 선물로 참여를 유도한 덕분에, 모두가 집중하여 즐겁게 극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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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은행나무에 깃든 정령이라는 화자를 앞세워서 진행 되었는데, 그의 구슬픈 노래로 1막이 시작됩니다. 화자는 공서린 선생이 어떤 이유에서 강당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서 은행나무 또한 생을 다하게 된 것을 설명합니다.

 

이후 사도세자와 영조의 대립부터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여줍니다. 아무래도 화성 지역에서 정조가 이루고자 했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사도세자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사도세자역을 맡은 문소연 배우가 뒤주에 들어가기 전 울부짖듯이 말하는 연기에서 처절함이 고스란히 느껴져, 마치 당시로 돌아간 듯한 몰입감을 선사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정조가 왕좌에 오르기까지의 여정 또한 움직임으로 설명하였는데요. 실제로 다수의 암살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격투하는 장면을 넣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다음 극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바로 정조가 화성에 왔다가, 강당이 있던 터를 보고 공자의 '인'정신을 받들고자 이곳에 다시 궐리사를 세우라고 직접 어명을 내리는 장면입니다. 이후 극은 궐리사의 성공적인 부흥과 함께 막을 내립니다.

 

극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팀 [정:지]의 신선한 Ugly movement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대사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특징인데요. 이번 극에서는 힘차지만 절제되어 있는 동작을 통해, 어려울 법한 역사 이야기를 위트있게 풀어내었으며 다양한 감정선을 배우들과 주고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첼로의 선율로 극의 깊이와 재미를 더하여, 관객의 입장에서 다채로운 경험을 한 번에 즐길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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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어진

 

 

극을 통해, 궐리사 설립은 배움에 있어서 "화성 백성들도 한양의 백성과 같게 하라"는 정조의 애민정신이 담긴 사건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영조 재위 당시부터 한양과 지방 간의 격차, 즉 '경향분기'의 분위기와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향암"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을 정도로 수도권이 아닌 타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설움이 더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재위 당시 화성(현재 수원시, 화성시, 오산시)에 신도시를 건립하려고 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수원화성을 중심으로 용두사와 장용영, 그리고 궐리사를 계획적으로 두었습니다. 지역 간의 격차를 해소함과 동시에 자신의 오랜 꿈이 담긴 유토피아적 도시를 건설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강력한 왕권 위에 새로운 정치를 이상적으로 실현시킬 공간을 만들고자 한 것이죠. 비록 그는 꿈을 이루던 도중 별이 되었지만, 그 과정을 투명하게 기록으로 남겨 두어 후대로 하여금 역사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게 하였음은 분명합니다.

 

 


정조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새롭게 변모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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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시의 기념물 궐리사는 수원 화성처럼 문화유산 등재를 꿈꾸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의 발자취가 담겨 있는 지역인 만큼, 수원시와 오산시에 있는 다양한 문화유산들과 함께 역사 공부를 위한 나들이 명소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취무기.

 

정조가 술자리에서 자주 썼던 건배사로,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말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곡식으로 술을 만들던 시대에 취할 정도로 마신다는 뜻은 곧 잉여 곡식이 많다는 것, 그러니까 먹고 살기 좋은 시대임을 의미합니다. 조선의 건국이념에 걸맞게 백성들이 모두 술에 흠뻑 젖어도 될 만큼 풍요로운 삶 속에서 살았으면 하는 그의 바람이 담긴 것이죠. 이처럼 한시도 백성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는 정조.

 

그리고, 백성을 위하는 그의 마음이 녹아들어 있는 공간 화성 궐리사. 그 옛날 정조가 바라던 것처럼,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공간이자 21세기에 걸맞은 배움과 문화의 장이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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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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