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운명에 대하여 - 뮤지컬 테레즈 라캥

운명으로부터 이별할 수는 없을 지에 대해
글 입력 2022.10.10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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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한글날, 혜화로 간다. 혜화는 종종 찾는 곳이지만 뮤지컬을 보러 오는 것은 처음이다. 애초에 뮤지컬이 내게 낯선 장르라서 신선한 이 기분은 더욱이, 오는 길 축축한 습기로 가득 찬 지하철에 별 표정 없이 앉아 있었지만서도, 떠오르는 담담한 호기심이 적이 좋았다. 어린 시절, 남들 다 하는 문화생활을 겪어는 보아야지 않겠느냐며 어머니가 무리해서 티켓을 마련한, '노트르담 드 파리' 정도가 기억 전부이다. 뭐라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 저 모습이란, 소위 극적 카타르시스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말았다. 잘 공감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뮤지컬은 모름지기 대극장이나 아예 뮤지컬을 위해 마련된 대형 홀에서 치르는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러니 혜화라니, 거기 그렇게 커다란 공간이 있으려나, 내가 아는 혜화란 그저 작은 소극장 몇 개와 아르코 예술극장 정도가 다라서, 아아, 내가 혜화를 다 모르는 것만이 분명하렷다, 생각했다. 시작 10분을 남기고 드림아트센터에 도착했다. 비가 오고 있음에도 박스 오피스 앞에는 줄 선 사람이 많았다. 그 줄 뒤에 서 공연히 5분을 태우고, 가까스로 늦지 않고 자리에 앉는다.


생각보다 무대와 객석이 넓지 않다. 그게 참 좋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새로운 관점을 선보이리라는 예감이 들어서 말이다. 시작 전에는 언제나 무대와 소품을 찬찬히 살펴본다. 차피 할 것이라곤 따로 없거니와, 지금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찬찬히 뜯어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층마다 2개 공간씩, 복층 구조로 총 4개의 공간이 분할되어 있음을 본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것이 1860년대 속이라고 하던데, 각각의 공간에 자리한 가구와 소품과 전등들의 적당히 낡은 내음새가 어여쁘다고 생각했다. 1층에는 거실과 부엌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고, 2층에는 침실과 빈 공간이 있다. 주인공 테레즈가 독백하며 2층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극이 시작한다.


*


서사에는 그리 특이한 부분이 없다. 뮤지컬로 각색하면서 인물 묘사와 대사가 많이 제거된 까닭이겠지만, 주제만 놓고 보자면 퍽 단순하다. 욕망과 파멸이라는 꽤 흔한 내용이다. 본 극이 탄생한 1860년대에야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에 그런 작품들은 원컨 원찮건 자주 접하게 마련이니까. 리뷰를 쓰고자 에밀 졸라의 원작 소설 포스팅을 몇 개 접하고 나니 역시나, 당대에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가 파격적인 행보로써 평단의 숱한 비판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원작 소설에서는 문장으로 된 설명과 치밀한 묘사로 인물들의 심리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테레즈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본 극의 몰입도를 결정하는 열쇠라고 하자면, 뮤지컬에서는 그를 위한 설명과 묘사들이 전제로 빠지거나 간략화되게 마련이다. 몇 줄의 문장만을 접했음에도, 이를 뮤지컬이라는 양식 안에 모조리 담아내는 것은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뒤잇는다. 그것은 소설의 영역, 뮤지컬이라는 장르만이 선보일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데에 있겠구나. 그러니까 절정부, 소리 높여 부르짖는 노래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와 같은… 나로서는 아직 뮤지컬을 관극하는 태도를 마련하지 못했구나 싶어진다. 어쩌면 원작 내용을 숙지하고 찾아온다면, 그래서 간략화된 테레즈에 대한 이해가 먼저 담지된 채로 관극한다면 조금 더 깊이 음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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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파멸, 그것은 너무도 익숙한 관념이다. 욕망은 이기 利己의 원천이고, 잘 통제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기 때문에 파멸과 아주 밀접히 맞닿아 있는 관념이다. 4인의 등장인물은 각기 다른 욕망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본 극의 관전 포인트를 이 점에 두고 싶다. 4인 4색의 욕망을 드러내는 데에 어색함이나 과잉됨 없이 매끈하게 선보이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사이의 인과관계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치했고, 능숙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 관극에 아무런 이질감이 없다. 등장인물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각자의 욕망이 넘실대고 있었다.


주인공 테레즈에게는 복수가, 까미유에게는 시기와 질투가, 라캥 부인에게는 독선이, 로랑에게는 탐욕이 깃들어 있다. 이것은 각자의 욕망이 억압되었을 때 생겨나는 반대급부로서의 독 毒, 저마다의 죄종 罪宗이다. 테레즈에게는 자유가, 까미유는 믿음이, 라캥 부인에게는 안정이, 로랑에게는 물질이 결여되었고 그것은 욕망과 억압과 죄종을 자아낸다. 각자의 욕망과 죄종이 거미줄처럼, 좀체 변할 일 없을 것처럼 튼튼히 얽혀있다. 그것은 운명을 떠올린다. 운명은 거대한 인과율로 지어낸 거미집 같아서, 개인의 힘, 즉 개인이 가진 욕망의 추동력만으로는 잘 끊어내기 어려운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고모 집에 맡겨진 채 돌아갈 집을 잃어버린 테레즈에게, 객식구라는 신분을 안고 있는 그녀에게 자유라는 욕망은 그 얼마나 달성키 어려운 과업인가. 또 어린 시절부터 유약해 타인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아온 까미유에게 자신 自信과 신념은 어려운 것이고, 과부로서 그런 까미유를 보살피고 가정을 지키는 데에 자신의 온 생을 바친 라캥 부인에게 안정된 생활이라는 것은 도저한 목표이다. 이제 오랜 좌절이 더욱 벗어나기 어려운 운명의 굴레를 자아내고, 더욱더 작은 인간으로 전락하기 시작하는 순간, 더욱 튼튼한 거미줄이 드리우는 시점, 즉 까미유가 일방적으로 테레즈와 결혼을 선언해버리는 시점에 로랑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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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랑은 이 튼튼해 보이는 거미줄의 가장 약한 부분을 흔드는 방아쇠이다. 그가 어떻게 테레즈의 속을 꿰뚫어보고서는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버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랑이 그러하듯, 공교로움으로 비롯되어 걷잡을 수 없는 들불로 번진 것처럼 보인다. 우연이라는 것이다.


그의 탐욕이 그 얼마나 커다랬건 간에 처음부터 그가 이 집안의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겠다는 대담한 결심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최초에 소극적인 것으로서, 억눌린 채 기회를 엿보는 전철을 밟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우연과 소극성이 4명의 인물과 한집안을 태워버리는 막대한 들불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재료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욕망은 억압될수록 더욱 커다랗게 타오르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비탈을 접해버리면, 내달리는 수레바퀴처럼 망설임도 거칠 것도 없이, 빠르게 전개되어 버린다.


마침내 로랑이 테레즈와 결탁해 까미유를 죽여버리고 자신이 그 집안의 모든 것을 차지하겠다는 결심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저 욕망이 작금에 종말한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고 아들처럼 대하는 라캥 부인의 호감, 테레즈의 사랑과 같은 정서적인 조건, 누군가의 아들을 자처하고, 그 집안에 받아들여질 수가 있는 (아마도 당대의) 문화적인 조건, 까미유의 신체적 유약함, 그리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CCTV와 과학수사 같은 범죄환경으로서의 조건, 그리고 테레즈를 구원하리라는 왜곡된 자기합리화가 도덕적 조건으로 작용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숱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범죄행위를 억압하는 기제가 적을 때, 범죄는 대수 大數의 법칙을 따라 사회 어딘가에서 발생하게 마련이라는, 기계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위험한 생각이므로 더욱 상술하자면, 인간에게 욕망과 억압과 죄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본능이 자리하고 있는 한, 그것을 억압하는 장치들이 필요악이라는 서글픈 생각이다. 세상에는 이 일련의 본능이 죄악의 씨앗을 낳지 않는, 그러니까 억압과 죄종이 실질적인 범죄행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선량한 양심의 소유자들이 있다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장치로는 기원전으로부터 작금에까지 발명되어 온 여러 가지를 들어볼 수 있다. 논어나 성경의 예시, 사상과 신앙이 사회 전반의 무질서함과 부도덕함을 억제하는 도덕적 장치로 기능했다는 설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 외에도 함무라비 법전과 법가 사상의 예시인 숱한 제도적 장치의 기원과 필요성에 대한 이해 또한 이미 우리에게 깃들어 있다. 이러한 것들이 뭇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데 필요했던 전제는, 욕망과 파멸의 인과에 대한 우리들의 본능적 이해. 여전히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한 억압 장치를 무분별하게 남용했을 때 생겨나는 반대급부의 폐해들이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포스팅에서나 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차설.


*


본 극을 접하고 난 후 내가 말해보고 싶은 것은 욕망과 파멸의 인과, 그리고 운명에 대함이다. 그리하여 로랑은 결국 방아쇠를 당겼고 위의 전처를 밟아 그들은 몰락했다는 것이요, 서글픈 것은 그 끝에 예정된 비참한 말로를 미리 그려보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함과, 억압에 눈이 먼 인물들의 아둔함이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나는 괜스리 생각이 많아진다.


리뷰가 아예 딴 길로 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불안하지만, 극은 외면하기 힘든 커다란 질문을 안겨주었다. 그들이 예정된 파멸로 이어진 노선을 벗어날 수는 없었을까, 하는. 로랑의 가족이 화목했더라면, 로랑에게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그럭저럭 괜찮은 수입과 소유가 있었더라면, 테레즈에게 돌아갈 집이 있었더라면, 혹은 그 감옥과 같은 집을 벗어나 자립할 수 있는 경제적 힘이 있었더라면, 까미유에게 자기 자신을 믿고 긍정하는 힘과 타인의 불행을 이해하는 지혜가 있었더라면, 라캥 부인에게도 마찬가지 타인의 불행을 이해하는 지혜, 그리고 자애로움이 있었더라면… 어느 것 하나 그 연극 속에 대입하기 어려운 가정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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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묻는다. 이 모든 것들,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고 가혹한 운명을 자아내는 모든 것들로부터 이별할 수는 없을지에 대해. 로랑이 없었더라면 파멸이 일어나지는 않았겠지만, 여전히 테레즈는 아무런 자유의지도 없는 결혼생활을 이어나갔을 것이고 까미유의 히스테리와 라캥부인의 고압을 언제까지고 견뎌야만 했을 것이다. 까미유와 라캥부인이 테레즈에 대해 가진바, 수혜의식은 지워내기 어려운 것이고 테레즈 또한 그들이 가진 경제적 지위와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생각이 많아진다. 그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고, 이제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는 수단으로서 테레즈가 육아에 몰입하고, 왜곡된 욕망이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고, 한편 까미유는 자신의 비뚤어진 사랑으로 말미암은 테레즈의 무관심에 점차 좌절하고 분노하고 더욱 커다란 히스테리의 소유자로 전락해가며, 라캥부인은 제 아들을 대하는 테레즈의 태도에 말미암아 점점 더 가혹한 시어머니가 되어 갈지도 모르지. 로랑이 없었더라면 일어났을 지도 모를 이 익숙한 전개, 누군가의 완전한 희생으로 영위될 수 있는 굴레, 이것이 그러나 일전의 파멸 그 대안일 수 있는가.


이것 또한 고요한 몰락은 아닌지. 이렇게 형성된 무대 위, 촘촘한 거미줄 아래에서, 인간은 고요한 몰락과 가혹한 파멸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그래서 묻는다. 이 모든 것들, 가혹한 택지와 지엄한 운명으로부터 아예 이별할 수는 없을 지에 대해. 아직은 답할 수가 없다. 아직은 운명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 대항할 무기를 떠올릴 수가 없다. 이미 형성된 조건과 환경으로서의 운명, 그로부터 벗어날 방법, 그것이 나를 답답하게 한다.


**


어쩌다 보니 뮤지컬을 너무 서사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하게 되었다. 뮤지컬 적 요소에 대한 나의 관심과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이 리뷰에 담아내기에는 너무 얕아서, 충분한 이해를 담지하지 못하다고 여기기에 섣불리 드러내지 못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서두에서 '뮤지컬에는 인물 묘사와 대사가 많이 생략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언급했지만, 그것은 한편 뮤지컬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미친다. 활자가 한 인간의 심상 속에 가상의 인간들을 그려내 작동시키기 위해 그 바지런한 묘사가 필요했다지만, 연극과 뮤지컬은 보여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다만 연극과 뮤지컬이 또 다른 점을 들어 구분해 보자면, 등장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를 꼽을 수 있겠다.


극적 양식에는 일상어가 침투할 공간이 많지 않다. 우리가 학교와 회사와 동아리 등 뭍 일상에서 영위하는 언어를 차용할 수가 없다. 비속어까지 가지 않더라도, 일상어에는 담아낼 수 있는 내용과 전달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극적 양식이 차용하는 언어, 극적 언어에 대해 비일상적이고 어색하다는 인상을 지워내기는 어려웠다. 발성을 가득 담아, "하. 하. 오~ 나의 친구 까미유~"라고 말하는 등장인물에 대해 완전히 몰입하기 어려운 개인적 까닭이 여기 있다.


음악은 그것을 아예 다른 양식으로 치환한다. "술 한 자안~ 했어, 너무 보고 싶어서어~ 니가 싫어하는 술도 담배도 했어~"라는 가사로 된 음악에 내가 아무런 어색함을 느끼지 않듯이, 음악으로 된 대사는 가사가 되어 독백과 극성의 어색함을 이완하는 것 같다. 뿐 아니라 음악으로 된 서사는 관객에게 색다른 것을 선사해준다. 그것은 감정에 색을 입히는 작업 같다. 분노를 더욱 빨갛게, 좌절을 더욱 파랗게, 행복을 더욱 노란 빛으로 칠해서 내게 준다. 그 극명함, 극성이 가끔은 과잉이라는 인상을 낳기도 하지만, 감정의 풍만함과 과잉 사이를 조율하는 것이 바로 그들 배우의 탁월함을 결정짓는 기준이자, 이 양식만이 지니는 예술성의 척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 극에 대한 나의 평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었으리라고 믿는다. 감히 그런 탁월함과 예술성을 평론할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다른 방식으로 이 극을 찬미해야만 했기에. 이상 관극할 가치가 있는 고전, 수월한 표현으로 그려낸 뮤지컬, 테레즈 라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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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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