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 죽음. 레하임! - 당신이 살았던 날들

기억하고 계승함에, 생은 끝나지 않고 살아 숨쉰다
글 입력 2022.02.2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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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죽어간다. 죽음이라는 끝이 정해진 여정길에 오른다. 그 여로의 어느 지점에서 멈추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삶. 죽음. 더없이 덧없는 듯하다. 인생무상, 공수래공수거.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고 아무도 이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 죽음은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그 사람의 성별은 무엇인지 등에 일절 관심 없이 알 수 없는 기준으로 생명을 앗아간다. 그렇기에 당장 내일 죽음이 나를 찾아오더라도 후회 없을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물론 잘 되지는 않고 있지만.


나에게 죽음이 찾아오면 그것으로 끝.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듯하다. 하지만 [당신이 살았던 날들]의 저자, 랍비 델핀 오르빌뢰르는 죽음이 그 사람의 완전한 끝은 아니라고 책에서 말한다. 11개의 챕터, 11개의 이야기. 죽은 이와 남겨진 이 사이에 굳건히 서서 두 존재의 교량 역할을 하는 장례 집전자 오르빌뢰르. 떠나간 이를 기억하고 계승함에 죽어서도 살아있다 말한다. 생을 살아온 당신의 나날들. 죽음 뒤에도 반드시,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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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시간 사이와 세대 사이에, 존재했던 사람들과 존재할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우리의 거룩한 이야기는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 통로를 연다. 이야기꾼의 역할은 그 입구에 서 있으면서 그곳이 열려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럼, 얘기해주세요......!"

 

[당신이 살았던 날들 中]

 

 

랍비 오르빌뢰르는 자신을 '이야기꾼'이라고 지칭한다. 사람들이 삶의 전환점에서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들 곁에 있다고 한다. 그렇게 랍비인 그녀는 장례 집전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한다. 생을 달리한 이의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에게 생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랍비적 해석을 곁들여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에게 그 사람의 생애를 번역해 들려준다. 떠나간 그 사람의 생의 이야기를 남아 있는 자들의 가슴 한켠에 각인시킨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가 아니다.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당신의 살아생전 이야기들을 들려줌으로써 장례에 참석한 이들은 그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기억할 수 있게 된다.

  

기억. 기억의 힘. 불현듯 안 애니메이션의 대사가 떠오른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진정한 죽음은 육신의 소멸이 아닌 것일까.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한, 그 삶은 영원토록 유지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에게 기억될만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나의 죽음 후에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 잠깐 동안 고민해 봤는데, 아직 인생을 덜 살아서 그런지 상상이 잘 되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나의 생애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기억하는 이상 죽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생이 끝난 후 자신을 기억하는 이들의 가슴 한켠에 자리 잡아 영원토록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이마트 피자를 보면 돌아가신 친할머니를 떠올린다. 매주 토요일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이마트 피자를 사가지고 가족과 함께 할머니 댁에 들려 다 함께 먹고 나면 할머니는 남은 피자 조각들을 보온밥통을 열어 밥 위에 얹고는 뚜껑을 닫으셨다. 언제고 따뜻하게 드시기 위해서였으리라. 또 나는 장기판을 보면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떠올린다. 어렸을 적 방학기간 찾아간 전주의 시골에선 매일 저녁 할아버지와 나의 장기 대결이 펼쳐졌다. 열에 아홉은 할아버지가 이기셨지만 한 번쯤은 내가 이길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어~허~!" 하시며 아쉬운 듯 웃으셨다.

 

지금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세상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지나간 추억들을 상징물들을 보며 떠올릴 따름이었다. 다시 못 볼, 다시 오지 않을 그 추억들을 그렇게 보듬기만 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그 행동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이상, 그 기억을 꺼내어 볼 때마다, 내가 그 기억을 이야기할 때마다 내 가슴속 한켠에 웅크리고 있던 할머니의, 할아버지의 생의 한 조각이 박동하는 것이구나. 그들은 죽지 않고 내 안에 살아 숨 쉬는구나.' 행동은 같지만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내 생이 조금 더 소중해지고 무거워졌다. 내 생의 무게는 나 하나뿐만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는 이들의 조각조각의 무게까지 더해졌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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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사악이 어디에 갔는지 알고 싶어요. 엄마 아빠는 어딘지 말할 줄 모르거든요. 결정을 못하나 봐요. 내일 사람들이 동생을 땅에 묻어줄 거라고 해놓고, 또 동생이 하늘로 갔대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동생은 땅으로 내려간 거예요, 아니면 하늘로 올라간 거예요? 어디를 봐야 동생을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요."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죽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정의일 것이다. 죽음은 말을 벗어나는데, 죽음이 정확히 발화의 끝에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그것은 떠난 자의 발화의 끝일뿐 아니라, 그의 뒤에 살아남아 충격 속에서 늘 언어를 오용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발화의 끝이기도 하다. 애도 속에서 말은 의미작용을 멈추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음을 전하는 데에만 종종 쓰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가 가버렸다", "그가 하늘에 있다" 아니면 "그가 우리를 떠났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아이는, 혹은 언어학자나 시인은, 그러니까 말이 가진 힘 - 그러나 너무도 부정당하는 힘-을 말에 부여하는 사람들은 이 발화에서 거짓을 발견한다. 이사악의 형은 어른들의 언어가 그에게 감추려고 애쓰는 모든 말을 들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의 부모가 그에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내게 번역해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 中]

 


오르빌뢰르는 말한다.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죽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정의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고 죽음을 표현하는 단어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들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정말 많은, 애매모호한 표현들이 쓰이고 있었다. "영영 가버렸어", "큰 별이 졌다", "기나긴 여행을 떠났다", "하늘나라로 갔다". 동물들에게 사용하는 표현도 다양하다. "고양이별에 여행을 떠났다."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등등. 영화 [신과 함께] 1편에선 주인공의 동생이 죽어서 이승을 떠날 때 어머니의 꿈에 등장해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 대법관 됐어. 기쁘지? 거 봐. 엄마. 그런데, 나 이제 못 만나. 왜냐면 대법관 돼서 하늘나라 가거든. 거기서 나쁜 놈들 심판해 줄 거야. 그러니까 나 만난다고 부대 찾아오고 그러면 안 돼."

 

어머니는 안다. 아들이 죽은 것을. 아들도 안다. 자신이 죽은 것을. 그러나 둘은 필사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비껴가며 대화한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죽음', '죽었다'라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기피한다. 그러다 보니 말의 어폐 혹은 모순이 발생할 때가 있다. 책 속의 이사악이 느끼는 바로 그 모순이 그것이다. 죽은 동생은 땅에 묻으면서, 하늘나라로 떠났다니. 아이는 혼란에 빠진다. "나는 대체 어딜 보아야 동생을 찾을 수 있는 것인가요?"

 

죽음이라는 것, 생명의 단절이라는 것, 관계의 종말이라는 것. 우리는 그것을 말하는 데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 누가 '죽음'을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오르빌뢰르는 유대교의 죽음에 관한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유대인들은 묘지에서 하나의 기도문으로 말한다. 죽은 자들은 땅과 하늘에 있고, 이곳과 저곳에 있으며, 고인들의 불멸의 영혼은 신과 결합하지만 그들은 오직 우리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고. 우리의 죽은 자들은 찾기 위해서는 이 모든 방향을, 하늘과 땅을, 역사의 처음과 끝을 동시에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유대교가 단 하나의 믿음, 단 하나의 언어로 사후를 정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이면서 물이고, 바다이면서 계곡이며, 여름이면서 겨울. 딱딱하면서 동시에 부드러운, 공포스러우면서 환희에 찬. 땅에 있음과 동시에 하늘에 존재하는. 그런 모순적인 이야기.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표현하는 가장 이상적인 이야기. 우리는 그것을 직접 겪기 전까지 그것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아니, 겪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 우리는 과연 '죽음'을 배울 수 있을까? 공부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이 노력으로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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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인간들 중 가장 위대한 자에게 말씀하신다. 확실히 너는 죽을 테지만, 너의 생이 남긴, 아직은 미미한 흔적뿐인 무언가를 너의 후손들이 자라게 할 것이다. 너의 존재와 너의 가르침의 위대함은 너의 뒤에 올 자들을 통해서 계속 드러날 것이다.

 

죽음을 배운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 단,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모세처럼 돌아서 미래를 본다는 조건하에서 가능하다. 미래는 우리 앞이 아니라 우리 뒤에, 우리가 막 오른 산의 흙 위에 새겨진 우리 발자국에 있다. 그 흔적 속에서, 우리를 뒤따를 사람들과 우리 뒤에 살아남을 사람들이 우리가 아직 거기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읽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우리의 죽음 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그 말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우리가 앞서 존재했기 때문에 훗날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잘 만들고, 잘 말하고, 잘 이야기할 무언가가 있다고.

 

[당신이 살았던 날들 中]

 

 

랍비 오르빌뢰르는 말한다. 죽음은 배울 수 있다고. 단 조건을 충족했을 때 가능하다고. 그녀는 돌아서라고 말한다. 돌아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나온 길에 파여진 우리의 발자국을 보라고 말한다.

 

사실 완벽하게 이해한 부분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장 강력하게 나의 마음을 끌어당긴 부분이기도 하다. 돌아서서 미래를 보라니. 미래는 과거에 있다니. 마치 타임 패러독스를 설명하는 듯한 말 같았다. 과거가 미래가 되고 미래는 과거에 있고 현재는 그럼 어디에 있으며......(?)

 

돌아서서 우리가 지나온 흔적들을 바라보면 나 또한 책에 소개된 모세의 전승처럼 편안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흔적, 나 스스로 해답을 찾지 못한 그 흔적을 후대의 사람들이 발견하고 해석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가지면 나 또한 죽음을 배운 것일까?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앞으로 발을 내디딜 때 조금은 힘을 주고 깊은 발자국을 땅 위에 새기고자 노력할 것 같기는 하다.

 

오르빌뢰르는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하나의 삶, 하나의 생은 단지 그만큼의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고. 이어받아온 생 그리고 기억. 물려주게 될 흔적. 그 모든 것들이 합쳐진 매우 무거운 것이 한 사람의 생이라고.

 

 

더욱이 각 세대는 다른 세대에 뒤이어 오기 때문에 부식토 위에서 성장하며, 이 부식토 덕분에 무언가를 키워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떠난 자들은 시간이 없어 그것이 꽃 피는 것을 보지 못할지라도.

 

이것이 유대인들이 삶에서 죽음으로 통과하는 시간에 하는 공식적인 약속이다. 그것은 떠나는 자의 무언가가 살아남은 자들의 생을 구성하여 앞으로 그들이 될 자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죽은 자에게 말한다. 이스라엘의 아들딸아, 너에게서 비롯되고 영원히 우리와 하나 되어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갈 것의 목소리를 들어라.

 

[당신이 살았던 날들 中]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그것은 나의 조각, 물려받은 어떤 이의 조각, 물려줄 누군가의 조각일 것이다. 당신이 살아왔던 날들, 당신이 살아가는 날들, 당신이 살아갈 날들. 더없이 덧없지 않다. 더없이 위대하다.

 

 

문득,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 감돌면서 명징한 사실이 떠올랐다. 이 체리나무의 뿌리들처럼 내 뿌리들이 이 땅에서 자랐다. 어리석음, 질투 혹은 두려움이 내 뿌리들을 뽑고 이 뿌리내림의 흔적들을 지우고, 살아 있는 자와 심지어 죽은 자들을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고향 땅에서 멀리 다시 심어진 인간은, 그리고 체리나무는 기이한 기억을 품은 과실을 맺는다. 언젠가 그들을 보호해 주었던 들판의 기억을. 피처럼 흐르는 그들의 붉은 과육에서 선조들의 '피들'이 울부짖는다. 베스트호펜의 체리나무들은 그곳의 후손들처럼 절대 죽지 않는다. 자신들의 땅에서 뿌리 뽑힐 때조차 그들은 보존된다. 그들을 화주에 담그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생명수는 대대손손 이렇게 외치게 할 것이다.

 

"레하임!"(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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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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