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 꺼진 방, 소파에 깊숙이 앉아 듣는 음악 – Epik High Is Here 下 [음악]

글 입력 2022.02.2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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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마음도 푹 꺼지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해야 하는 일은 쏟아지고, 알아주는 이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를 작은 조각조각으로 나누고 나눠 빠짐없이 해내려 애쓰는데, 절대적인 시간과 체력이 따라주질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피로에 잠식되어 있다.

지친 날들이 이어질 때면 환기가 필요하다. 휴식, 완전한 휴식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대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진정한 휴식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 이름을 듣기만 해도 신났던 취미들은 시시해지고, 이것도 저것도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크기변환]Epik+High+Is+Here+Cover.jpg


 
여기저기서 같은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쌍의 새가 서로를 마주 보고 날개를 천천히 움직이는 이미지. 에픽하이의 새 앨범 의 커버 사진. 노래가 좋다는 이야기들, 오래전 에픽하이가 떠오른다는 말. 가만히 누워 앨범의 전곡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하고 재생을 꾹 눌렀다.

문득 이렇게 앨범이 나왔다는 소식에 첫 트랙부터 찬찬히 들어보는 시간, 이 시간이 얼마 만인지 아득해졌다.
 
 

Prequel: 지금의 추억은 그때의 꿈

 
 
 
그날도 피곤이 몰려와 눈이 감겼고, 곡들을 적당히 넘기며 감상해 보려 했다. 그런데 두 번째 트랙이 시작되는 순간 잠이 달아났다.
 
‘Prequel’은 사람들이 트렌디하다고 말하는 비트와 흐름과는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에픽하이가 지나온 삶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음악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겪었던 고민이 겹겹이 쌓이고, 오늘의 다짐이 더해진 3분이었다.
 
열여섯 마디씩 가까워지는 Bucket list
지금의 추억은 전부 그때의 꿈
빛보다는 빚
믿음보단 불신
음악보다 더 고민했던 먹고사는 일
작은 기적의 빛 한 줄기 나눠주기를 
외면한 잘 난 하늘이
원망스러워 날아올라 콧대 높은 하늘 위
넘어진 적은 있어도 포기한 적 없어
세상이 정한 한곈 시작에 넘어섰어
몇 번을 다시 써도 삶의 끝 페이지에
마지만 문장은 
I was here 
 
- Prequel 中

대상도, 시기도 불분명한 그리움,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 함께 든다. 스쳐왔던 어떤 날들, 그때 그 시절의 꿈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의 나에게 꿈은 간절히 원하는 것이자 두려움의 대상, 어쩌면 단순한 길을 놔두고 왜 이리 멀리 골목골목을 지나왔는지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힙합을 하는 사람도,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도 이해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힙합 프로그램에 등장한 악동뮤지션의 이찬혁이 했던 말처럼. 어느 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 이건 하나의 유행 혹은 TV 쇼, 우린 돈보다 사랑이, 트로피보다 철학이, 명품보다 동묘 앞 할아버지 할머니 패션. 중요한 건 평화, 자유, 사랑이라고 노래했던 데에 사람들이 환호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여전히 힙합을 좋아하고 기다리는 이유. 짧은 하나의 곡 안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음악, 4분 남짓한 그 시간에 누군가의 삶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힙합은 현실을 뛰어넘기도 한다. 발음과 모양이 유사한 말들을 조립하고 배열한 음악엔 현실에선 느낄 수 없는 쾌감, 통쾌함이 있다.
 
 
 
BRB: 챙길 것보단 두고 갈 게 많을 인생이 여행 같은 이유

 
 
 
열두 곡, 수록곡을 모두 들어보았다. 그중에 듣는 순간부터 가장 마음에 들어온 건 ‘BRB’다. 첫 문을 여는 가사부터 좋았다. 부드럽게 흐르는 피아노 선율 위로 들려오는 가사들이 내 마음과 같았다.
 
짐가방엔 슈트 한 벌과 구두
낡은 사진첩
담배 한 보루
문득 드는 생각
챙길 것보단 두고 갈 게 많을
인생이 여행 같은 이유 
언제일까?
길고 긴 터널 속 빛 한 줄기를 찾은 
저 나비처럼 춤춰 나는 날 
난 자유롭고 싶어
무책임하고 싶어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잘라내고 싶어
갈수록 하고 싶은 일보다 피하고 싶은 일만 늘어
 
- BRB 中
  
강한 비트와 빠르게 질주하는 곡이 아니라 더 곡의 의미가 깊이 다가왔다. 바깥의 누군가가 보 기에 삶은 거센 파도 하나 없는 고요한 바다처럼 흐른다. 잔잔하게 천천히 흘러가는 BRB의 선율처럼. 하지만 그 세계 안에는 무수한 밤,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다.

몇 해 전,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일이 떠오른다. 그해를 빛낸 문학 작품에 주는 권위 있는 상을 음악가에게 줄 수 있는지 의견이 분분했다. 그때에도, 지금도 나는 노랫말이 곧 시의 구절, 소설의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BRB가 인생을 말한 아름다운 음악이자, 절망과 희망의 순간을 노래한 시인 것처럼.
 
 

Rich Kids Anthem: 손에 잡힐 영원은 없어

 
 
 
관심과 함께 늘어나는 건 
불안과 고민
모두가 새로운 걸 원해 늘 새로고침
손에 잡힐 영원은 없어
나도 악착같던 삶에 없던 여유를 찾고 보니
알게 됐어 남는 건 부서진 혼
포기는 쉽지 않고 소소한 이 행복들에 감사하긴 
씀씀이가 너무 커진 손 
 
- Rich Kids Anthem 中
 
급하게 할 일을 마무리하고 버스에 오른 밤. 핸드폰 속 지도만 들여다보며 정신없이 걷다 고개를 들었다. 광화문. 넓게 탁 트인 도로 위로 푸른 밤이 내린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줄만 알았던 서점, 손을 잡고 따라갔던 공연장, 통신이 먹통이 된 날 홀로 향한 미술관. 이곳을 채우고 있는 것들을 좋아했고, 그 모든 걸 품고 있는 공간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그곳에 서서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추위를 그대로 맞으며 노래를 들었다. Rich Kids Anthem은 도시적이다. 이하이의 목소리는 불빛이 가득한 도시의 밤과 하나처럼 스며들고,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 더 원할 게 뭐 있어 노래하지만 깊은 공허와 상실이 느껴지는 이 노래는 너무나 도시적이다.

우리는 하늘의 별을, 서로를, 음악을 가지고 있다는 후렴이 반복되지만, ‘이 행복들에 감사하긴 씀씀이가 너무 커진 손’이라는 랩의 구절과 충돌하고 만다. 알다가도 모를 세상, 알다가도 모를 나의 삶, 그 속의 나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앨범을 반복해 듣는다. 들으려 하지 않아도, 자꾸 듣고 싶은 음악, 어떤 날 어떤 공간에서 듣는지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음악. 이내 깨닫는다. 음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밤마다 새로운 음악을 찾아 헤매던 기억들, 너무 많이 들어 다 외워 버리던 가사를 교과서 위로 빼곡히 쓰던 날들. 음악은 삶을 구원한다.
 
불 꺼진 방, 오래된 푹 꺼진 소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싶은 날,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날. 음악이 나에게 있다.
 
 
 

컬쳐리스트 명함.jpg

 

 

[이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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