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 결국은 치달아야 한다

글 입력 2022.01.15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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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에겐 관성이 있다. 흐르는 시간에 편승해 사는 것이다. 잘못의 원인을 찾지 않고, 행복의 근원을 찾지 않는다. 하루하루 살기도 빠듯하다는 핑계다. 참으로 안 좋은 버릇이다.


때문에 해가 바뀌는 것이 꽤 도움이 된다. 숫자가 커지니 내 삶에 대한 책임감도 같이 커질 거란 이상한 무게감 때문인데, 새해가 되고 한두달 지나면 또다시 타성에 젖는다.


반갑게도 최근, 관성을 끊어주는 존재를 만났다. 그 존재는 나 자신도, 충고와 조언을 주는 타인도 아닌 바로 필자를 둘러싼 외부 상황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외부 상황은 필자를 지탱하고 있는 꽤 견고한 성이었고, 성이 무너질 거란 소식을 접하니 필자는 불안하고 조급했다.


그리곤 손쓸 틈도 없이 성의 외벽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잔해물은 쌓이고 쌓여 필자의 삶을 가로막았다. 앞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방해물로 치부되었던 잔해물은 필자에게 쉼표를 주었다. 방해물을 앞에 두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삶을 되돌아봤다. 그리곤 방해물을 뛰어넘어 ‘진정 원하는 것’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서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책 속의 인물도 삶에 도태되어 있다. 낙오자라는 꼬리표를 스스로 붙이고 더 이상의 자기 연민도, 떼어낼 의지도 없이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 가둔다. 하지만 이들은 갑자기 자신이 설정해놓은 노선을 틀고 삶의 주체자가 되어 나아간다.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식을 접한 후부터다.

 

 

 

개인의 관성



에나 유키. 교내 카스트제도에서 가장 밑단에 있는 학생이다. 자신을 뚱뚱하다고 칭하는 아이. 학교에선 상위층 아이들의 심부름을 하고 집으로 가선 어머니의 착한 아들이 된다. 그리곤 다시 학교로 가서 아이들이 시키는 궂은일을 한다. 궂은일엔 이유 없이 맞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사이클이 익숙해진 유키다.


 

아무리 아등바등해봤자 신의 섭리처럼 나는 하류층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욱 두려운 건 아마도 이 법칙이 사회에 나가서도 이어지리라는 사실.

 

- 본문 중

 

 

유키는 괴롭힘을 받을 때마다 어딘가로 SOS를 보낸다. 지구가 멸망하게 해달라고. 그 신호를 누군가가 받은 것일까. 한 달 뒤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해 멸망할 거라는 뉴스가 나온다.


유키의 엄마 시즈카. 어릴 적 부모님에게 맞았던 아픔을 아이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 아빠에게서 도망쳤다. 유키에겐 아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위해 ‘아빠는 죽었다’라는 거짓말을 한다. 그리곤 억척스러울 치만큼 열심히, 홀로 아이를 키웠다. 여느 엄마처럼 아이에게 오후 간식을 챙겨주지 못했지만 굶기는 일은 없었다. 그런 그는 아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지구의 끝을 알리는 소식에도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선다.


둘의 아빠이자 남편인 메지카라 신지. 그 역시 어릴 적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자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더럽히는 일을 해왔다. 인생의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논리다. 그는 누군가를 죽여주면 한자리 내어주겠다는 상사 고토의 말이 달갑진 않지만 고토는 항상 자신에게 정당한 대가를 줬다는 이유 하나로 살인 청부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가수 Loco. 고비가 있었지만 국내 최고의 프로듀서를 만나고 오리콘 차트 1위에 오르는 가희가 된다. 하지만 유명세는 그에게 오히려 갈증을 가져다줬다. 돈, 술, 음식으로는 마음의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에게 진정한 가족, 친구의 의미는 퇴색되어 의심,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가수 Loco’의 그림자에 자신의 자아가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어둠의 늪에 깊이 빠진다.


각 인물의 삶은 의도하지 않아도 관성에 실려 흘러갔다. 괴롭히면 괴롭히는 대로, 부적절한 일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타인의 입맛에 맞춰 진정한 자아를 묻어둬야 하면 그저 묻어두며 살았다. 마치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건 본인에게 과분하다며, 사치라 생각하며 살았다. ‘난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인생에 쉼표를 두기란 어색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어떤 사건’으로 인생의 샹그릴라를 갈구한다. (*샹그릴라 :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지상낙원'으로 묘사된 마을로, 1933년 소설이 출판된 이후 이상향을 의미하는 일반 통용 어휘로 사전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관성의 줄을 끊다



‘어떤 사건’ 즉, 지구 멸망이 그들의 관성을 끊었다.


지구 멸망 한 달 전, 유키는 초등학생 때부터 애정을 갖던 동급생 유키에에게 용기 내어 다가간다. 그리곤 친부모님을 찾기 위해 약탈과 반란에 사로잡힌 도쿄로 떠나는 유키에의 곁을 지킨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괴롭혔던 동급생에게 일격을 가한다. 드디어 계급사회의 피라미드를 무너뜨린다.


신지는 20년도 전에 헤어졌지만 항상 무의식에 떠올렸던 시즈카를 찾아간다. 그는 도쿄로 간 아들을 찾으러 가야 한다는 시즈카를 보필하며 유예했던 그리움과 애정이라는 감정을 꺼낸다. 그런 신지와 시즈카, 유키 세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시즈카는 책임감에 묻어둔 진실을 꺼낸다. 세 사람은 가족이라고, 유키의 아빠는 신지라고, 유키는 신지의 아들이라고.


그들이 가족이라는 사실에 어색해하고 익숙해져 갈 때쯤, 가수 Loco는 치밀하게 계획되고 필요시엔 공정함을 조작하여 만들어진 가수 Loco의 틀에서 자신을 빼내기 위한 노력을 한다. 인간 미치코를 지우고 가수 Loco의 탈을 씌운 프로듀서를 죽인다. 그리곤 친구, 가족의 구원으로 인간 미치코의 자아를 찾아갔고 자신의 뿌리인 오사카에서 밴드 생활을 같이한 친구들과 지구의 마지막 날을 함께 맞이한다.


결국 인간은 극단에 치달아야 하는 걸까. 그래야 자신의 샹그릴라를 찾아가는 걸까.


인물들은 일상을 살면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 인정받지 못한 실패자로 여긴다. 하지만 인류 앞에 동등하게 놓인 지구 멸망 앞에서 살면서 잊었던 자신의 감정, 욕구를 갈구하고 결국엔 지구의 마지막을 알리는 소행성의 찬란한 빛 앞에서 자신을 깨닫고 사랑한다.


결국 10년, 20년, 40년을 살아도 인물들은 멸망이 예고된 한 달 동안의 가장 자신답게 살았다. 온전히 자신의 욕망을 좇았고 진정으로 본인이 바라던 걸 이루었다.

 

 

 

지구 멸망은 불행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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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치달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 멸망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인물들에게 최상의 인생을 선사했다.


 

그렇잖아, 다들 조금 더 행복한 줄 알았다. 그 안에서 나만 홀로 쓸쓸하게 사라지기는 싫었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할 최고의 죄악과 사랑을 손에 넣은 여신으로, 세상이 가치를 인정하는 행복의 형태에 흠집을 내서 뚜렷하게 기억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은 대체 뭐지? 다들 사실은 별로 행복하지도 않고, 황폐했던 것 아닐까?

 

- 본문 중

 

 

자연스레 드는 생각.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난 무엇을 해야할까?’ 극단적이지만 이 질문이 현재 본인이 가장 원하는 것, 인생의 최우선 가치, 현재의 가장 큰 욕망 또는 현실에 치여 미뤄둔 꿈을 꺼낼 수 있게 한다.


한 달 뒤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도서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가 던지는 질문이다.

 

 

[신재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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