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내 오빠들의 쇠퇴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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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빠순이’ 경력 대략 15년 차.
빠순이란 단어에 담긴 비하 의도를 싫어하지만, 얼마나 열혈한 팬 생활을 했느냐에 대한 보편적이고 간단한 지표로는 저것만큼 직관적인 표현이 없는 듯하다. 내 모든 시간과 마음과 돈을 바쳐 좋아했노라고, 그 열정을 수치화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으니 그냥 나 빠순이요~ 하고 말아버리는 거다. 물론 내가 사생활에 집착하며 스토킹하거나 라이벌을 욕하는 ‘그’ 사전적 단어의 빠순이는 아니지만 말이다.
케이팝 아이돌 붐이 일고, 인터넷 중심 팬 문화가 절정에 이르던 2000년대 초반부터 누군가의 팬이 되길 자청했다. 사실 스스로 선택 했다기 보단, 그쪽이 먼저 나를 ‘덕통사고’ 시켰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한때 2세대 아이돌의 주축이었고, 네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소속사의 간판이었으며, 한류 진출까지 성공적으로 이뤘던 ‘어떤’ 아이돌의 팬이라는 게 나의 오랜 정체성 중 하나이다.
다른 아이돌을 좋아했다면 더 편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춤과 노래를 더 잘해서 어디 내놔도 안 부끄러울 실력을 가졌다던가, 그래서 여전히 남들에게 인정받는다거나, 돈 많은 소속사의 푸시를 받아 여전히 방송에 잘 나오고 있다거나 하는. 울오빠들도 그런 아이돌이면 더 좋았을 텐데, 부끄럽게도 현실은 한 멤버의 대형사고와 그 외 자잘한 잡음들로 벌써 오래 전 ‘잊혀진’ 아이돌이 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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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온전히 내 세상을 차지하고 있던 이가 점점 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건, 말 그대로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이에 난 ‘쇠락’이란 표현을 쓴다. 물론 갓 스물로 데뷔한 탓에 그들은 여전히 젊고 꿈 많은 30대 청년들이지만, ‘아이돌’ 혹은 ‘연예인’으로서 갖는 사회적 지위와 파워는 이미 많은 부분 주저앉았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쇼비즈니스 세계에서 살아남을 매력과 권력이 거진 소멸됐고, 그럼에도 연예인이란 직업을 버리지 못해 어정쩡한 위치에서 숨 붙이는 그들을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속상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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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인 다섯 명 멤버는 제각각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들어오는 일거리의 수준이 대폭 낮아졌음에도(최근 학생 감독 졸작품에 출연했다) 성실히 일하고 있다. 연기에도 노래에도 춤에도 큰 재능이 없던 사람이었지만(물론 외모와 기럭지엔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 타고난 상냥함과 정성으로 일을 계속 받는다.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해 하며 바쁜 스케줄 없이 적당히 느긋한 삶을 즐기고 있다.
또 한 명은 사업을 시작했다. 연예인일 때의 사회적 지위를 꽤나 즐기는 듯 해보였던 그는, 아마 일정 수준 이상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 같다. 신년을 맞아 본인이 차린 회사 건물에 팬들을 초청해 작은 이벤트를 가졌는데, 나름 대표님 소리 듣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딘가 마음이 놓였다. 세상물정 깨치기 쉽지 않은 일을 첫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이 나름 번듯한 회사를 차리기까지 얼마나 고군분투 했을지, 굴욕적이고 아쉬운 순간을 겪진 않았을지. 그런 대견한 마음이 문득 들었다.
다른 두 명은 여전히 영광 속에 산다. 오래 전 짧게 스쳐갔던 전성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자존심 굽힐 줄 모르고 철없는 사람이란 소문을 많이 듣는다. 그렇게 ‘급’에 대한 이해관계 충돌로 제안 온 일을 거절한 후 남는 건 스케줄 없는 연예인의 고독뿐이어서,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답답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내려놓을 수 없는 그 시대의 영광이 얼마나 달콤했던 지를 알기에 차마 쓴 소리가 나오진 않는다. 분명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결과적으로 고여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속상하다.
마지막 한 명은 타고난 팔자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장 무능한 멤버였음에도 가장 수려한 외모로 인기를 독차지했던 멤번데, 지독한 사회면 사고를 치고 난 뒤에도 여전히 가장 ‘잘 나가고’ 있다. 나는 개인의 성공이 곧 팀의 자양분이 될 거라 믿으며 이 사람의 독주를 응원해야 할지, 아니면 솔직하게 부럽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당장 욕하며 내쳐도 시원찮을 멤버지만 또 팀의 일원이라 생각하면 차마 관심을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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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의 정체성은 곧 팬 개인의 정체성과 동일시 대해진다. 내 오빠의 ‘병크’ 때문에 나도 고개를 수그려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15년여의 팬 생활 중 무려 10년을 그 수치 속에 살아왔는데, 그럼에도 ‘탈덕’하지 못했던 이유는 역시 내가 ‘을’이기 때문이다. 팬심이란 모든 게 ‘무조건’ 속에 이뤄지는 애정이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부족해졌더라도 조건 없이 포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수없이 배신당했음에도 이상하게 유지되는 끈끈한 의리 같은 것이 마음을 거두지 못하게 해버리는 것이다.
차곡차곡 무너지는 내 아이돌의 쇠퇴를 지켜보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담담히 시간이 흘러 지금까지 왔다. 주는 것 하나 없이 오히려 뒷목 잡을 일만 만들어주는 철없는 울오빠들이지만, 계단을 내려오는 길조차 함께 가고 싶은 이 마음이 바로 팬심이 아닐까 싶다.
[박태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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