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초보 산책자의 기록

글 입력 2022.10.01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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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저녁 천변 길을 따라 걷는다.

 

처음에는 운동이 목적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 목표지점까지 갔다 되돌아오면 딱 한 시간이 걸린다. 애플 워치에 기록된 걸음 수는 약 6000보. 워낙 운동량이 없던 탓에 하루치 운동량을 채웠다는 알림이 뜨면 그저 뿌듯한 초보 산책자다.

 

걸을 땐 등과 가슴을 펴고 힘차게 걷는다. 예전에는 구부정하고 힘 없이 걷는다는 지적도 꽤 받았다. 자세가 성격과 태도를 만든다는 걸 우연히 깨달은 이후로는 늘 허리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걷는다.

 

이렇게 자신감 넘치게 걷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 리듬에 걸맞은 신나는 음악이 간절해진다.

 

하지만 이 시간만큼은 음악을 허락하지 않는다. 매번 나가기 전마다 이어폰을 챙기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고 뛰쳐나와야만 한다. 이 운동과 산책의 애매한 줄타기를 할 땐 내가 내뱉는 호흡에 집중하고, 당겨오는 근육을 느끼고, 떠오르는 잡생각을 떨쳐내거나 혹은 그것에 깊이 빠져보기로 스스로와 약속했기 때문이다.

 

숨이 차기 전까지 나는 그날 있었던 온갖 일들에 대해 복기하듯 역 재생한다. 잘한 일과 못한 일, 후회되는 일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나열한다. 그러다 점차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고 호흡이 가빠 오면 마음과 감정을 어지럽히던, 그중에서도 가장 불안정한 생각부터 소거된다.

 

그러니까 이 걸음은 나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하나 둘 버리는 연습이다. 기억과 감정은 숨과 함께 버려야 뒤탈이 없다는 걸 매일의 걸음 끝마다 느낀다.

 

생각을 비우며 걷다 보면 내 주변을 채우는 많은 것들이 보이고, 들린다. 물이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는 소리, 풀벌레들의 합창, 오리 가족이 푸드덕거리는 소리, 발목까지 자라난 풀잎이 가을바람에 스치는 소리, 함께 걷거나 뛰는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 옷감이 구겨지는 소리, 모자챙 아래로 작게 소용돌이치는 공기가 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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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꽤 많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산책’에 대한 로망이라고나 할까. 얼마 전엔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를 읽었고, 그 후엔 유튜브를 통해 산책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나열한 영상을 만났다.

 

영감이 샘솟고, 무언가 홀연히 나타나 내 마음을 단번에 휘감아버리는 일 같은 건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도 언젠가 나만 알 수 있는 그 ‘최고의 순간’을 마주할 수 있길 바라면서 그저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인다.

 

한참 걸으며 목표지점까지 다다른 후에는 그대로 다시 뒤돌아 같은 길을 되돌아 걷는다. 그럼에도 매번 다른 길을 걷는 것처럼 낯설다. 그럴 때마다 내 좁은 시야를 알아차린다. 내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할 수 천, 수 억 가지의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오늘도 같은 길을 걷다가 문득 강가에 세워진 무릎 높이까지 오는 듯한 작은 솟대를 발견했다. ‘웬 솟대지?’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지는 햇빛이 닿자마자 버려진 자전거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그 자리를 금세 지나쳐버렸지만, 이상하게도 어쩐지 꼭 그런 것들이 오래 마음에 남곤 한다.

 

날이 선선해지면서 더 가볍고 경쾌한 산책이 가능해졌다. 저녁을 먹고 나가 여섯 시부터 걷기 시작하면 집으로 돌아올 땐 어느덧 깜깜해진 하늘이 날 반긴다.

 

오늘의 상념은 오늘 바로 이 길 위에 살포시 내려두어야지. 내일은 내일의 짐만 가벼이 들고 다닐 수 있도록.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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