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영 곱하기 영은 영

우주먼지의 발자국
글 입력 2022.01.15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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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달라지지 않으면 영영 이 지난한 굴레 속에 휘말리며 살게 되리라는 끔찍한 미래가 그려졌다. 스스로를 버려온 그야말로 배은망덕한 나지만 그래도 딱 한 번쯤은 뭔가를 제대로 시도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안 되면 그냥 약해 빠진 인간으로 태어난 죄라고 치기로 했다. <나 아껴주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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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다. 그것은 조금 피곤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진이 다 빠지고 녹초가 된 상태를 겨우 표현할 수 있는 말일 뿐이었다. 나는 그 말을 여러 번 읊조렸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의 욕망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중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것,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의견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 나를 비난하는 말에 반격하지 못하고 수긍해버리는 것, 망가지는 상황은 모두 나 때문이라는 자책에 빠져드는 것, 타인의 차가운 태도에 너무 쉽게 상처받아버리는 것. 이것은 습관에 가까웠다. 그런 것들이 모여 나와 내 삶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도 죽지 않는 욕망과 소망, 희망 같은 것들 때문에 나는 더욱 괴로웠다. 스스로와 계속해서 싸워야 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주저 없는 날이 되었으면 했다. 자꾸만 돌아보는 일이 나를 낡게 만들어 가는 듯했다. 고작해야 내 마음 하나 달래는 것뿐인데 그게 너무 어려웠다. 괜찮다가도 어느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있는 나를 보면 숨이 차고 슬퍼졌다. 그냥 정말 슬펐다. 짜증나고, 화나고, 답답한 마음을 넘어 그냥 정말이지 슬프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슬픔이었다.


나는 나와 내가 노력하는 모든 것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 내가 원망하는 모든 것들이 그려지지 않아서 슬프고, 지워지지 않아서 슬펐다. 깊게 새기고 싶은 것들은 그저 먼지를 쓸어내는 정도밖에 안돼서 안타깝고, 사라졌으면 하는 것들은 깊게 패여 도장처럼 이리저리 낙인을 찍고 다닌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그 중에서도 벗어난 줄 알았는데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가장 따끔거렸다. 이대로 슬픈 어른으로 자라고 싶지 않았다.


<나 아껴주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프로젝트 치고는 이름이 조금 메떨어진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직관적인 편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용은 사실 별거 없다. 프로젝트라는 말도 거창하다. 100일간 내 모든 행적을 일지로 기록해 블로그에 업로드 하는 것이 전부였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정해진 방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내 목적은 하나였다. 내가 괜찮은 사람인 척 뻔뻔하게 살아도 된다는 것을 스스로 믿게 만드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줘야 했다.


모든 걸 네가 망치고 있다는 생각은 합리적이지 않아, 옳지 않아. 정신 차리고 객관적으로 들여다보자. 우주 먼지의 먼지로 사는 주제에 너무 피곤하게 살려고 애쓰지 말자.


이 모든 말들을 그냥 흘려 보내지 않으려면 역시 글로 써야했다. 이렇게 절박하면서도 무겁지 않고, 조촐하면서도 진중한 마음으로 시작된 <나 아껴주기> 프로젝트는 기대 이상의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열흘이 넘어갈 때쯤부터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었음을 체감했다. 원래라면 이런저런 걱정으로 밤새 뒤척이고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누르느라 애쓰고 있었을 텐데 옅게 울리는 맥박을 감지하며 설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미래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스무 날이 지나고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을 반갑게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샘솟아 타인과 마주하는 순간마다 스스로를 검열하던 나쁜 습관을 뽐낼 새도 없이 상황에 녹아 들었다. 완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았다.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억지도 부릴 필요가 없었다. 미워하고 분노하는 뜨거운 감정을 내려놓고 나니 두렵기만 하던 세상이 조금은 달라 보였다. 누구도 나를 해치려고 하지 않는구나. 나를 죽일듯이 미워하던 건 이 세상에 나 뿐이었구나. 지난 모든 아픈 것들은 내 착각과 망상이 만들어낸 환상통이었던 걸까?


숨통이 트였다.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한번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주춤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고 싶었던 일들을 발견하면 실행에 옮겼다. 아주 작은 일이었지만 성취가 쌓이니 자존감도 점차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쓸모와 존재감 같은 것들에 개의치 않고 이런 저런 일들에 발을 담그던 어느 날이었다. 메일 한통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공모전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두 눈을 의심했다. 내가 한글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문장의 처음으로 돌아가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그것은 분명 얼마 전 별 기대 없이 공모전에 응모했던 글이 수상작으로 당선되었다는 말이 분명했다. 혹시나 오류였다는 정정 메일이라도 올까 서둘러 답신을 작성하며 생각했다.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되는구나. 나를 아끼면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돌덩이 같이 무겁던 세상이 차츰 무게를 덜어갔다. 온 세상이 나 하나만 끈질기게 노려보는 줄 알았던 과거의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내 지난 모든 성장과 발전은 외국의 낯선 춤을 추듯 한 걸음 앞서다가도 두 걸음 물러나는 식으로 날 애태우곤 했지만 이때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언제라도 다시는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겠구나. 무너지지 않을 주춧돌 하나를 드디어 놓았구나.


그제야 진정으로 스스로에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이젠 마음 놓고 방황할 수 있게 되었다. 불안이 나를 좀먹지 않도록 씩씩하게 걷는 법도 곧 알게 되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걸 알기 전까지 어떻게든 살아남기만 하자. 그런 마음가짐도 장착했다. 그래, 이 정도면 넘치게 행복하지.


이런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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