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 이야기는 흰색인가 미색인가 - 베르히만 아일랜드 [영화]

진짜라면 어떻고 가짜라면 어떠한가
글 입력 2022.08.03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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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서 글을 쓰면서, 패배자처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하면서 느낄 수 있는 패배감의 깊이와 정도는 아주 다양하다. 잘하리라 믿었던 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나, 혹은 남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최악은 최고로 존경하는 사람을 비교 대상으로 둔 채 좌절하거나, 같은 직종에 있는 연인에 대해 패배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감정을 건강하게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라 자신한다)

 

 

 

수많은 이혼을 부른 그 영화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서는 두 경우의 이야기가 전부 등장한다. 크리스와 토니. 영화감독이자 부부인 둘은 각자의 이야기를 작업하기 위해 영화 거장인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생애를 보냈던 포뢰섬으로 향한다. 베르히만이 풀어내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생애마저도 그들에게는 다채롭고 새로운 경험이 되리라고 믿은 것이다. 다소 부담이 실려있는 영감을 기대하며 조금은 긴장된 분위기로 영화가 시작된다.


그것도 잠시, 크리스는 베르히만의 여러 가지 흔적들이 남아있는 공간에서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운 완벽한 풍경이라 어떤 것들을 이루더라도 보잘것없어질 것 같은 막막함. 자신의 우상이 여러 가지를 이루었던 곳에서 그만큼의 영감을 조금이라도 얻어 갈 수 있을지, 내가 무엇이라도 이루어낼 수는 있을지, 나의 무지와 한계에 대한 섣부른 절망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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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근심이 교차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렇게 낯설지 않다.


“나에게 집필이 고문인 거 알잖아. 자해랑 비슷해. 피 말리는 짓이야.”


그녀의 걱정은 갈수록 구체화된다. 그 걱정을 증폭시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남편, 토니다. 크리스가 한 자도 쓰지 못할 동안 토니는 빠르게 작업을 진행해 나간다. 그리고 그 모든 진행 과정에서 크리스는 배제된다. 크리스 역시 그것을 알고 있다. 왜 당신은 나와 시나리오 이야기를 하지 않아? 직접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반대로 크리스가 배제를 택하기도 한다.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베르히만 투어에서 크리스는 다른 투어를 선택한다. 정석적인 가이드 투어보다는 동네에 살고 있는 젊은이와 함께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기로.

 

그 부분에서 나는 “둘이 정말 안 맞아 보이는데 어떻게 결혼한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 있었겠지.” 그런 메모를 썼다. 사랑이란 가끔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까.


그러나, 둘의 갈등은 예고된 대로 흘러간다. 영화 내내 토니는 자신이 써왔던 영화, 앞으로 쓸 영화에 대해서 크리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니까 다른 일을 해 봐.”

“무슨 다른 일? 당신 내조?”

“주부도 훌륭한 직업이야.”


집필이 힘들다는 크리스에게 제대로 된 조언 대신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토니의 말이 종지부처럼 마음에 박힌다. 동료가 같은 고민을 했어도 저렇게 말했을까? 글쎄.

 

관계를 끝내는 방식 중 하나가 교과서처럼 펼쳐진 기분이었다. 영화의 초반에 등장했던 ‘결혼의 풍경’은 역시 복선이었을까? ‘수많은 이혼을 부른 그 영화’라는 수식어가 하필 베르히만 아일랜드에 철저하게도 어울려서 한숨이 났다.

 

 

 

흰색과 미색, 흐트러진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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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아직 앞선 이야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는데 다른 이야기가 갑자기 옆구리를 쿡 찌른다.

 

크리스가 시작한 시나리오다. 어찌 보면 가장 평범하고 뻔한 이야기다. 이루지 못한 사랑과 갈등. 이루지 못한 것들을 섬에서 진행되는 친구의 결혼식이라는 둘도 없이 환상적인 공간에서 결론지으려는 두 남녀의 이야기. 이루지 못한 것은 당연하게도 사랑.


진짜 이야기는 에이미의 흰색 원피스에서부터 시작된다. 에이미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흰색 드레스를 가지고 왔다.


흰색인지 미색인지는 모르겠어. 미색에 더 가까운 흰색인 것 같아. 네 생각은 어때?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에이미는 순수히 아름답다. 그들에게 흰색과 미색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결혼식 내에서 흰색 차림을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신부뿐이다. 에이미와 조지프의 이야기에 친구의 결혼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제일 극적인 상황에 무엇이 눈에 찰까. 그들이 사랑의 결실을 보았다면 입을 수 있었던 흰색 드레스에 대한 아쉬움이 더욱더 진득하게 드러날 뿐이다.


안주하고 싶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에이미의 모습은 눈을 질끈 감아야 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조지프가 시야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안타까운 눈빛으로 주변을 훑고, 혹시나 자신을 떠날까 전전긍긍. 마침내 자신을 먼저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가릴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마음은 차가워지는데 눈물은 뜨겁다. 그 순간을 너무 잘 알고 있어 숨이 막혔다.

 

솔직함에 상처받는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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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 한센 러브의 영화 속 여성들은 끊임없이 불안하다. 건조하고 위태로우며, 내외부의 문제로 인해서 흔들리는 시선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들은 좌절하지 않는다. 영화가 말해주는 것은 거기까지다. 그래도 충분하다고. 위로도 좌절도 보여주지 않은 채 그대로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나는 에이미의 감정에서 채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얼떨떨하게 영화관을 나와야 했다.

 

인물의 행동에 대한 설명도 그다지 구체적인 편은 아니다. 주로 인물의 뒤를 따라가는 촬영법 때문에 관객은 그들을 지켜보는 방식으로, 줄곧 영화에서 배제된다. 특히 후반부에 가면 크리스와 조지프, 에이미까지 한 테이블에 앉아서 함께 술을 마시는 등 픽션과 현실이 아예 합쳐지면서 더욱 혼란은 가중된다.


영화를 같이 보러 갔던 K와는 ‘그래서 어디까지가 현실이냐’며 황당함을 나누었다. 한참 토론을 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예전에 받았던 질문이 떠올랐다. 미소도 같이.


“네가 쓰는 글, 어디까지가 진짜야?”

 

내가 만든 이야기니까 아무래도 전부가 진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답했던 것 같다. 내 글들의 주인공들은 가끔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을 이루거나, 내가 말하지 못한 경험들을 대신 말해주곤 했으니까. 한편으로는 글이 진짜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아 한센 러브도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부러 픽션과 현실을 헷갈리게 배치해서 결국 누구의 이야기인지 길을 잃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을지도.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쩌면 감독 자신일지도, 어쩌면 크리스일지도, 어쩌면 에이미일지도, 마침내는 나일지도 모른다. 흰색인지, 미색인지. 현실인지, 픽션인지. 그런 것 구분 없이 그대로 마음을 열고 포뢰에 다시 나를 내려두고 싶어진다. 세상의 모든 여성들의 사랑과 일을 응원하는 감독의 선물을 즐기며,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섬에 대한 아릿한 그리움을 가슴에 담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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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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