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눈부신 주황색 여름을 보내며 [사람]

나의 여름은 주황빛 장마
글 입력 2022.07.25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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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에 빠졌을 때 세상에서 제일 무모한 인간이 된다. 쇄골에 6년째 뿌리내리고 있는 능소화 타투도 그런 무모한 것들의 부산물이다. 세상에, 꽃을 보고 사랑에 빠질 줄이야.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들어간 카페였다. 비를 대충 닦아내고 호흡을 고르면서 의자에 몸을 기댔을 때 그들을 발견했다. 호되게 떨어지는 비를 따라 주황색 꽃이 너울너울 춤을 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굵지도 않은 줄기에 꽃이 무겁게도 매달려 있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꽃 하나가 통째로 툭, 하고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 혹시 저 꽃 이름 아세요?”


설거지를 하던 사장님은 조금 몸을 뒤로 빼서 보더니 ‘저거요? 능소화요.’ 하고 다시 설거지에 열중했다.


운명을 이렇게 어이없이 만나도 되는 걸까? 이렇게 긴장감 없이 운명의 정체를 알아도 되는 걸까? 그대로 앉아서 비를 맞는 능소화 덩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꾸만 지는 능소화가 아쉬워 아예 쇄골에 새겨버렸다. 하늘을 향해 높이 오르는 꽃.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개구진 꽃.


지금 사는 동네를 좋아하게 된 것도 능소화의 역할이 크다. 건대입구로 이사 온 지는 올해로 3년째가 됐다. 건대입구역을 관통하는 지하철은 2호선과 7호선. 회사와 집은 2호선 위에 나란히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많아 싫었다.

 

요일을 가릴 것 없이 술 취한 사람들, 들뜬 사람들의 붉은 얼굴이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날을 더 무겁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번화한 곳으로부터 멀어지게 걸었다. 집에서 동쪽으로 나가면 한강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면 성수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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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한강으로 가는 길에 시장을 만나서, 그냥 시장을 따라서 걸었다. 길이 안내하는 대로 걸었다. 길이 갈라지면 골목으로 들어가고 뻗은 길을 따라서는 주변을 살펴보면서. 그러다 한쪽에는 카페를 둔 어떤 터널로 통하는 길을 마주했다. 터널은 한강을 마주한 콘크리트담과 몸을 붙이고 있었다. 땅 끝에 갑자기 확 트인 강이 등장하는 그 터널이 좋아서 그 부근으로 자주 걸었다.


장마가 얼추 지난날이었다. 터널을 걸어가는 중에는 항상 터널을 다 지나고 나면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지는 않을지, 시간을 뛰어넘어볼 수 있지는 않을지. 그런 얕은 기대감으로 걷곤 하는데, 그날은 정말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말았다. 비가 걷히고 거짓말처럼 맑아진 하늘에, 마법 같은 오후 5시의 햇살을 있는 힘껏 반사하고 있는 주황빛 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높게 치솟은 주황빛 담은 방패처럼 서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고요히 멈췄다.


뜨거운 햇살을 받아 피운 주황색의 넓은 잎이 가끔 부는 바람을 따라 일렁일렁. 흔들리는 꽃을 따라 내 마음도 일렁일렁. 그리고는 여름 내내 그 길을 따라 걸어서 능소화를 보러 다녔다. 매년 능소화를 찾으러 다니면서 능소화가 많이 피는 곳도 알게 됐다. 가회동 돌담길, 혜화동의 어떤 아파트 앞, 뚝섬 유원지, 동대문 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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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앞은 꼭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다. J와 북촌을 뒤덮은 능소화 앞을 걸으면서 늘 무언가와 정신없이 사랑에 빠지는 날을 고대해왔는데 그게 꽃이 될 줄은 몰랐다고 이야기했다. J는 웃으면서 ‘그럴만한 꽃이야’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능소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장마가 지나고 바닥을 붉게 물들인 능소화를 아쉬워하던 날들과 다음날 거짓말처럼 더 탐스럽게 피어난 기특한 모습. 나는 이렇게 미련이 그득한데, 져버릴 때는 꽃이 통째로 툭 떨어져 버리는 그 단호함까지.


J는 ‘너랑 많이 닮은 거 같아’하고 웃었다. 사진도 몇 장 찍어주었다. 능소화만을 찍었었는데, 처음으로 나와 능소화가 한 컷에 담겼다. 그리고 그 사진은 여름이 그리울 때마다 꺼내보는 사진이 됐다.


8월이 넘어가면 능소화는 온통 바닥을 뒤덮고, 덩굴은 다시 짙은 초록색으로 얼굴을 바꾼다. 주황색 그늘 아래에서 즐거웠던 여름이 반절 정도는 넘어갔다는 신호다. 내년 능소화를 기다리며, 남은 여름을 흘려보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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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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