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산책으로 쓰는 편지

일상담과 편지 사이 그 어딘가
글 입력 2022.04.1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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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하나를 보고 오는 길. 집에서 짐을 갈무리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공원을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4월의 때아닌 더위가 자꾸만 시원한 커피를 부른다.

 

나는 내가 가끔 앉는 돌 의자-공원 한 공간에 띄엄띄엄 존재하는 나무 그루터기 같은 높이의 돌들인데 나는 이렇게 부르고 있다-에 앉아 손이 닿지 않도록 애쓰며 조심스럽게 빨대 비닐을 벗겨냈다. 여름 카디건을 가지고 나왔지만 막상 입고 있으려니 더워 진작에 벗었다. 나는 얇은 반팔 하나, 봄가을 바지를 입은 채로 햇빛을 머금어 따땃한 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곧 내 등도 햇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따뜻함과 뜨거움 초입 사이 그 어딘가의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아- 이런 게 일광욕인가. 좋다아. 집순이는 빵 굽는 고양이의 심정이 되어 햇빛의 온도를 속으로 칭찬했다.

 

오후 서너 시의 햇빛으로 등이 따시게 데워지고 있다면 내 앞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맞부딪혀왔다. 매서운 겨울바람도, 강인한 바닷바람도 아닌, 탁 트인 공간에서 불어올 만한 그런 존재감과 너비의 봄바람이었다. 꽃향기 실어오는 미풍보다는 강하지만 정면으로 오는 바람에 잠시 눈 찡그릴 일 없는 그 정도의 바람이다. 내 머리 위에선 그런 바람을 타고 까치 같은 새들이 종종 날아다녔다. 좋은 기분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 저절로 그 좋음을 지인들에게 알리게 했다.

 

‘공원에서 햇빛이랑 바람 맞으면서 아아 마시는데 좋다..’

 

친구에게서 곧 답장이 왔다.

 

‘힐링이다’

 

따끈했던 돌 의자에서 일어나 공원을 걸으며 새소년의 <난춘>을 들었다. 봄 노래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춘>을 다 듣고 나서 나는 내 안의 멜랑콜리함이 해소된 걸 느꼈다. 그 노래를 들으며 생긴 센티멘털 전에 햇빛으로 충만해지는 동안 생겼던 경미한 멜랑콜리함이 선행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래서 <난춘>을 틀었나. 그것의 정체는 뭘까, 원인은 뭘까, 옅은 의문은 스쳤으나 사실 크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런 게 있었구나-하고 조용히 수긍했다. 하루 중 해가 가장 높아 햇살이 넘칠 때라도 발치엔 짧은 그림자가 생기니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다.

 

시야에 새로 심어 놓은 알록달록한 꽃들이 걸렸다. 나는 말랑한 심산으로 단호하게 결정했다. 저기까지 가는 동안 선우정아의 <봄처녀>를 들어야겠다고. 이 노래를 다 들을 때쯤 저 화단에 도착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인위적인 속도 조절 없이 발 닿는 대로 걸었다. 시어 같은 가사들을 따라 불렀다. ‘볼엔 진달래 눈은 민들레- 입술은 쭉- 철쭉. 목련 파우더, 라일락 칙칙. 마무리는- 에이취.’

 

내 바람대로 노래가 끝날 즈음 내 앞에 그 꽃들이 놓였다. 꽃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친구는 사진 속의 꽃이 장미인지 물었다. 저렇게 나는 장미는 처음 본다며. 나는 라넌큘러스인 것 같다고 답했다.

 

내향적인 성격이라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기운이 소진되는 나. 그런 내가 만나고 돌아오는 내내 기운찬 사람이게 해 주는 오랜 벗들. 그 애들은 서로 다른 도시에 살거나 회사에서 근무 중이다. 카톡을 하며 나의 지금을 전할 수 있지만 아쉬움이 생긴다. 이 좋은 걸 너네랑 같이 하면 더 좋을 텐데. 당장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지금 나의 기쁨을 바로 같이, 대면하여 나눌 수 없는 현실에 조금은 적적하다. 앞선 멜랑콜리는 여기서 온 걸까? 나는 별로 찾을 생각 없었던 답을 찾아내고는 또 조용히 끄덕인다. 나는 사실은 너희가 보고 싶은가보다.

 

왠지 시원해진 마음으로 이제 집에 돌아갈 때임을 느낀다. 또 다른 봄 노래는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요즘 애청곡인 레드벨벳의 <Feel My Rhythm>을 틀었다. 나는 이미 그 화단 앞에서 레드벨벳의 <Psycho> 선율을 흥얼거리고 있었으니까, 사실 어딘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이 노래를 듣고 싶었던 거거든. 공원을 벗어나는 동안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선율을 샘플링해서 수놓아진 음표들이 내 발걸음을 감쌌다. 아까는 너희와 함께한 걸음이었다면 지금은 나 혼자 걷는 걸음이다. 너희에게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풍경을 내 눈에 비춰가며 걸었다면 답을 안 이후의 걸음은 다시 나 혼자만의 걸음이야. 그래도 심상하진 않다. 조만간 너희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도 계속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너희를 만나며 살 거니까.

 

우정도 사랑의 일종이라면 나는 너희를 사랑해. 앞으로 함께 할 날들을 아직 겪지 않고도 아낄 만큼. 말로는 발화하기 힘든 말들을 이렇게나마 남겨본다. 기쁘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내가 나눌 수 있게 해줘서 고맙고 또 내게 나눠주어서 고마워. 우리 잘 버티며 자주 행복해 보자.

 

 

[크기변환]은은_산책으로 쓰는 편지.jpg

ⓒ 2022 은은 (@euneun_shine) all rights reserved

 

 

추신. 너흴 만나는 날엔 맛있는 아인슈페너를 마실 거야. 멋지고 좋은 카페에 데려가 줘.

 

 

-H와 Y에게, 어느 봄날 산책 중인 내가, 우리의 우정과 시간을 담아.

2022.04.17 보냄.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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